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쓴 동시 한 편을 읽어보자. 어느 어린이 글짓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시를 쓴 아이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동시를 보면 화가 난다. 한숨이 절로 쏟아진다. 이 동시를 쓴 아이 때문이 아니다. 이런 동시를 쓰게 하고, 심사를 해서 상을 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는 어른들이 한심해서다. 좀 더 과하게 말한다면 이 작품은 동시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커다란 황금물감 푹 찍어
가을들판에 가만가만 뿌려놓았다
탱글탱글 누우런 벼이삭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어오면
빠알간 고추잠자리
두둥실두둥실 흥겨운 춤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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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형용사의 과도한 사용은 시의 바탕이라 할 은유와 상징이 설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미지가 들어앉을 자리를 형용사가 차지하고 있으면 그 시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내용이 없고, 그 뜻은 쉽게 드러나지만 깊이가 없어 천박해진다. 사물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게으른 시인일수록 형용사를 애용한다. 그가 제시한 형용사를 따라다니다 보면 독자는 상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문장에서 형용사는 뒤에 오는 말(명사)을 치장하는 역할을 한다. 쓸데없는 치장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특히 형용사 중에 색채를 표현하는 ‘빨갛다·파랗다·노랗다·하얗다’와 같은 감각형용사는 아예 잊어버려라.
조지훈이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민들레꽃> 앞부분)라고 했더라도, 서정주가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국화 옆에서> 부분)라고 했더라도 당신은 ‘노오란’이라는 말이 아예 한국어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우리는 그동안 ‘노오란’을 시에 너무 많이 동원했고, 혹사시켰다. 제발 ‘노오란 개나리’ ‘빨간 장미’ ‘빠알간 고추잠자리’ ‘파란 바다’ ‘파아란 가을하늘’ ‘검은 밤’ ‘하얀 백지’ ‘하아얀 눈송이’라고 쓰지 마라. 그 색채 형용사들을 쉬게 하라. 색채 형용사들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동사의 역동성으로 채워 시를 살아 꿈틀거리게 하라. 기어가게 하라. 뛰어가게 하라. 날아가게 하라.
형용사가 사물의 성질, 감각, 색깔, 시간, 수량 등 정지 상태를 표현하는 데 반해서 동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어휘다. 동사가 움직이는 선이라면 형용사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동사는 경험과 실질의 세계다. 동사는 감각의 세계다. 동사는 우리가 사는 얘기다. 자고, 먹고, 누고, 낳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하는 게 다 동사로 표현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동사가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잘 자, 많이 먹어, 이리 와, 빨리 가, 울지 마, 웃어 봐, 때리지 마, 안아 줘….”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한겨레, 2007. 12. 16.) 그러니 당신은 가능하면 형용사를 미워하고 동사를 사랑하라.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어의 언어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은 조사의 종류가 많고 어미의 변화가 매우 다양한 언어다. 당신은 반드시 조사와 어미의 변화에 주목하라. “명사나 동사, 형용사만을 중시하지 말아라. 한 편의 시에서는 토씨도 명사나 동사 이상으로 율조에 큰 역할을 하며 울림에 크게 기여한다.”(최하림, <멀리 보이는 마을>, 작가) 토씨, 즉 조사 하나가 시의 어조와 호흡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문장을 맺는 어미를 종결어미라고 한다. 우리말은 종결어미를 통해서 시제, 경어법, 화자의 태도, 시의 리듬에 적지 않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란 어미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종결어미는 ‘-ㄴ다, -ㅂ니다, -오’의 평서형, ‘-(느)냐, -니, -는가, -ㄹ까’의 의문형, ‘-구나, -군, -네’의 감탄형, ‘-어라/-아라, -게, -오’의 명령형, ‘-자, -세, -ㅂ시다’의 청유형으로 크게 나눈다. 이는 다시 ‘해라체·하게체·하오체·합쇼체’로 나눠지면서 경어법을 구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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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상대화에서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같다’가 시를 점령할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종결어미 하나가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다 짊어지고 갈 수도 있는 법이니까. 정말, 그럴 것도 같다.
─━☆비평가와네티즌이 선정한 한국베스트명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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