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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숭례문이여!

金 敬 峯 2008. 3. 1. 19:31
 

 

40년전 남대문...........

 

50년전 한국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살아 남은 남대문...

 

 

80년전 일제 강점기 시절 남대문....

 

 

100년전 한일합방 직전..대한제국 시절 남대문...

 

 

120년전 구한말 일본인이 찍은 남대문...

 

 

아~ 숭례문(남대문).......

 

아래는 숭례문 관련 기사들을 모아봤습니다^^

 

정도전이 지은 이름… 태조실록 '속칭 남대문'이라 적어

조선일보|기사입력 2008-02-12 02:45 기사원문보기
 

 
펜화 작가 김영택씨가 그린‘숭례문’(2007년작). 김씨는 구한말 사진과 현장 답사를 바탕으로 서울에 전차와 전봇대가 들어서기 직전인 1900년의 남대문을 정밀하게 재현했다. /김영택씨 제공

● 역사 속 숭례문

8괘로 보면 불의 괘… 불길의 형상 본따 세로로 현판 써


숭례문이란 이름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이다. '태조실록' 5년 9월조는 '속칭 남대문'이라고 적어 남대문이 일제의 비칭(卑稱)이 아님을 말해준다.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는데, 중종 31년(1536)에는 문신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종을 달아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종은 곧 울리지 않게 되었다. 폐사(廢寺)에 방치되었던 종을 가져다 달았는데, 종소리가 동남쪽의 지맥(地脈)을 제압해 국가 운수에 불리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종은 명종 18년(1563)에 사라진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의 분부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졌다가 어느 사찰에 전해진 뒤로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숭례문은 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이 음방(陰方)으로 여자의 방위라면 남문인 숭례문은 양방(陽方)으로 남자의 방위였고, 8괘로 숙청문은 '감(坎)'괘로서 물을 뜻하고 숭례문은 '리(離)' 괘로서 불을 뜻했다. 양방의 숭례문은 늘 개방한 반면 음방의 숙청문은 가뭄 때만 열었다. 실록에서 "날이 가물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문 남쪽에 만든 연못이 남지(南池), 또는 연지(蓮池)였다. 숙종 32년(1706)에는 연못의 물빛이 푸르다가 붉게 변하면서 끓는 물처럼 뜨거워져 고기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른 대문의 편액이 모두 가로로 썼지만 숭례문만 세로로 쓴 것도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나타낸 것인데, 사신을 맞는 장소이므로 서서 맞는 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명작으로 유명한 숭례문 편액을 쓴 이는 아직 논란거리다. 오세창(吳世昌)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유진동(柳辰仝:1497~1561)의 글씨라고 말했지만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고 전하고 있는데,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崇禮門(숭례문)' 탁본이 남아 있다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편액을 잃어버렸는데 남지에서 밤마다 빛이 나 파보니 숭례문 액판이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편액은 조선 전기 명필인 정난종(鄭蘭宗:1433∼1489)의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정난종의 글씨라면 3년 전 화재 때 녹아버린 낙산사의 종명(鐘銘)도 그의 글씨이니 우리 시대와는 악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건재했던 숭례문이 우리 시대에 타버린 것은 선조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 중의 수치이다. 번드르르한 외양만 추구할 뿐 기본에는 허술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 보여준 것이다. 세종 15년(1433)에 숭례문 밖에 군포(軍鋪)를 지어 순라군들을 상주시켰다. 복원하는 숭례문에는 연못도 만들고 군포도 지어 사람이라도 상주시켜야겠다. 현판이라도 건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용헌 살롱] 대문(大門)

조선일보|기사입력 2008-02-11 23:04 기사원문보기

 

 
조용헌
국보 1호인 남대문(南大門)이 화재가 나서 전소되었다.
대문(大門)이란 무엇인가? 밖으로 나가는 출구(出口)이자, 동시에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入口)가 대문이다. 대문은 동양문화에서 안과
밖, 음과 양, 그리고 성(聖)과 속(俗)을 모두 포함하면서 동시에 이 두
차원을 구분해 주는 장치이다. 특히 성과 속의 구분에서 이 대문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천장이 낮은 실내에 들어가면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천장이 높은 공간에 들어서면 왠지 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서양은 실내 천장의 높이를 올림으로써 성스러움을 표현하였다면,
동양은 그 높이 대신에 대문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표현하였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가 보면 대문이 여러 개이다. 처음에는 대체로 일주문
(一柱門)을 통과한다. 사찰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하동 쌍계사(雙溪寺)
를 예로 들면 일주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인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금강문을 통과하면 다시 또 하나 문이 나온다. 바로 천왕문(天王門)
이다. 쌍계사의 대문 배치를 보면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속세의
 때'를 벗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일종의
정화의식(淨化儀式)을 거치는 셈이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점점 더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대문이 바뀔 때마다 차원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대문을 여러
개 열고 들어가도록 장치를 하였다. 유교에서는 대문의 배치가 불교와는 약간 다르다.

유교에서는 어느 방위(方位)에다가 대문을 내야 하는가를 중시하였다. 이는 주역(周易)과 음양오행
(陰陽五行) 사상의 영향이다. 동대문을 위시하여 동서남북에 있는 4개의 대문은 주역에 나오는
'진태리감(震兌離坎)'의 방위와 일치한다. 4개의 대문 사이에 있었던 4개의 소문(小門), 즉 혜화문
(惠化門), 소덕문(昭德門), 광희문(光熙門), 창의문(彰義門)은 주역의 간(艮), 곤(坤), 손(巽), 건(乾)방에
해당한다. 그 8개 문의 중심 지점에 토(土)의 신(信)을 상징하는 보신각(普信閣)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서울은 주역 팔괘(八卦)의 중심에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남대문 화재는 어떤 의미인가?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숭례문 전소는 봉황의 저주 때문?
블로그에 실린 글 급속히 확산…엉뚱한데서 원인 찾으려는 심리 편승
2008-02-13 15:30:27

 


“남주작이 진노했다?”

국보 1호인 숭례문 화재 사건의 용의자가 구속된 가운데 이번 숭례문 화재의 원인은 “봉황의 저주 때문”

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인터넷 마당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모 언론사 블로그란에 실린 ‘남대문 화재 봉황(南朱雀)의 저주’가 문제의 글. 이 글은 “이명박 정권이

청와대 봉황 엠블렘을 제거해 남주작인 봉황이 진노했다”는 주장을 담고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주장인즉슨 새 정부 출범전에 ‘봉황의 저주가 내려졌다’는 것.

봉황은 수컷 봉(鳳)과 암컷 황(凰)이 합해져 예로부터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상상의 새로,

조선시대에는 군주의 표시로 사용돼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봉황 두 마리가 마주 서 있는 것을

‘청와대 엠블럼’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오는 25일 취임식을 맞을 새 정부는 기존의 봉황의 이미지가 너무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

엠블렘에서 봉황무늬를 제거키로 결정했다. 새 정부의 대통령 취임식 엠블럼인 태평고(太平鼓)에는

봉황이 없다.

이 글은 “봉황은 사신도의 남주작보다 더 오래된 동양의 오래된 용과 봉의 용봉 사상의 상징”이라며

“봉황은 1967년에 ‘대통령 표장에 관한 공고’가 제정된 이래 대통령 표장과 대통령기 엠블렘 문양으로

채택했다. 그것을 이명박 당선인이 40년간 이어온 봉황 표장을 제거하려 했다. 그런 와중에 남대문

화재가 발생했다”고 연결지었다.

‘봉황의 저주’를 주장하는 이들은 태평고의 ‘Q자 불꽃모양’을 문제삼는다.

글은 “´Q´의 이미지는 ´Questionalble´한 Q이다. 안그래도 대통령 취임도 전에 이명박 특검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오랜 역사적인 용봉사상을 바탕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표장을

없애버리겠다는 이상한 결정은 남대문 화재로 더욱 기이한 사건으로 다가온다”고 적었다.

또한 "Q자 닮은 로고가 봉황의 목을 잘라놓은 듯하다"고 주장했다.

이 당선인의 종교와 출생 그리고 일명 ‘이명박 특검’과도 연결짓는다.

글은 “이것이 이명박 당선자의 종교 때문에 봉황을 미신스럽게 생각해 제거하려 했다면 더욱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고, “일제가 침략해 들어온 상징으로 그들이 ´국보1호´로 지정한 그 남대문이 이제 오사카

출생의 이명박이 그것을 그 자신이 서울시장 때 개방하고 그리로 오사카 일제 화마가 다시 쳐들어온

것이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당선인의 이름 중 ‘명(明)’자와도 연관지으며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영일만에서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해와 달이 되었다(明)는 것은 오사카에서 해와 달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불꽃(明)이 되어 들어왔다. 일제 말발굽이 짓밟고 들어온 그 남대문에 불꽃이 일고 있다.

봉황의 저주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봉황 표장을 결정한 것을 상기시키며 “박정희 대통령이 결정한 봉황

표장의 청와대 엠블렘은 오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서 “이명박 당선인이 포항을 ´고향´이라

엉거주춤 표방하면서 봉황문양을 청와대에서 제거한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동적인 행태임이

틀림없다” 고 주장했다.

조선시대에도 큰 화재나 홍수 같은 인재, 천재가 발생하면 민심이 동요, 원인을 엉뚱한데서 찾으려는

여러가지 소문이 돌게 마련이었는데 ´봉황의 저주´를 비롯 갖가지 괴소문들이 21세기의 총아라할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정양 기자]

 

 

[설왕설래]해태

세계일보|기사입력 2008-02-12 21:20 |최종수정2008-02-13 08:25 기사원문보기
 
우리 조상들은 궁궐이나 도성, 사찰, 주거, 분묘 등을 지을 때 주변환경과 지상(地相)을 살펴 입지를 판단하는 풍수지리설을 신봉해왔다. 풍수(風水)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인간생활의 행복과 재앙에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풍수지리에 의한 것이다.

이성계는 천도한 뒤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리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남쪽에 숭례문(남대문)을 지었다.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어 숭례문 인근에 ‘남지’라는 연못을 팠다. 관악산보다 낮은 북악산 자락의 경복궁에 크고 작은 불이 계속 나자, 조정에서는 궁궐 남쪽 광화문 양 옆에 물기운을 몰아온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 석상 한 쌍을 세웠다. 이후 신기하게도 화재가 없어졌다고 한다.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지는 해태는 그 모양이 사자와 비슷하며, 몸에는 비늘이 있고 머리 가운데에 뿔이 달렸다. 해태 그림은 불을 억누르는 부적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하지만 화마의 위협을 지켜내던 남지는 도시개발로 사라진 지 오래다. 게다가 광화문 해태상도 지난해 6월 복원공사로 치워졌다. 풍수적으로 남지, 해태상이 모두 없어진 상태에서 숭례문이 홀로 불기운과 맞서다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해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의의 동물’ 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전설의 해태상을 많이 만들어 화기와 우환을 다스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건물의 용마루 끝을 ‘어처구니’로 마무리하는 것도 건물에 재앙이 닥치는 것을 막는다는 신앙이 깃들어 있다. 어처구니는 중국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등 10가지 인물을 형상화한 잡상이다. 하늘에 떠도는 잡귀와 살(煞)을 물리쳐 건물을 지킨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숭례문의 어처구니 잡상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국보 1호를 잿더미로 소실하기 전에 전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과학 시대에 살면서 풍수지리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대한민국의 자존심’ 숭례문을 지키지 못한 회한과 안타까움 때문에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떠도는 것 같다.

박병헌 논설위원

박병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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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막는 방패로 세웠는데 … 불로 잃어”

중앙일보|기사입력 2008-02-12 05:06 |최종수정2008-02-12 06:35 기사원문보기
 


[중앙일보 이정봉.홍혜진]

“숭례문은 그 자체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워졌다. 불을 막으려 지은 숭례문을 불로 잃은 셈이다.”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지닌 숭례문의 소실을 안타까워했다. 조선왕조는 궁궐이나 도읍을 정할 때 풍수지리를 중시했다. 왕조 창건 때는 궁궐(경복궁)의 위치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한강 남쪽에서 오는 화기를 막으려면 궁을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중국의 제왕들은 모두 남향으로 궁궐을 세웠다”며 남향을 고집했다.

결국 경복궁은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향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바위로 된 악산(관악·인왕·도봉산)에서 발생하는 화기를 막기 위해 풍수적 장치를 곳곳에 해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숭례문이다.

◇화기 넘어오는 길목=풍수지리학자들은 숭례문이 관악산의 화기가 한강을 넘어오는 기세를 막는 길목에 위치했다고 보고 있다.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쓴 것도 정궁인 경복궁과 도성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숭례문(崇禮門)의 한자를 세로로 보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다. ‘불은 불로 막는다’는 풍수 이론에 따랐다고 한다. 또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지금 남대문에서 서울역 쪽 방향에 판 조그만 연못인데 역시 화기를 누르겠다는 의도다.

조선 왕조는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길도 직통으로 내지 않았다. 종각과 종로를 거쳐 우회하는 길을 만들었다. 길을 곧게 낼 경우 숭례문을 넘어선 화기가 경복궁에 바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정종수 유물과학과장은 “숭례문은 풍수학적으로 화재를 막는 방패로 지어졌고 여러 풍수적인 보조장치를 했는데 이곳이 불에 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광화문 앞에 해태상 한 쌍을 세웠다. 불을 먹는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는 관악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불길을 집어삼킬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흥선대원군 역시 무학대사가 강조했던 관악산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해태상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해태상 옮긴 게 화재 원인?=숭례문 화재를 놓고 풍수학계 일각에선 다양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광화문 앞에 놓여 있던 해태상의 이전이다. 이 해태상은 서울의 대화재를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해 왔는데 광화문 복원 공사로 치워지면서 이런 참사가 빚어졌다는 얘기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6월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며 해태상을 포장해 경복궁 내의 보관 장소에 옮겨 놓았다. 문화재청은 내년에 공사가 끝나면 이를 광화문 앞쪽에 다시 세워놓을 계획이다.

이에 대해 전항수 한국풍수지리연구원 원장은 “남쪽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선조들은 여러 풍수적인 지혜를 발휘했다”며 “하지만 풍수지리적인 것을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과장도 “풍수를 뒷북 치듯이 어느 현상에 갖다 붙이거나 비약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정봉·홍혜진 기자

40분소방방재청이 “불길을 잡기 위해 숭례문 일부를 파손해도 된다”는 문화재청의 협조를 얻어낸 데 걸린 시간. 소방관들은 화재 초기 “훼손 방지를 위해 신중하게 불을 꺼달라”는 문화재청의 요청에 따라 40분 동안 물만 뿌리는 소극적인 진화를 했다.

◇해태=생김새가 사자와 비슷하고 머리에 뿔이 난 전설상의 동물.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을 지녔다고 해 조선시대의 사법부인 사헌부의 상징으로 쓰였다. 현재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에 해태상이 세워져 있다. 또 화재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속설이 있어 흥선대원군은 광화문 앞에 두 개의 해태 석상을 세웠다.



중앙일보 모바일 Highⓙ <905+NATE/magicⓝ/show/ez-I>

 

출처 :블로그 > 세상을 리드하는 1%가 되자. / 맑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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