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오후
늦은 오후
영등포에 볼 일이 있어 택시를 세웠습니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기사분은 행선지를 묻더니
잠시 망설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타라는 신호를 하십니다
워낙 정체구간이 많은지라 가시기를 꺼려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약간 불쾌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사실은 오늘 집사람이랑 데이트가 있어서 일을 빨리 마치려구요"
얼굴에 환한 웃음을 피워내시며 그 분은 말을 잇습니다
"저희 집에는 아흔을 앞 둔 장모님과 같은 연배의 제 어머님이
방을 하나씩 차지 하고 계시지요 장모님은 치매를 앓고
제 어머님은 중풍으로 누워계십니다
집사람은 삼백육십육일을 두 어머님 치닥거리에 아플 시간도 없어요
오늘이 결혼 기념일인데 아들놈이 제 어머니 모시고 나가
식사라도 하라고 돈을 좀 주더군요 그래서 마음이 바쁘답니다"
치매를 앓았던 시모님을 잠시 모셨던 기억이 있던터라
'아~~~! 어쩜 좋아'하는 탄성이 마음의 문을 박차고
튀쳐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까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요'가 아닌
"차암~ 아름다운 부인을 두셨습니다"가 앞장 섰습니다
"웬걸요~ 우리 집사람 못생겼어요 허허"
결혼기념일을 핑게 삼아 아내의 손을 잡고 호젓한 고궁을
거닐고 싶다는 기사분의 미소를 뒤로하고 택시 문을 닫는 순간
내 가슴의 핸들을 다시 잡는 사랑의 천사
행복의 행로는 여전히 8차선 대로(大路)였습니다
Tip : 어리석은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본성에 더욱 신경을 쓴다. -그라시안
*그라시안 (스페인 철학자·작가) [Gracian y Morales, Balta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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