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을

배려 / 채린

金 敬 峯 2009. 5. 6. 16:19

 

 

 

         배려

 

               / 채린

 

빚은 모습 그대로 읽는 내 눈

탁류 한소쿠리 보듬는 내 마음

어긋나고 삐뚤지라도

사랑사랑 모두 퍼담는다

노을 고운 저녁

물빛 맑은 강가에 서면

용해되어 사르르 은파로 피어난다

말간 물빛에 물이 든다

배꽃보다 더 새한

청리(靑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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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홍규의 또 다른 배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현관 앞이 난장판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그릇을 내놓았는데 수거해 가지 않았던 거다. 동네를 주름잡는 길고양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빈그릇을 대충 가리고 있던 신문지는 발기발기 찢어 저만치 흩뿌려놓았고 배 채울 게 별무였다고 판단했는지 그릇을 뒤집어 놓는 심술까지 부렸다. 벌건 국물이 흐르다 굳은 자국 위에 노란 단무지 한 쪽이 고명처럼 얹혀 있었다.

 

 방만한 사생활을 남에게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 며칠 바쁜 티를 낸다고 아무렇게나 그릇을 내놓았는데 여축없이 고양이들의 훈계를 받은 셈이다. 나 역시 소 팔아 대학 다니던 녀석이었다. 방학이면 용돈벌이라도 할 요량으로 이일저일 기웃겨렸느데 그 중 식당 배달일이 손쉽고 든든했다. 하도 배가 고파 이쑤시개마저 빨아먹던 시절이었으니 배달 전후로 밥을 먹여줘 하루 두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만사형통인 적은 없다. 승강기가 운행을 멈추기라도 하면 십수층을 헐떡이며 계단으로 다녔고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겹쳐 올린 쟁반을 뒤집어엎어 8인분의 음식을 길바닥에 쏟아버린 적도 있다. 빈 그릇 수거도 만만치 않았다. 삐끗하면 머리통이나 어깨에 음식 찌꺼기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어찔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럴 때 누군가가 깨끗이 설거지까지 해서 내놓은 빈 그릇을 볼 때의 기분이란! 배려받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보다 나은 피로회복제가 없을 듯했다.

 

 그때의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 뒤 음식을 시켜서 먹으면 깨끗이 설거지해서 내놓았다. 부디 음식배달이 고달픈 일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그걸 까먹었다고 동네 고양이들이 한바탕 휘저은 것이겠지. 미안하다 얘들아. 너희 먹을 걸 남겨주지 못해서. 깨끗하게 닦은 빈 그릇에 마음마저 비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 얄미운 녀석들아.

 

 - 손홍규 (소설가)   

출처 : 시베리아의 블로그  |  글쓴이 : 시베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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