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조각

신윤복의 춘화도를 읽는 방법 - 예인 에로티시즘을 만나다.

金 敬 峯 2009. 1. 31. 09:56

 

<바람의 화원>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 <미인도>가 인기더군요. 라디오 방송에서 신윤복을 남장여성이라 규정한 현상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사실 비판이라기 보다는 충실하게 조선회화사의 내용을 녹여낸> 소설 <신윤복>을 소개했습니다.

 

미인도의 실제 주인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고, 같은 예인의 길을 가면서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보여준 애정의 방식에 대해, 역사적인 관점을 잘 배치해놓은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삶의 정한을 드러내는 일과, 관념의 유희에 빠진 조선 후기 남종화에 대한 비판, 에로스를 끌어내고,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그림을 그린 사실을 배울 수 있었지요. 어느 시대나 당대를 대표하는 '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색채일수도 있고 인간의 욕망일수도 있으며, 꼭꼭 숨겨놓은 에로티시즘의 표출방식일수도 있습니다. 그 색을 토하지 못하는 시대는 병든 시대란 것을 신윤복은 그림을 통해, 그 인생을 통해 보여준 예인일 뿐입니다.

 

스승 표암 강세황으로 대표되는 남종화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면 왜 신윤복이 당대에 그렇게도 천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는지는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남종화에 대한 비판이 섞이다 보니 무조건 남종화가 나쁘다라고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국 남종화는 서양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과정예술, 개념미술과 상당이 수렴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로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생각한 것이니까요.

 

 

신윤복의 <기다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물론 강세황은 이 그림을 보고도 분노합니다.

나무의 형태가 여자의 생식기를 닮았다는 이유였습니다.

먹의 농담으로 표현한 읍습하고 부드러운 여인의 속살을 묘사했지요.

게다가 여인의 트레머리 위로 보이는 기왓장의 형태를 보세요.

남자의 성기를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강세황의 분노를 삽니다.

 

더 재미있는 건 여인이 들고 있는 것은 법복입니다.

스님의 바지 중의란 것이죠. 왜 하필이면 스님이 입는 옷을 들고 기다릴까요

 

 

이 그림의 제목은 <이부탐춘>입니다. 두 여인이 봄을 탐한다라.....무슨 뜻일까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성욕도 동할 때가 되었지요. 여인의 치마 밑으로 솟아오른 나무는

마치 남자의 성기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음탕하기 그지없다며 강세황이 한번에

불태워버리려 했던 작품이라지요. 더 재미있는 건 교미하고 있는 두 마리의 개를 바라보는

여인내의 시선입니다. 남편이 상중인지 상복을 입고 있는 여인과 그녀의 몸종은

개들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신윤복은 관음적 상상력을 그림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에로스는 생명이건만, 그 건강한 개념을 항상 천시하던 사회에선

진정한 색이 힘이 움직이기란 쉽지 않았을 터입니다. 홍도는 윤복의 재능을 부러워했습니다.

과감한 채색을 도입해, 밝은 그림을 그린 것도, 스승 김홍도는 인정해 주었지요.

윤복은 강세황을 가리켜 관념의 유희꾼이라고 비난합니다.

 

 

정사를 끝내고 헤어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그리는 것이 왜 속된 것이냐며

따져 묻지요. 있는 자들의 위선적인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억압과 시름에 겨운

저잣 거리의 삶을 드러내는 것을 속하다고 주장하는 스승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맙니다.

이 토론을 자세히 들어보면 결국 세계를 움직이는 두개의 큰 힘,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대결이라고 할수 있을 듯 합니다.

 

 

왼쪽에 보시는 그림은 최북이 그린 <풍설야귀인도>입니다. 윤복은 최북과 함께 유랑생활을 하면서 그림의 세계를 배웁니다. 바람과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오는 인간의 그림. 마지막으로 남겨준 스승의 그림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복을 떠올립니다.

 

최북은 중인출신의 화가입니다. 어릴때부터 의붓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으면서 자라 버려졌던 화가. 사실 제게 소설을 쓸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가장 재조명 하고 싶은 작가는 바로 이 최북입니다.

 

시대에 대한 분노, 개인의 상처, 트라우마는 평생동안 최북의 컴플렉스로 남았지만, 그의 그림은 윤복이 그림을 통해 세상을 볼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합니다.

 

김홍도조차도 최북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해, 이를 배워 오라고 윤복을 그에게 보냈으니까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속내를 그릴 수 있는 그림만큼은 남에게 빼았겨서는 안된다고 그는 행동을 통해, 삶을 통해 윤복에게 가르칩니다.

 

권세있는자에게 불려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붓으로 눈을 직어 실명을 시켜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도전정신과 시대에 대한 항거는 예인에 대한 자긍심과 더불어 기존의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예인, 윤복을 빚어내는 데 큰 힘을 발휘하지요.

 

윤복과의 마지막 날, 최북은 술이 모자라다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개골창에 필통을 박고 얼어 죽었습니다.

 

 

신윤복에게는 어린시절 사랑했던 여인이 기방에 팔려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더욱 끓어오르는 정념이 있었을 거고, 그 마음이 투영된 역사적 소설의 내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관념적인 그림을 그리던 시절, 왜 사람들은 청록색과 원색을 배척했는지, 그러한 심리의 배후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 이런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신윤복은 화원을 나간 후 춘화도를 그리지만, 자신의 낙관만 찍고 서명은 하지 않습니다.

 

김홍도는 신윤복을 아꼈습니다. 표암 강세황이 윤복을 제자로 그에게 맡겼던 것도, 신윤복이 홍도의 그림을 자주 모사했기 때문이지요. 그림은 일종의 거울과 같아서 서로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 정신의 형상도 닮아갑니다.

 

신윤복의 성 정체성을 가지고 상상력을 갖는 일 이해할 만 합니다. 하지만 그는 남자가 분명하고, 그렇게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사실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할까 싶네요. 중요한 것은 윤복은 예인이었다는 겁니다. 예인의 길을 가기 위해 어떤 성장통을 앓았고, 사형들과 어떤 갈등을 빚어야 했고,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봐야 했는지,

 

그걸 조건지었던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적 모습은 어떤 것이었는지, 이런걸 더 살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래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를 한번 보세요. 아셔야 할 것은 표암 강세황이 마냥 풍속도를 그리는 것을 비난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항상 풍속과 인물을 그리는 것은 역사나 신을 그리는 화가들에 비해, 그 대접이 일천했습니다. 지고선의 가치를 역사와 신화에 두었던 시대였으니 그렇지요.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가 화원의 제자들에게 '그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자칭 화원생도장이란 자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주상전하의 은공이 흘러넘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표현하느 것'이고 했잖아요. 가장 정치적인 그림을 그린 자들의 담론입니다. 서양미술에선 주로 프랑스 혁명이후 다비드와 같은 화가들이 이런 철학을 가지고 그렸어요.

 

왼편에는 김홍도가 그린 <주막>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입니다. 김홍도의 그림을 보시면 그림 속에 잘 그어놓은 선이 보입니다. 외곽선이 있어서 대상을 깊이와 무게감을 갖고서 표현했음을 보여주지요.

 

국물 한 방울이라도 더 떠먹으려고 수저를 놀려 그릇을 싹싹 비우는 행인의 모습과, 음식을 담는 주모와, 그 사이에 끼어서 뭔가 하나 얻어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눈치를 보는 초동, 꼬마 아이의 시선, 담뱃대를 물고 젖을 내놓은 채 일손을 돕는 늙은이의 모습도 보입니다. 전형적인 우리 조선의 주막 풍경입니다.

 

여기에 비해 윤복의 그림 속에 나타난 것은 일단 주막이 아니라 기방집입니다. 지금말로 하면 포장마차가 아닌 단란 주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뭐 이렇게 표현하는게 그리 틀릴까 싶네요. 윤복의 그림 속 술집은 매우 화려합니다.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의 모습도 그렇고요. 기와 지붕의 골과 그 사이에 피어나는 꽃도 곱습니다.

 

조선시대 붉은 옷의 사람이나 관복을 입은 자는 낮은 벼슬아치였습니다. 즉 중인의 신분을 가진 자라는 것이죠. 하급관리이기에 원칙적으로 큰 갓을 쓴 양반들과 어울여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림 속 모습을 보니 함께 술을 마시며 잘 놀고 있습니다. 당시의 신분질서들이 헤이해지고 하나씩 무너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그림이지요.

 

표암 강세황은 이런 식의 시선을 죽어라 미워했다지요. 그도 그럴것이 왕의 어진을 그린 화가아닙니까. 왕의 은공과 후광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게끔 그림으로 세상을 재현하고 철학을 만들어가는 것이 예인의 길이라 배운 그에게 윤복의 그림은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씁쓸한 현실의 뒷맛을 주는 그림이었던 겁니다.

 

물론 윤복의 비판정신 자체를 비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표암은 김홍도처럼 더욱 그가 깊어지길 바랬다고 합니다. 성숙한 비판을 할수 있는 예인의 수준까지 이를때까지 기다렸다고 말이죠. 그런데 윤복은 여기서 바로 일탈해 버립니다. 음습하고 속된 그림으로 치부되고 만 것이죠. 그러나 자세히보면 지배자나 피지배층, 어디에도 성욕은 평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 위해, 성에 대해 폄하하는 시선과 철학을 만들고, 자신의 신체를 감춥니다.

 

 

신윤복에 대한 재구성, 혹은 재발견. 좋습니다. 저로서는 항상 비 인기종목에 있는 우리내 역사와 미학, 미술이 대중문화의 코드를 빌려 조금이라도 인기를 얻는일이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열풍만 있고, 껍데기만 있어서는 곤란하겠지요. 저는 그림 한장을 읽는데 짧게는 한달,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람의 화원이 특유의 미스테리한 느낌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도 충분한 자료 조사로 그림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발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와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우선 복식의 유사성도 많고요. 성에 대한 이중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까지 너무나도 똑같습니다. 어느 시대나,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삶의 진실이 그곳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인의 쓰개치마, 장옷 하나에도, 시대의 섹슈얼리티가 녹아납니다. 그림 한장에 배어난 달빛의 각도와 그 강도가, 그 형태가, 왜 시대 속 사람들의 삶은 이래야만 했는가를 말해줄 수 있기에, 지금 남아있는 그림 한장의 가치가 귀한 것입니다. 왼편에 보시는 월하정인을 가리켜, 표암 강세황이 가뜩이나 눈에 가시였던 신윤복에게 왜 초생달을 거꾸로 그렸는냐고 물었답니다. 윤복이 답합니다. 초생달이 아니라 보름달이 구름에 가린 것이라고요.

왜 구름에 가린 정염을 표현해야 했을까요. 그만큼 그림 속 사랑의 관계가 당대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거나, 은닉해야 했던 것이기에 그럴 것이라고요. 유추해 봅니다.

 

저로서는 신윤복의 그림이 많지 않은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세필로 자세하게 그린 그림이 없다보니, 그가 자세하게 묘사한 당대의 복식들은 한국 복식사를 고증하는데 큰 도움을 주거든요. 저로서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아쉽습니다.

 

                                       

출처 :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  |  글쓴이 : 김홍기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