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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기원

金 敬 峯 2007. 8. 7. 21:04
 * 바둑의 기원

바둑의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다만 고대 중국에서 창시(요순(堯舜)창시설; [박물지(博物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 바둑을 말하는 사람은 전세계에 수천만

명이나 있지만 바둑이 어느 때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둑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여 그 사실(史實)을 적은 문헌은 극히 희소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이미 3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바둑이 지금은 구미 각국으로까지 널리 보급되어

바야흐로 바둑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 발전하고 있다.

중국 역시 단편적인 고기서(古棋書)는 많이 있으나 역대의 사실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서지(書誌)는 극히 드물다. 바둑에 관한 중국의 역대의 사실을 발췌, 수록한 '역조혁사집략

(歷朝奕事輯略)'이나 일본의 사실을 모아적은 '좌은담총 (坐隱談叢)' 정도가 있을 뿐이고

일찍부터 선기국(善棋國)으로 알려져 왔던 우리 나라의 바둑 사실(史實)은 겨우 몇 줄씩

기록된 단편적인 것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니 한중일 3국의 바둑역사를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집대성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일는지 요원하기만 하다.


요순(堯舜)창시설

바둑은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 확실하나 언제 누가 어디서 창안하였는지에 대하여는 탐구의 단서조차 알아내기가 어렵다. 종래의 위기사(圍棋史)는 대부분 그 기원을 고래의 전설에 의존하고 있다. 그 전설조차도 널리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발생 근거가 불확실하다. 기원 전설은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고기서에는 여러 군데 기재되어 있다.

바둑의 발생에 관하여 흥미있는 점은 중국 고대왕조의 창세기 신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
다. 중국 진대(晋代:서기 265∼420)의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 '요조위기단주선지(堯造圍碁丹朱善之)'라고 적혀 있다. 또한 '중흥서(中興書)'에는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원문이 있다. 우자(愚子)라 함은 요제(堯帝)의 아들 단주(丹朱)와 순제(舜帝)의 아들상균(商均)을 가리킨다. 요순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성제이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불초로서 제위(帝位)를 계승시키기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신하 중에서 동서남북 사제후(四諸侯)의 장(長)인 사악(四嶽)이 천거하였던 착하고 덕이 높은 순을 만나게 되었다. 요제는 자기의 두 왕녀를 순에게 시집보내서 두 부인을 어떻게 감화시키며 살아가는가를 관찰하면서 삼 년간 순의 행적과 인품을 주시하였다. 순이야말로 성인군자이고 제왕위(帝王位)를 물려주기에 흡족한 인물로 마음을 굳히고 양위의 뜻을 굳혔다. 처음에 간곡히 사양하던 순은 요제가 죽은 뒤 왕자 단주를 굳이 내세웠으나 제후들의 소망을 물리치지 못하고 천명으로 받아들여 61세 되던 해에 천자(天子)에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은 '사기'에 기술된 내용이다. 기원전 91년 한무제 대에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였는데 그 내용 중 몇 군데에 바둑에 관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으나 요순이 바둑을 창제하였다는 전설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사물의 기원에 관해서 요순성제와 결부시키는 일이 흔히 있는데 한 대의 문헌에는 바둑의 기원 전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요순에 의한 바둑 창시 전설은 그 후에도 좀 더 각색되었다.

오청원 기성의 수필에 기술된 내용이 재미있어 그 일부를 소개한다. 요제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오랜 치세를 누렸지만 만년에 깨달음이 있어 성현을 찾아 제위를 물려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인(仙人) 포이(蒲伊)를 만나 상의한 뒤에 방침을 정할 생각으로 깊은 산중에 살던 포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포이에게 제왕의 자리를 양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이를 완곡히 거절하고 후미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순을 암시적으로 지목하면서 두 딸을 함께 순에게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주도록 권하였다. 아울러 요제의 아들 단주의 신상에 대하여도 걱정하면서 그의 성품에 적합한 혁평(奕枰), 즉 바둑을 가르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요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선인 포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물의 수는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반면에는 361로의 눈이 있고 일이라는 수의 근원은 천원으로부터 시발하여 사방을 제한다. 360이라는 수는 하늘이 일회전하는 일수를 표현하며 네 귀로 나누어지는 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의미한다. 외주의 합계가 72로인 것은 1년을 72절후로 구분하는 것과 같으며 360개의 기석이 흑백 반반인 것은 음과 양을 표시하는 것이다. 기반의 선을 평이라 하고 선과 선 사이를 괘라고 한다. 바둑판은 네모지고 정적이지만 바둑돌은 원형으로 동적이다. 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바둑이 두어졌지만 동일한 국면의 바둑은 한 판도 재현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일일신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선인 포이에게서 요제가 바둑을 배우게 되었고 이를 단주에게 전수하였던 것이 이 세상에 바둑이 보급되게 된 시초였다고 하는데 선인이 좀 더 부연하기를 바둑은 발흥존망(發興存亡)의 기예(技藝)이므로 단주의 성품 기질로 보아 바둑에 몰두한다면 차츰 바둑 두는 데 흥미를 붙여 세상에서 만용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하여 부정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고전 중에 '현현기경(玄玄 經)'이라는 기서가 있다. '현현기경'은 중국 원대의 순제 9년(1349년)에 안천장(晏天章)과 엄덕보(嚴德甫) 두 사람이 공동편저한 기서인데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昔者堯舜造棋以敎其子 或子 疑之以爲 丹朱商均之愚 聖人宜敎之以仁義禮智之道
豈爲倣閑之具 變허 之術 以益其愚哉.'

이 원문을 알기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그 옛날 중국 고대의 황제 요순은 바둑을 창안하여 그 아들에게 이를 가르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의문을 품고 요제의 아들 단주와 순제의 아들 상균이 둘 다 어리석은 자였다고 듣고있는데 모름지기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요순 임금이 아들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리를 가르쳤어야 옳은 일이지 어찌하여 파한지도구(破閑之道具)를 만들어 가르침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더조장하였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부정의 논리를 기술하였다. 그러면서 '현현기경'의 편자는 바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둑이라는 것은 그 형상으로 보아 하늘은 둥글고(天圓) 땅은 네모진 모양(地方)과 흡사하게 만들어졌고 흑백의 다툼에는 천지음양동정(天地陰陽動靜)의 도리가 작용한다. 바둑을 두어 가는 "반면의 위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질서정연함이 있고 국면의 추이는 풍운의 변화와 같은 기운을 함축하고 있다. 살아 있던 바둑돌이 죽는 수도 있고 전 국면을 통하여 변화해 가는 흐름의 양상이 마치 산하의 표리지세(表裡之勢)를 나타내는 조화와 같으니 인간세의 도리나 부침이 하나같이 바둑의 이치와 같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본래 바둑의 기원이 신화적 불가사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비스럽기도 하지만 '현현기경'의 기록 내용과 같이 기리 기법의 심오함이 극진하기 때문에 더욱 유현(幽玄)의 경지를 만끽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청원 기성의 견해

일본인으로서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가 1953년 기성과 사흘동안 침식을 같이하면서 바둑에 관한 대담을 통하여 오청원 기성의 바둑 철학과 견해를 탐색한 다음에 '오청원 기담'을 저술했었다. 당대 굴지의 문학가와 기성과의 만남이기에 위기문화(圍棋文化)의 진수를 탐구했던 내용이 구구절절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오청원 기성의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의 견해로는 바둑의 구성이 당초에는 천문학을 연구하는도구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요 임금이 아들 단주에게 일종의 놀이의 도구가 아니라 천문을 연구하는 도구로써 바둑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바둑을 공부하여 역(易)이나 제례에 관한 교양을 터득하라는 뜻에서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청원 기성의 상상으로는 바둑을 요임금이 창제하기 전에 이미 천문이나 역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바둑을 한자로 기(碁) 또는 혁(奕)이라고 쓰는데 혁(奕)·역(易)·의(醫)는 중국발음으로 '이'라고
읽으며 력(曆)은 '리'라고 발음하니 비슷하게 닮았다는 것이다. 먼 옛날 중국의 통치개념이 제정일치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역이나 천문이나 천명, 즉 신의 명령이나 암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둑판을 가지고 천문을 살피고 역을 따졌을 것이라고 보고 요임금이 단주에게 바둑을 가르쳤다는 것도 제정(祭政) 중에서 제(祭) 쪽을 맡아 일하도록 했을것이라는 견해가 오청원 기성의 상상인 것이다. 전설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바둑은 오랜 옛날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堯) 임금이 우둔한 아들 단주(丹朱)를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
'순(舜)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

위의 두가지 설이 있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 확실한 사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바둑이 중국에서 발상(發祥)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유럽이나 미주(美洲)에까지 바둑이 많이 보급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내의 바둑사학자들 중에는 바둑의 '중국 기원설(起源說)'에 대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아 새로이 관심을 끌고있습니다. 그들의해와 주장은이렇습니다.

"바둑이 중국에서 발상했다는 것은, 지역적으로 한반도 이북의 땅이면
무조건 중국이라고 여기는 데서 비롯된 오류로 보인다. 바둑이 요순(堯舜)시대에 생겼다 는 것을 사실로 받아 들이고 생각해 보자.
그때에 무슨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가. 그 시절 한반도 이북, 오늘날 만주로 불리는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나라를 세운 것은 훨씬 후의 일이 아닌가.

그 사람들은 이른바 '동이족(東夷族)'이었고 그들은 후에 고구려를 세웠고 우리 민족의 원류가 되었다. 따라서 바둑은 '지역적 산물'이 아니라 '종족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보더라도 한반도 이북의 만주 지역은 우리의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땅이었다. 그렇다고 바둑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우리가 강조하는 바는, 바둑은 그저 '동이족'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사실에 접근하는 태도일 것이라는 점이다."

듣고 보면 일리 있는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바둑은 우리 민족의 산물이라는 것이 정설로 확인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이것은 결코 쇼비니즘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적 유산을 혹시라도 남에게 빼앗긴 채로 방치한다면 그것은 후손 된 도리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언제부터 두었는지는 정확히 언제라고 말할 수가 없지만 삼국시대에 바둑이 성행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같은 고전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백제가 서기 350년 무렵 일본에 바둑을 전파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일본은 바둑을 크게 발전시켜, 발상지인 중국이나 그들에게 바둑을 가르쳐 준 우 리보다 월등한 바둑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우리나라도 조남철 선생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일본의 현대식 바둑을 도입, 보급하고 연구한 결과 이제 프로 정상급에서는 한국 바둑이 오히려 일본을 앞서는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중국 또한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육성하여 뒤늦게나마 한국, 일본에 대항할만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 세계의 바둑인구는, 우리나라가 8백만명, 중국이나 일본은 1천만명을 헤아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구미(歐美)에서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있습니다.

바둑이 처음부터 요즘처럼 19줄로 된 바둑판을 사용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으며, 처음에는 9줄 정도에서 13줄, 17줄, 19줄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둑이 발전함에 따라 자체의 무궁무진한 원리가 개발되면서 오늘날의 19줄판으로 정착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최근 컴퓨터가 바둑의 원리를 체득하여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지만, 19줄 바둑판의 모든 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일 것으로 여겨지고있습니다. 또한 만일 컴퓨터가 현재의 바둑을 극복하는 날에는 바둑판을 19 줄에서 21줄이나 그보다 더 많은 줄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어 컴퓨터의 바둑 수 정복은 요원한 얘기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컴퓨터를 이용 바둑자료를 저장, 또는 바둑정보를 신속하게 찾아보거나 통신대국도 가능한 세상이 도래하였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출처 : 블로그 > 스위스쮜리히대학원 -베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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