위대한 순간은 온다.
위대한 순간은 온다 유학 중 내가 살던 기숙사의 경비 아저씨 토니는 한 예순쯤 됐는데 전직이 콜택시 기사였다.
파바로티와 동향이라는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아침이면 그가 밖에서 일하며 부르는
<오, 솔레미오>소리에 깨곤 했다.
그가 언젠가 자신이 기사시절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에 겪은 한 일화를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그는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가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경적을 한두 번 누르고
가 버렸겠지만 그날 밤 그는 일부러 차에서 내려 벨을 눌렀다.
“잠깐 만요.” 아주 작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 나온듯한 복장에 모자 까지
단정히 쓴 아주 나이 많은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모두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 할머니는 문간에 놓인 사진틀과 앨범이 가득 담겨있는 상자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할머니 그것도 가져가실 거예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두고 갈 테야.”
차에 타자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식구가 없고.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다우.”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이 이슬에 반짝였다.
토니는 요금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파티를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랫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제 피곤해, 그냥 갑시다”라고 말했다.
침묵 속에서 토니는 할머니가 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간호사들이 할머니를 맞아 휠체어에 앉혔고, 토니는 자기도 모르게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주었어. 아주 행복 했다우.”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를 두고 토니는 건물을 나왔고, 뒤로 문이 ‘찰�’하고 닫혔다.
“그건 마치 삶과 죽음 사이의 문이 닫히는 것 같았어.
난 그날 밤 한참 동안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 다녔지.
그 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 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더라면… ,
돌이켜 보건대 난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 본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 했을지 몰라.”
우리는 보통 우리의 삶이 아주 위대한 순간들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순간, 내가 나의 모든 재능을 발휘해 위대한 일을 성취할 날을 기다린다.
내게는 왜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순간은 우리가 모르는 새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 별 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대통령에게도, 목사님에게도, 자동차 정비공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온다.
장 영희(서강대 교수)
< 네이버블로그 나무가 나무에게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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