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일·가정의례

경주김씨 족보개황

金 敬 峯 2008. 2. 10. 11:40
 

 

慶州金氏 族譜槪況

 

(경  주  김  씨    족  보  개  황) 

 

宗親會

 

 인사말씀

우리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휘 알지요,
중조는 조선개국공신 계림부원군 제숙공 휘 이시며, 첫째아들은 휘 맹성이니 자헌대부 형조판서로 시호는 희경공으로 맹파라 칭하며, 둘째아들은 휘 중성이니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중파라 칭하며,셋째아들은 휘 계성이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경파라 칭하고 또는 계파라고도 합니다.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 관리하고 있는 계림군파(鷄林君派) 20세손인 金明經(김명경) 입니다.
먼저, 저희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 홈페이지를 찾아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족보는 한 집안의 역사서이며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 유산입니다.
하지만 현재 족보는 한문으로 되어있고 찾아보기가 까다로운 점 등의 이유로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에 비록 부족한 실력이지만 집안의 역사를 바로 정립하고 잊기 쉬운 우리의 전통문화를 우리들의 후세들이 쉽게 이용 할 수 있게 하고자 감히 경주김씨 (慶州金氏)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휘 순웅(順雄)후 계림군파(鷄林君派)란 이름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부족하나마 이것을 토대로 종친 님들께서 족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것으로 믿고 알기쉽게 한글화 하여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홈페이지 입니다.
우선적으로 계림군파(鷄林君派)를 먼저 시작하였으나 차후로 대장군공(大將軍公)후 전체를 할려고 하나하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많은 시간동안 준비과정을 거쳐서나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 또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시면 메일이나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시면 더욱 나은 홈페이지가 될 수 있도록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이 방문, 이용하시고 집안의 구심점이 되어 집안의 자부심으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족보에대한 설명

 

1. 족보(族譜)란?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系譜). 일명 보첩(譜牒) ·세보(世譜) ·세계(世系) ·가승(家乘) ·가첩(家牒) ·가보(家譜) ·성보(姓譜)라고도 한다.

족보의 종류

  •  족보 또는 보첩(譜牒)
    관향을 단위로 한 씨족의 세계와 사적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여러 종류의 보책을 흔히 부르는 말이다.

  • 대동보(大同譜) 또는 대보(大譜)
    시조가 같으면서도 본이 갈라져 본을 달리 쓰거나 성을 달리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모든 종파를 총망라하여 편찬한 족보를 말한다. 즉, 본관은 다르지만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만든 책이다.

  • 세보(世譜)
    두개 파 이상의 종파가 서로 합해서 편찬한 보첩을 말한다.
     

  • 파보(派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한 계파의 혈연집단을 중심으로 수록하여 편찬한 보첩을 일컫는다.
     

  •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 존속(尊屬 ; 자기 윗대)과 비속 (卑屬 ; 자기 아랫대)을 망라하여 이름자와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 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이다.
     

  • 계보(系譜)
    가계보, 또는 세계보라고도 하며,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이다.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거나 어느 한 부분만 수록되기도 한다.
     

  • 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나 내용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보첩을 말한다.
     

  •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集成)한 책으로 족보의 사전(辭典)이라 한다.

2. 족보 보는법

 요즈음 족보(族譜)를 보는 방법을 몰라 자녀들에게 집안의 내력을 설명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젊은세대들이 족보(族譜)에 관심이 없는 것도 있겠으나, 정작 낡은 유물이나 봉건사상쯤으로 도외시하는 한자(漢字)와 고어(古語)등 교육의 부재에도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조상의 얼이 담겨있는 귀중한 보첩(譜牒)을 경건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고,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족보 편수하는 방법이나 구성, 체재 등 열람하는 방법을 숙지 하여야 한다.
 

가. 필수요소

  • 먼저 '자기(나)'가 어느 파(派)에 속해 있는지 알아야 한다.
    파를 알지 못할 경우에는 조상이 어느지역에서 살았고, 그 지방에 어떤 파(派)가 살았던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도 파(派)를 모를 때는 부득히 씨족 전체가 수록되어 있는 대동보(大同譜)를 일일이 찾아 확인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예) 파(派)의 명칭은 흔히 파조(派祖)의 관작명이나 시호또는 아호(雅號)와 세거지명등을 따서 붙인다. 족보(族譜)에서 파(派)를 찾으려면 계보도 [系譜圖(손록孫錄)] 외에 세계도(世系圖)를 보아야 한다. 세계도에는 대략 분파 계도를 그려 놓고 무슨 파(派)는 몇 권(卷) 몇 면(面)이라고 표시되어있다.

     

  • 시조(始祖)로부터 몇 세손(世孫)인지 알아야 한다.
    족보(族譜)는 횡으로 단을 갈라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혈손을 같은 단에 횡으로 배열함으로써 자기 세(世)의 단만 보면 된다.
     

  • 항렬자(行列字)를 알아야 하고, 족보에 기록된 이름(譜名)을 알아야 한다.
    예로부터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호적에 올린 이름에는 항렬자를 넣지 않았더라도 족보에 실을 때는 반드시 항렬자를 넣은 이름을 기재했으므로 이를 알아야 한다.

나. 족보 보기 실례

  • 실제 우리 가정에 있는 인쇄물 족보를 펴보자.
     

    • 족보를 펴면 오른쪽에 세로로 표시되어 있는 게 시조(始祖)로부터의 세(世)를 나타낸다. 같은 단의 횡으로는 세가 같은 혈손들이며 오른쪽으로부터 장남, 차남 등의 순서로 기록된다.
       

    • "자 희인(子 希仁)"을 기두(起頭)라 한다. 오른쪽의 작은 글씨 ③은 "희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윗대를 표시 한 것이다.
       

    • ④(見上十三)는 윗대를 보려면 앞의 13쪽을 보라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같은 책의 13쪽을 말하며 '見三之十三'이라면 3권의 13쪽을 보라는 뜻이된다. 아래의 ⑩을 보면 다른 권의 쪽수를 나타내고 있다.
       

    • ⑤와 같이 이름 아래 작은 글씨는 아명(兒名), 자 또는 호(號)를 표기한다. 여기서는 자는 '구숙'이며 호는 '강호'라고 표기되어 있다.
       

    • ⑥의 '계자(系子)'는 그 윗대인 19세 [경(鏡)]이 아들이 없어서 '감(堪)'을 양자(養子)로 맞았음을 나타낸다. 이같이 양자를 세운 경우에는 ⑦처럼 생부(生父)를 표기해 주는데 여기에서 생부는 '령(鈴)'이라고 되어 있다.
      그림에서는 생부인 '령(鈴)'과 그 아들인 '감(堪)'의 관계가 나타나 있지 않은데 이것은 세(世)에 따라 다른 쪽을 찾아보면 나타나 있을 것이다.
       

    • ⑧에서 그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즉, 20세손 '감(堪)'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장{樟)]은 '감(堪)'의 계를 잇고, 둘째 아들[석(晳)]은 양자로 보냈다. 이를 출계(出系)라고 하며 '출후(出后)'라고 써서 나타내고 있다.
       

    • 아울러 ⑨를 보면, '감(堪)'의 세째 아들 '순(栒)'은 이후로 아들이 없었으며 또한 양자도 들이지 않았다. 이른바 손(孫)이 끊긴 것으로 이것을 '무후(无后)'라고 표기한 것이다.
       

      위와 같이 족보는 기본적인 틀을 갖고 있으며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대체로 족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 족보에는 무엇무엇이 들어 있나?

    • 출생 연대. 요즘은 서기와 간지(干支)를 함께 쓰고 있다.

    • 생전의 행적을 기록한다.

    • 사망한 연대와 사망한 나이를 기록한다.

    • 배우자의 성, 본관, 부친, 조부와 증조의 이름 및 관직도 표기한다.

    • 배우자의 외조부의 성과 본관, 이름, 묘소의 소재지이다.

    • 출가한 딸의 배우자, 즉 사위의 성명도 기록한다. 그러나 남녀가 평등한 요즘엔 딸의 이름과 사위의 이름을 함께 써야 할 것이다.

    • 사위의 본관과 사위의 아들, 즉 외손자의 이름 등이다.   

 

김씨의유래

 

1. <시조(始祖) 소개>

   가. 신라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또는 太輔公-諱 閼智)

   시조인 대보공(휘 알지)은 서기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 4일,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금성) 서쪽 계림(鷄林, 또는 始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

   금궤 속에서 나온 동남(童男)이 마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고사와 같으므로(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 했다. 이 '알지'는 향찰(鄕札-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하던 신라시대의 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소아(小兒),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알지'를 신라김씨(안동김씨 포함)의 시조로 모신다.

<신라김씨의 분관(分貫) 및 개성(改姓)>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이 신라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경제 기획원의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武烈王)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始祖)로 하는 강릉김씨,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始祖)로 하는 광산김씨, 신무왕(神武王)의 후손인 김영이(金令胎)를 시조(始祖)로 하는 영산(永山, 영동)김씨,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 김선궁(金宣弓)을 시조(始祖)로 하는 선산(일선)김씨, 문성왕(文聖王)의 5세손 김락(金樂)을 시조(始祖)로 하는 당악(唐岳)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은 아홉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 김운발(金雲發)은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金鳴鐘)은 경주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金殷說)은 경주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金錫)은 의성김씨,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金鐥)은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金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지(金德摯)는 울산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는데,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은 안동김씨로, 5세손 김봉기(鳳麒)의 넷째 아들은 김녕김씨로 분관했다.

 김방경의 넷째 아들은 대구김씨로, 7세손은 도강김씨로, 13세손은 밀양김씨로, 5세손은 서흥김씨로, 그 후손 중 안악김씨, 안산김씨가 나왔고, 14세손은 야성(영덕)김씨로 분관하였다.

  김녕에서 분관하여 양근김씨, 9세손에서 양주김씨, 후손에서 연주김씨, 4세손에서 영광김씨, 후손에서 영산(靈山)김씨, 15세손에서 월성김씨, 8세손에서 전주김씨, 첫째 아들 김정구의 11세손에서 청풍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기타 첫째 아들 김일(鎰) 후손은 통천김씨,  여덟째 아들 김추의 아들 김우(金佑)는 희천김씨,  여섯째 아들 김건의 후손은 영월김씨, 홍주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신라 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간 성씨는 김행(幸)이 안동권씨(權氏)로, 김순식(順式)은 강릉왕씨(王氏)로, 김궁예(弓裔)의 후손 김순백(珣白)은 광산 이씨(李氏)로, 세광은 감천문씨(文氏), 김은열(殷說)의 13세손 김영규(永奎)는 수성최씨(崔氏) 등으로 각각 개성(改姓)하였다.

 

2. 신라김씨 유래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閼智)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김씨(金氏) 성(姓)을 함께 일컬어서 신라김씨(新羅金氏)라 한다.
이 말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인김궤이출 내성김씨(因金櫃而出 乃姓金氏)..신라김씨자알지시(新羅金氏自閼智始)]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신라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신라김씨는 계림에서 탄생한 대보공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김씨성씨를 함께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일천만의 후손들이 각기 본관을 다르게 하고 있지만 근본은 신라의 김씨로 한 혈족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으로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동국만성보]에 623 본, [증보문헌비고]에 499 본으로 나타나 잇으나 그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 본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신라의 알지 계통과 가락국 수로왕 계통으로 대별되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김씨가 이 두 계통중 어느 한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라김씨 시조인 대보공 휘 알지의 탄생설화에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성이 매우 깊게 담겨 있다. 시조께서 이 땅에 탄강하실 때의 기록은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으며 유일한 역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확실하게 찾아볼수 있다. 다만 두 기록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는가와 그 시간과 계절이 다를 뿐 그 외에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외 삼국유사의 기록을 차례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65(탈해9년)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편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작은 궤가 걸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고하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는데 그 외모가 출충하였다. 왕이 기쁘하여 좌우에 일러 가로되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것이 아니냐' 하고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니 이름을 '알지'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라 하고 또 시림을 고쳐 '계림' 이라 하여 국호를 삼았다. 영평 3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의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색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잇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이것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 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쁘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이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우선 탄강의 시간대가 5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찾기에는 불가능하고 봄과 가을의 계절, 즉 시간이 다른 점은 주목할 일이라고 본다. 하나는 씨뿌리는 계절이고, 다른 하나는 수확의 계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게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나 김씨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삶의 족적에 대한 상징적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하겠다. 대보공이 출현한 시기는 신라가 건국하고도 1백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공은 바로 왕위에 나아가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7세손 미추가 왕위에 나아가고 또 그 뒤 1백여 년이 지난 뒤인 내물대왕에 이르러 김씨의 왕위 세습의 시대가 비로소 열린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민족의 대통합의 결실을 맺게 되는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신라김씨는 개국이나 건국 등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과 결실과 수확의 성격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의미가 다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보공의 탄생을 단순히 김씨의 시조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당연히 3월 (봄 : 파종, 시작의 개념)의 상징이 더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 3월과 새벽이라는 시점이 그것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새벽에 닭울음 소리를 듣고 금궤를 발견하게 되니 어두운 밤에 닭이 울고 있음은 새벽을 알림이요 새벽은 밤의 어두움을 열고 새로운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던가!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결실과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호공에 의해 금궤가 발견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반 범인이 아닌 왕의 손에 의해 금궤가 열려졌고, 누었던 아이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 스스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혁거세대왕과 탈해대왕의 탄생설화와 달리 이미 지혜와 그것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출현하였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수확과 결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의 상징적인 사실을 보면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한 특성은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모든 시대에 걸쳐 신라김씨의 인물들이 보여준 생존 방식과 역량, 남긴 족적들에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보공의 탄생에서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두 가지 기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암시, 바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원형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후예들이 살아온 2천여 년의 유구한 삶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여준 특성은 바로 대보공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예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왕계를 보면 역대 56왕중 김씨가 38명이며 최초의 김씨왕은 신라 13대 미추왕으로 알지의 7세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면서 무려 6백여 관향으로 분적 되었으나 그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80여 본으로 추정되며 이중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후손들이 나왔다
경순왕에게는 아들 아홉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넷째 아들인 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구안동, 청풍, 김녕, 도강, 전주, 익화, 영광, 안산 김씨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해지며, 이밖에 선산, 의성, 언양, 울산, 나주, 상산, 안로, 연안, 순천, 고령 등이 알지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또한 알지계에서 타성으로 갈려나간 후손으로는 김행이 안동 권씨로, 김순식은 강릉 왕씨로, 궁예의 후손 순백은 광산 이씨로, 세광은 감천 문씨로, 은열의 13세손 영규는 수성 최씨로 각 각 개성 하엿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명문거족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룩하여 온 범 김씨는 많은 명신, 대유, 석학들을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하고 명문의 긍지를 심어 신라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 김씨들의 입김이 닿지않은 일들이 없을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구한말에 죽음으로써 나라와 가문의 기백을 지킨 인물들과 일본의 압제정치 속에서 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자립정신과 굳건한 투혼을 불살라 온 독립투사들의 거룩한 발자취는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김씨들이 조국의 발전과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3. 경주김씨 유래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 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謁智)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신라(新羅)로 하였으며,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慶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여 지방제도의 개편, 통치 지역의 변동 등으로 명칭의 변화가 많았으나 영남지방(嶺南地方)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지위에는 변동이  없다가 1413년(태종 13)에 와서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에서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진 김씨(金氏)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한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新羅本記)에 기록된 탄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檀紀 2398年(서기 65년) 漢明帝  永平八年 新羅四代 昔脫解王 乙丑 3月 어느날밤에 金城(금성) 서쪽 始林(시림)의숲속에서 닭의울음소리가 길고 明朗(명랑)하게 울려옴으로 왕께서 瓠公(호공)을 시켜 가보시게 하니 금빛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음을 보고 돌아와서 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열어본즉 용모가 아름다운 남아가 나왔으므로 始林(시림)를 鷄林(계림)이라 고치고 아이는 金櫃(금궤)에서 나왔으므로 姓(성)을 金(김)이라하고 王(왕)이 기르시는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지라 이름을 閼智(알지)라 하였으며,왕이 좋은 날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김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김아도(阿都)를, 아도는 김수류(首留)를, 수류는 김욱보(郁甫)를, 욱보는 김구도(俱道)를, 구도는 김미추(未鄒)를 낳았다. 알지의 7세손인 미추가 262년 다.
대종인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 남아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을 시조로하는 강릉 김씨,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하는 광산 김씨,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를 시조로하는 영산(永山, 영동) 김씨,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일선) 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한뒤 왕위를 오르게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 9아들중 1자부터 4자 까지는 모두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첫째 김일(마의태자)의 1자인 김선웅은 경주 김씨 정간공파,
         2자인 김순웅은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둘째 김굉의 1자  운발은 나주 김씨,
               2자  우발은 경주김씨 안노백파,
    셋째 김명종은 경주 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은 경주 김씨 대안군파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鍵)은 강릉김씨,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는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으며, 구안동, 청풍, 금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 등이 모두 김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알지계 김씨에서 다른 성으로 갈려간 성씨는 안동 권(權)씨, 강릉 왕(王)씨, 광산 이(李)씨, 감천 문(文)씨, 수성 최씨 등이 있다.

     분파 개황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분파를 대별하면 아래와 같다.(경주김씨 尙州종친회 기념지2000.4.25발행 참조)

    (1)영분공(대보공 휘 알지의 29세 휘 명종 시 영분공)의 분파개황(아래 각파는 영분공 12세손 명암공 휘 인경의 후손에서 분파된 파명임)

    1. 두계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충유)

    2. 수은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충한)

    3. 시어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충보)

    4. 참찬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충익)

    5. 밀직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충원)

    6. 병판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남보)

    7. 판삼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남분)

    8. 평장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남길)

    9. 두암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남귀)

    10. 월성부원군파(영분공의 18세손 휘 천서)

    11. 강릉공파(영분공의 17세손 휘 서)

    12. 참의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생수)

    13. 부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상한)

    14. 현감공파(영분공의 16세손 휘 정심)

    (2) 대안군(대보공 휘 알지의 29세 휘 은열 시 대안군)을 기세로 한 분파 개황

    1. 대안군파(휘 은열을 기세로한 파)

    2. 병판공파(대안군 17세손 휘 덕재)

    3. 백촌공파(대안군 17세손 휘 문기)

    4. 익화군파(대안군 17세 휘 인찬)

    (3) 판도판서공(휘 장유-대보 휘 알지공 후)의 분파 개황

    1. 판군기감사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휘 을식)

    2. 감사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휘 을돈)

    3. 직장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휘 을당)

    4. 공조판서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휘 을귀)

    5. 이조판서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휘 원기)

    (4) 태사공(휘 인관-대보공 휘 알지공 후)의 분파개황

    1. 전서공파(태사공 9세손 휘 자정)

    2. 상촌공파(태사공 9세손 휘 자수)

    3. 우재공파(태사공 10세손 휘 한)

    4. 송재공파(태사공 11세손 휘 수량)

    (5) 장군공(휘 순웅-대보공 휘 알지공 후)의 분파개황

    1. 계림군파(장군공 13세손 휘 균)

    2. 송강공파(장군공 13세손 휘 헌)

    3. 충문공파(장군고 13세손 휘 온)

    4. 정숙공파(장군공 13세손 휘 서)

    5. 현령공파(장군공 13세손 휘 능)

    6. 연동파(장군공 12세손 휘 의)

    7. 봉산파(장군공 13세손 휘 세보)

    8. 춘고공파(장군공 14세손 휘 순)

       이렇게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지켜온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역사(歷史)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인재(人才)들을 대거 배출시켜 신라(新羅)와 근대(近代)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씨(金氏) 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주요 거주지

       주요세거지와 변천은 계림군파 갑자보에의하면 2세 김계성의 대부터 경기 고양군 벽제읍에 대대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5세 김홍령의 대 이후로 수원시 일원으로 옮겨 갔고 일부는 김귀령의 대 이후 평택군에 터를 잡았으며, 김학령의 대를 전후 하여서는 용인군에 세거한 것 같다.
    김승련은 연산군조 무오사화때 평남 가산에 세거를 시작하였고 김영수 대 이후는 홍주에 터를 잡은 것 같다. 6세 김억수의 대 이후 안성군에, 김연수의 대 이후로는 서산군 대산면 일원에, 김수정의 대 이후는 청양군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봉수는 임진왜란당시 충남 해미로 이거하였으며, 7세 김방 김역 형제는 임진왜란시 경북 상주 낙동면과 중동면에 이거하여 세거하였다.
    7세 김경원의 대 이후 연기군 전의면 일원, 김후원의 대부터는 진천군 월촌면 일원, 김충원의 대부터는 과천, 김감의 대부터는 강원 양양군 토성면 일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7세 김구의 대부터 공주에, 김철원의 대부터 청주에, 김인원의 대부터 결성에 터를 잡은 것 같고, 김육원은 병자호란을 만나 상주로 이거하였는데 지금의 문경군 삼남면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8세 김의진의 대 이후는 양주군 화도면 일원에 터를 잡았고 김수성 이후 청원군에, 김수겸 이후 홍천군에 옮겨 간 것 같다.
    김수준의 대 이후 보령군 웅천면에 이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때 김수안 김수향 형제는 서산군 고북면으로, 김기성은 평양으로 옮겨갔다. 8세 김수익은 김포군에 터를 잡았다.
    9세 김남훈은 포천군수를 지낸 후 그곳에서 세거하였고, 김남휘의 대 이후는 경북 경산 자인면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남오는 황해도 수천으로 퇴거하였고 김남석,김남창,김남일은 경북 예천일원으로 옮겨 갔다.
    9세 김남운은 화성군 송산면에, 김남주는 합천군 삼가면에, 김남영은 춘천에 터를 잡았다. 10세 김여진은 지금의 경북 상주군 공검면에 세거하였으며, 김계진은 영풍군 순흥에 터를 잡았다.
    김준신은 아산군 신창면에, 김리진은 횡성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1세 김언성의 대 이후로 창원에 옮겨 간 듯하며 병자호란때 김승신은 양양군 위산면에, 김상신은 회양군 장양면에 이거하였다.
    김봉신은 장단군에 터를 잡았고, 김윤신은 예산군 대흥면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군 전의면에서 세거하던 김명원의 후손들은 12세 이후로 파주군 교하면, 광타면 일원, 온양, 공주, 여주, 광주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했으며, 김수겸의 후손은 인제, 회양, 삼척등지에도 터를 잡았다.

    출처 : 블로그> bany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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