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대문(大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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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서양은 실내 천장의 높이를 올림으로써 성스러움을 표현하였다면,
유교에서는 어느 방위(方位)에다가 대문을 내야 하는가를 중시하였다. 이는 주역(周易)과 음양오행
정도전이 지은 이름… 태조실록 '속칭 남대문'이라 적어
● 역사 속 숭례문 8괘로 보면 불의 괘… 불길의 형상 본따 세로로 현판 써 숭례문이란 이름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이다. '태조실록' 5년 9월조는 '속칭 남대문'이라고 적어 남대문이 일제의 비칭(卑稱)이 아님을 말해준다.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는데, 중종 31년(1536)에는 문신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종을 달아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종은 곧 울리지 않게 되었다. 폐사(廢寺)에 방치되었던 종을 가져다 달았는데, 종소리가 동남쪽의 지맥(地脈)을 제압해 국가 운수에 불리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종은 명종 18년(1563)에 사라진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의 분부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졌다가 어느 사찰에 전해진 뒤로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숭례문은 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이 음방(陰方)으로 여자의 방위라면 남문인 숭례문은 양방(陽方)으로 남자의 방위였고, 8괘로 숙청문은 '감(坎)'괘로서 물을 뜻하고 숭례문은 '리(離)' 괘로서 불을 뜻했다. 양방의 숭례문은 늘 개방한 반면 음방의 숙청문은 가뭄 때만 열었다. 실록에서 "날이 가물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문 남쪽에 만든 연못이 남지(南池), 또는 연지(蓮池)였다. 숙종 32년(1706)에는 연못의 물빛이 푸르다가 붉게 변하면서 끓는 물처럼 뜨거워져 고기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른 대문의 편액이 모두 가로로 썼지만 숭례문만 세로로 쓴 것도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나타낸 것인데, 사신을 맞는 장소이므로 서서 맞는 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명작으로 유명한 숭례문 편액을 쓴 이는 아직 논란거리다. 오세창(吳世昌)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유진동(柳辰仝:1497~1561)의 글씨라고 말했지만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고 전하고 있는데,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崇禮門(숭례문)' 탁본이 남아 있다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편액을 잃어버렸는데 남지에서 밤마다 빛이 나 파보니 숭례문 액판이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편액은 조선 전기 명필인 정난종(鄭蘭宗:1433∼1489)의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정난종의 글씨라면 3년 전 화재 때 녹아버린 낙산사의 종명(鐘銘)도 그의 글씨이니 우리 시대와는 악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건재했던 숭례문이 우리 시대에 타버린 것은 선조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 중의 수치이다. 번드르르한 외양만 추구할 뿐 기본에는 허술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 보여준 것이다. 세종 15년(1433)에 숭례문 밖에 군포(軍鋪)를 지어 순라군들을 상주시켰다. 복원하는 숭례문에는 연못도 만들고 군포도 지어 사람이라도 상주시켜야겠다. 현판이라도 건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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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해태
이성계는 천도한 뒤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리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남쪽에 숭례문(남대문)을 지었다.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어 숭례문 인근에 ‘남지’라는 연못을 팠다. 관악산보다 낮은 북악산 자락의 경복궁에 크고 작은 불이 계속 나자, 조정에서는 궁궐 남쪽 광화문 양 옆에 물기운을 몰아온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 석상 한 쌍을 세웠다. 이후 신기하게도 화재가 없어졌다고 한다.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지는 해태는 그 모양이 사자와 비슷하며, 몸에는 비늘이 있고 머리 가운데에 뿔이 달렸다. 해태 그림은 불을 억누르는 부적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하지만 화마의 위협을 지켜내던 남지는 도시개발로 사라진 지 오래다. 게다가 광화문 해태상도 지난해 6월 복원공사로 치워졌다. 풍수적으로 남지, 해태상이 모두 없어진 상태에서 숭례문이 홀로 불기운과 맞서다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해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의의 동물’ 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전설의 해태상을 많이 만들어 화기와 우환을 다스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건물의 용마루 끝을 ‘어처구니’로 마무리하는 것도 건물에 재앙이 닥치는 것을 막는다는 신앙이 깃들어 있다. 어처구니는 중국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등 10가지 인물을 형상화한 잡상이다. 하늘에 떠도는 잡귀와 살(煞)을 물리쳐 건물을 지킨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숭례문의 어처구니 잡상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국보 1호를 잿더미로 소실하기 전에 전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과학 시대에 살면서 풍수지리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대한민국의 자존심’ 숭례문을 지키지 못한 회한과 안타까움 때문에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떠도는 것 같다. 박병헌 논설위원 박병헌 논설위원 ⓒ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세계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
불 막는 방패로 세웠는데 … 불로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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