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등산

정감록의 10 승지

金 敬 峯 2008. 1. 10. 08:04
 

 

◈십승지(十勝地)◈

 

 

● 영주시 풍기 금계동●

십승지 첫째로 꼽히는풍기읍. 소백산의 우람한 산들이 풍기를 품에 안고 있다. 왼쪽 위가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 오른쪽 끝봉이 금계동으로 내려가는 갈미봉아래는 암수 두마리 닭이 사랑하는 모습의  금계바위.

 

풍기사람들은 풍기를 '작은 서울' 이라고 한다. 토박이보다 전국 각처에서 비결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토산품인 인삼과 직조물은 외지인들에 의해 지금까지 명성을 얻고 있다.

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 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았다. 남사고의 십승지론에도 피란지로서는 소백산이 으뜸이라고 했다. 비결파들은 금계동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의 원칙에는 수긍한다.

첫째는 돌이, 둘째는 바람이 없어야 한다. 셋째는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모두 죽령과 관계있는 조건들이다. 서울과 통하는 영남대로의 죽령을 옆에 끼고 있는 풍기는 자연히 바람이 세고 개천 (남원천)에는 돌이 많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령이 보인다면 곧 큰길과 인접해 있다는 뜻이다.

이 세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현재 금계동으로 불리는 임실 (任實) 지역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 는 금계포란형에서 비롯됐다.

임실은 임신 (妊娠) 과 통한다. 그런 점에서 더욱 임실이 유력한 십승지로 꼽힌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지역에는 닭의 벼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2개 있다. 암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다. 이 봉우리는 욱금동과 금계동의 경계가 되고 있다.

소백산 비로봉 아래 비로사의 석조 아미타불 좌상. 통일신라 말기 작품. 습기 방지를 위해 금칠을 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의 동네가 금계촌이라고 다툰다. 일반적으로 십승지라면 전란과 질병,가뭄이나 홍수, 굶주림의 피해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비로사의 성공스님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로사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불타버렸다" 고 했다.

지난 60, 70년대 풍기는 영풍군 (현재 영주시)에서 가장 부유한 읍면이었다. 인삼과 직조업의 번성으로 군의 재정을 풍기가 맡았다. 그러나 이젠 영주시가 더 커졌다.

풍기는 영주시의 배후에 있는 전원도시로 변했다. 중앙고속국도가 개통되여 죽령마저 힘을 쓸 수 없어 풍기는 세상에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아 십승지 제1의 영예는 전설 속으로 묻히고 있다

 

 

● 무주군 무풍면 ●

 

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 (茂朱) 구천동은 오지 의 대명사다. 세상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구천동에서 왔나" 라고 할 정도로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무주다.

무주 구천동에 인접한 무풍면은 봉황(중앙의 산)이 날개를 펴고 마을에 내려오는 형국이다. 들이 넓고 산세가 좋아 걸출한 인물도 기약한다.


97년 동계유니버사드 대회가 열려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보다 앞서 지난 75년 덕유산 일대가 국립공원이 되면서 무주 또한 이름난 휴양지로 바뀌었다.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군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 (茂豊面) 을 십승지로 꼽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구천동의 빠른 변화를 예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풍면으로 가려면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나제통문 (羅濟通門) 을 통과해야 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대에 설치된 관문을 뜻한다.

무주읍에서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뚫렸다. 자칫 그 이름으로 인해 고대에 개설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지만, 통문의 역사는 80여 년밖에 안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10리 계곡을 만나고 광할한 토지위에 대덕산 (大德山) 을 가운데 두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과 동쪽에서 오는 무풍천이 만나는 사이가 들판이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고 너른 들판은 한눈에 이곳의 인심을 대변해 준다. "살기 좋으니 인심이 온후하고 예부터 학문을 숭상해 예절 또한 군내에서는 으뜸이라고 한다

 

무풍면으로 들어가는 30번 국도의 나제통문. 터널 위의 산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한때 만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지금은 3천명이 채 안된다고 한다. 들이 넓어 쌀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주로 담배와 고랭지 채소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무풍면의 중심은 옛 무풍현의 관청이 있던 현리다. 이곳은 삼도봉에서 뻗어온 삿갓봉이 마을의 주산이다. 앞산인 무봉산 (舞鳳山) 은 무풍 (茂豊 혹은 舞豊) 이란 현 이름을 만들어준 산이다.

현리 새터에서 무봉산을 바라보면 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한 마리 큰 새가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형세를 볼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무봉산을 낳은 산이 대덕산이다. 대덕산의 청룡 줄기가 무봉산을 낳고 백호 줄기가 시루봉을 만들었다. 그 사이가 증산리 석항동네다. 이곳에서 황인성 전총리와 김광수 자민련부총재가 태어났다. .

무풍은 단순한 피란지로서 십승지가 아니다. '삼풍에서 인재를 구하라' 고 했듯이 인물의 고장이다. 또 이곳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서부 경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다. 그런 까닭에 여느 곳과 달리 비결파들이 즐겨 찾아 들지는 않았다. 
 

● 邊山호암(壺岩:병바위) ●

 

변산(邊山) 으로 가는 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산악의 나라 한반도에 이렇게 넒은 평야가 있었는가,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 의 첫 무대가 이곳 백산에서 펼쳐지는 이유를 반추하게 된다.


곡창지대와 혁명의 요람, 김제.만경평야의 서쪽 끝이 변산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산맥의 한 줄기가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 쑥 들어갔다. 서쪽.남쪽.북쪽은 모두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수많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굴바위로 불리는 변산 호암. 굴 입구의 모습이 호리병을 닮았다.

 

" 자칫 배수진을 처야 할 외통수의 땅이지만 비결은 이런 "변산의 호암 (壺岩 = 병바위) 아래" 가 십승지라 했다. '남사고비결' 은 여기에다 단서조항을 넣고 있다. " 변산에서 호암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발음만 듣고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은 보안 (保安) 면 호암 (虎岩) 리 이지만 호랑이와 호리병은 거리가 너무 멀다.

그래서 바위부터 찾는다. 우금산성에 있는 우금바위 동남편이 개암사 계곡이다. 이곳은 너무 좁고 동쪽 김제평야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군부대의 초소로 제격이다. 우금산성 북쪽,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으면 쇠뿔바위을 만나게 된다.

변산에서 가장 높다는 의상봉을 왼쪽에 끼고 있는 쇠뿔바위, 청림리의 주산 (主山) 이다. 심상치 않다. 당연히 우공 (牛公) 이 먹을 식량 (잡초더미) 이 있어야 한다. 남쪽에 자그마한 노적봉이 있고 동리 이름도 노적이다.

부안 고을에서 첫 손꼽는 마을이 노적 이라고 한다. 진사 급제자가 가장 많았고 유명 부자는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뒷말은 이곳이 십승지가 아님을 전한다. "6.25때 수복이 가장 늦었고 궁궐같은 기와집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굴바위' 를 끼고 있는 보안면 우동 (牛洞) 리다.

이곳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성계골과 실학의 문을 연 반계 유형원이 경국 (經國) 의 꿈을 펼치던 곳. 이 마을 북쪽에 옥녀봉이 있고 그 줄기 끝이 굴바위다.

 

우동제방에서 바라보면 굴바위 입구의 모양이 영낙없는 호리병 모양이다. 우동리는 전형적인 삼태기형 지형이다. 앞이 터진 것 같으나 천마산이 막고 있다. 가히 욕심없이 살 수 있는 전원이다.

● 보령시 남포 ●

 

지난 79년 충남 대천 출신 작가 이문구는 '관촌수필' 을 통해 고향의 변화를 리얼하게 그려낸 바 있다. 서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인 대천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한 해안을 연상케 할만큼 변모했다. .

남포읍성은 서해안 요충지였다. 사진은 관아 정문인 진서문.


보령군 (保寧郡) 대천읍에서 86년 대천시로, 다시 95년에는 보령군과 통합하여 보령시로 이름까지 바꿨다. 비결서는 보령시의 남포를 십승지로 꼽고 있다.

보령시에서 서천으로 이어지는 21번 국도변에 있는 남포면은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된다. 보령시와 뚜렷한 경계가 없고 다만 남쪽으로 웅천읍과 고개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이다.

 

서쪽은 바다다. 옛 남포현 시절에는 이곳에 성을 쌓아 서해안 방어진지로 이용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남포면을 피란지라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예부터 십승지라는 말은 하지만 외지인이 일부러 찾아온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남포라는 특정지역보다는 보령시 전체가 십승지의 하나라고도 한다. "고려조 이래 보령은 '만세보령 (萬世保寧)' 이라 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고 한다. "성주산에서 옥마산 (보령시와 남포면 동쪽에 있는 산)에 이르는 보령시의 산들이 모두 부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남포 성주산은 남쪽과 북쪽 두 산이 합해져서 큰 골이 됐다. 산중이 평탄하여 시내와 산이 맑고 깨끗하다. 산 밖에는 검은 옥이 나는데 벼루를 만들면 기이한 물건이 된다.

 

옛날 매월당 김시습이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곧 이 산이다. 시내와 계곡 사이에 또한 살 만한 곳이 많다" 고 했다. 십승지 남포는 오늘날 면소재지 쪽보다는 성주면 일대를 가리킨다.

 

성주사가 자리한 이곳은 비록 임진왜란이란 병화를 입었지만, 지금은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보령시의 관광.휴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름에 집착하면 본령을 보기 어렵다는 옛말을 남포가 일깨워 준다

● 서천군 비인면   

선비의 고장 비인을 지켜온 성북리 5층 석탑 (고려시대). 갓쓴 선비의 모습이다.


산골과 갯마을이 함께 있는 비인을 십승지로 꼽은 비결은 '남격암 산수십승보길지지' 다. 이 책은 "평평 울울이 가장 길하고 내포의 비인.남포가 다소 낫다" 고 했다.

여기서 '평평 울울' 은 동해안의 평해와 울진을 말한다. 이에 비교되는 서해안의 십승지가 비인과 남포라는 뜻이다. 그런데 비인이 십승지의 하나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향교 뒷산 월명산 주위를 공군비행기들이 쉴새없이 나른다. 비인의 원 이름은 비중 (比衆) 이다. 신라 경덕왕이 비인으로 고쳤으며 지명의 의미는'어진 것을 감싼다' 는 뜻으로 조선조에 들어 한성의 사대부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고 한다.

고려중엽 이후 서해안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고 조선조 세종 때 (1418) 는 비인 앞바다 마량진에 왜선 50척이 나타나 우리 병선을 불사르고 비인성까지 공격했다. 이 싸움 이후 평지에 있던 비인성은 현재의 위치인 산 위로 올라왔다.

그 뒤에도 비인은 전란이 비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 사대부들이 즐겨 낙향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택리지에서는"여러 읍과 이웃해 있고 뱃길이 편리하여 서울과 가깝기 때문" 이라는 것.

그런 점을 중시한다면 비인은 과거보다 미래를 위해 남겨진 땅이다. 한때 공단을 유치하려던 정부의 발상도 지역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비의 상징 인 (仁) 을 숭상하는 비인 사람들의 '양반기질' 이 이웃 한산면 (韓山面)에 뒤질리 있겠는가.

 

● 경기 가평 설악면 ●

 

울 근교에도 십승지가 있다. 청평댐에서부터 유명산 휴양림에 이르는 가평군 설악면 (雪岳面) 이다. 강원도 설악산과 같은 이름의 설악면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처음 붙였다.

설악면 소재지의 신성봉(左)은 서울의 북악을 쏙 빼닮았다.

 

본래 이곳은 고려말 미원현 (迷原縣) 으로 양평군에 속했었지만, 1942년 가평군으로 넘어왔으며 역사적 흔적은 미원초교 이름에 남아 있다. '정감록' 은 설악면을 소설촌 (小雪村) 의 승지로 꼽는다.

양평 북쪽 40리에 있는 소설촌은 미원으로부터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은 '가장 깊은 심심계곡' 이라 했다. 소설촌은 설곡리 (雪谷里) 라는 행정구역 안에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설곡리로 가려면 설악면 소재지를 지나는 37번 국도를 타고 유명산쪽 (양평 방향) 으로 가다 엄소리라는 동네를 거쳐 다시 양의 창자와 같은 굽이굽이를 지나야 설곡리를 만나게 된다.

북으로 북한강이 가로 막고 동.서.남에는 용문산의 큰 줄기가 에워싸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다. "6.25때 용문산 전투가 매우 심했지만 이 마을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고 한다.

설곡리는 여느 피란지와 달리 골의 폭이 매우 좁다. 또 소설이란 말이 상징하듯 겨울이면 설악산에 비견할 만큼 많은 눈이 내린다. 이곳은 집단적 거주지는 결코 아니다. 고려말 보우국사가 소설암을 짓고 몸소 경작을 했듯이 그런 장소로 적합한 곳이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소설보다는 이웃 묵안리 (墨安里)가 더 승지에 가깝다. 소설가 조세희씨의 고향인 묵안리는 동리 입구에 검은 바위가 빗장을 지르듯 가로막고 있다. 바위에는 '묵암동천삼청일월 (墨巖洞天三淸日月)' 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바로 속리산 우복동이 자랑하는 '동천' 이 바위 뒤에 숨어 있다.

묵안리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방일리 (訪逸里).가일리 (可逸里) 다. 유명산 휴양림으로 소문난 이곳은 오래 전에 오늘의 변화를 예고해 왔다. 두 동리 모두 '크게 숨는 곳' 이란 대일 (大逸)에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명에 숨어있는 선조들의 예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곳이 설악면이다.

● 단양군 단성면·적성면 ●

국여지승람' 은 충북 단양 (丹陽) 을 두고 '산과 물이 기이하고 아름답다' 고 한마디로 평했다. 산과 물, 계곡의 아름다움을 단양처럼 한곳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곳도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금수산의 품에 안겨 있는 적성면 품달촌

그래서 예부터 문인들이 즐겨 유람을 왔고 선비들의 휴식처가 됐다. 오늘날 역시 이곳은 월악산.소백산국립공원과 충주호로 연계되는 관광의 중심지다.

'정감록' 역시 단양을 십승지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단양 가차촌 (駕次村)' 을 피장처로 꼽았다. 그러나 다른 십승지와는 달리 같은 이름이나 비슷한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는다

향토연구가들은 대개 적성면 성곡리에 있는 가은산성 (可隱山城) 으로 추정한다. '여지도서' 와 '호서읍지' 에 '가차읍리' 의 기록에서 단양 (현재의 단성면 소재지) 관문으로부터 20리 서쪽에 '가차읍리 (加次邑里 또는 佳次邑里)' 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같은 지역에 장회천 제방이 있다고 하여 오늘날 단성면 장회리 일대가 바로 가차촌이라 할 수 있다.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봉과 옥순봉, 가은산성이 있는 이곳은 피란처라기보다는 명승지다.

이곳 사람들은 산천을 즐기고 환란시에는 가은산성으로 피란하지 않았나 싶다. '여지승람' 에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때 단양인은 물론 청풍과 제천 사람들까지 이 성에 피란했다고 전한다.

가차촌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데 반해 여전히 옛날의 지세와 이름을 유지하는 곳이 있다. 장회리에서 멀지 않은 적성면 품달촌 (品達村 : 상리와 현곡리 일대) 이 그곳이다.

해동 성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우탁 (禹倬 ; 1262~1342) 선생의 탄생지이기도 한 품달촌은 금수산 (錦繡山) 이 진산이다. 금수산 정상은 마치 한자 품 (品) 자처럼 생겼다.

이는 관작의 품계 (品階) 를 뜻하며 품달이란 말의 어원이 됐다. 우탁선생 이후 조선조 영조때 영의정을 역임한 유척기 역시 이곳 사람이다. 아직도 한 명의 큰 인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곳 출신 여인들은 친정에 와서 몸을 푸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 강원도 정선군 북면 ●


동해안에서 낙조를 바라보면 황홀감에 젖고 강원도 산마루에서 넘어가는 해를 보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때 "세월아 네월아 나달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알뜰한 이팔 청춘이 다 늙어를 간다" 는 정선아라리가 귓볼을 건드리면 애간장이 녹는다.

 

‘만세성도(萬歲聖都)’로 불리는 강원도 정선 땅은 승지 아닌 곳이 없다. 구절리로 자연학습 온 학생들이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굳이 '정감록' 을 들먹이지 않아도 강원도는 영동이나 영서 어디든 십승지가 아닌 곳이 없다. 강원도의 여러 산골 중에서 특히 정선은 '무릉도원' 으로 불렸다.

 

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산들이 고을마다 둘러싸고 있어 웬만한 장정이 고개만 지키면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하다. 이를 자랑하듯 북평면으로 넘어가는 반점고개에는 '만세성도 (萬歲聖都)' 라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정선에서도 정감록이 꼽는 십승지는 상원산(上元山) 동남쪽 일대로로 정선군 북면 여량리와 유천리, 구절리 (九切里) , 봉정리 (鳳亭里) 등으로 여량은 아우라지와 함께 널리 소개된 곳이다.

 

유천리는 구절리 입구 마을로  '흥터' 라고 부른다. 패가가 없는 부유한 동네다. 봉정리는 임계면으로 넘어가는 중간지대로 역(驛)이 있던 마을이다. 반륜산(半輪山:지지 않는 해)이 지키고 있어 아직 속세의 때가 묻지 않았다.

 

구절리는 노추산(魯鄒山)이 진산이다. 또 상원산이 안산으로 가마솥처럼 버티고 구절리의 지기가 누설되는 것을 막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예부터 노추산 아래 만인활거지지 (萬人活居之地)가 있다고 했는데 구절리가 그곳이다. 60년대부터 지난 92년까지 8개 석탄광업소에 근무하는 5천여명의 근로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앞에 있는 상원산은 그 정상에 오르면 운동장 크기의 몇 배나 되는 평지가 있다. 거기서 나는 산나물은 기근을 막아준다. 가히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춘 승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강원랜드가

황폐화를 만들고 있으니 걱정이 앞선다

 

         출처 : 다음 산사진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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