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받아 본 기억은 한번도 고갈되지 않는다. 아무리 눈물이 우리의 얼굴에서 웃음을 가시게 하더라도. 사랑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그 너머까지를 배려한다. 우리가 삶의 걱정들과 어울려 있는 동안에도.
당신보다 더 마른 잎 같은 얼굴로 당신을 먼저 근심해 주는 사람, 그는 당신보다 오래도록 앓아 온 사람이다. 나를 낮은 곳으로 한 계단 낮추는 겸손 그리고 앞서 기다리는 일, 그것이 사랑의 전부 아니겠는가.
사랑의 대상이 바뀌기도 했지만, 기쁜 소식이 있으면 그것을 처음 나누려고 막 뛰어갔던 경험이 나에게도 여럿 있었다. 아주 어릴 때에도 그랬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들길을 내달려 산비탈에서 일하는,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어머니에게 나는 달려갔다. 부쩍 마음이 자란 후에도 그랬다. 그녀의 창문 아래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그녀를 기다리던 달밤도 있었다. 내 사랑이 당장의 화답을 받지 못하기도 했지만, 사랑의 둘레에 있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가슴이 사랑에 붉게 물들어 본 사람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당분간 밀려나 있어도 좋은 것, 그것이 사랑의 감정 아니던가. 마치 낮달이 하늘 한 쪽에 희미하게 밀려나 반나절을 살듯이. 그리하여 밤하늘에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리듯이.
며칠 전 결혼기념일을 맞아 우리 가족은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작은 케이크와 촛불을 한가운데에 두고서. 그런데, 아내가 장롱 깊숙한 곳에서 작은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왔다. 식구들의 이목이 종이 상자에 쏠렸다. 아내가 종이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 봉투는 색이 바래고 많이 낡아 있었다. 내가 아내에게 처음 보낸 사랑의 편지였다. 나는 두 아이 앞에서 봉숭아 꽃잎처럼 붉어졌다. 아무렴 어떤가. 우리는 그때그때의 사랑의 감정과 솔직하게 만날 뿐.
헌 신 -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 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 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복효근 시인이 우편으로 신작 시집을 보내 왔다. 시 <헌 신>을 읽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일궈 온 사랑과 내 사랑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인은 신발과 같은 무궁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고운 발을 굽이감아 고이 받쳐 주는 신발. 급류와 진창길과 눈보라에 맞서는 바깥을 자처하는 사랑. 사랑하는 이보다 더 벼랑 끝에 선 사랑. 새가 지푸라기와 흙으로 둥지를 꾸며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끼를 받아내듯이 하는 사랑. 지붕이 되고 처마가 되고 울타리가 되는 사랑. 사랑하는 이의 마음의 수치와 모양새와 빛깔을 앞서 짐작하고도 남는 사랑. 몸과 마음을 바쳐 스스로는 ‘헌 신'이 되는 사랑. 헌신(獻身)의 사랑. 기교도 없이 사랑하는 이에게 헌정한 사랑. 사랑의 끝을 만나고서도 그 매무새가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랑의 응대를 바라지 않고 다만 나의 헌신을 완성하는 사랑. 우리가 열애라고 높여 부르는 그런 사랑, 사랑의 자세.
그러고 보면 사랑의 감정은 우리가 보통 조금은 기대를 하지만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그곳'에 미리 당도해 있는 일인지 모른다. 마치 당신이 나를 방문하러 올 때에 내가 당신을 맞으러 정류장에 미리 나가 있는 일처럼. 마치 당신이 나에 대해 그립다고 순간 생각할 때 문득 내가 당신의 외로운 벤치 곁에 서 있는 기적처럼. 나를 낮은 곳으로 한 계단 낮추는 겸손 그리고 앞서 기다리는 일, 그것이 사랑의 전부 아니겠는가.
[ Tip. 사랑은 가장 큰 대륙 ]
15세기를 살다 간 스페인의 문인 후안 델 엔시나(Juan del Encina)의 시 < 사랑의 고통이 더 낫네 >를 만났을 때도 나는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이 지구를 따뜻하게 떠받치는 힘은 바로 사랑이라고 거듭 생각하면서. 사랑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큰 대륙. 사랑에 관한 한 당신의 가슴이 아직 미개척지라면 그곳을 탐사해 보시길. 그리하여 그 탐사의 기록을 편지로 꼭 남겨 두시길. 먼 후일에 그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도 좋으리. 물론 당신의 얼굴은 다시 설레고 수줍어 금세 봉숭아 꽃잎처럼 붉게 물들겠지만. 그러나, 당신이 사랑을 처음 느꼈을 때 써 내려간 그 한 장 사랑의 편지만큼 멋진 걸작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사랑이 없는 가슴보다는 사랑의 고통이 있는 가슴이 더 따뜻하네. 그러니 장미를 보시거든 가시가 있다는 불평은 마시길.
사랑의 고통이 더 낫네
- 후안 델 엔시나
사랑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의 고통이 더 낫네 사랑에 보답이 있다면 죽는 것조차 달콤하네 잊혀짐 속에 사는 것은 사는 것도 아니네 사랑 없는 삶보다는 열정과 고통을 겪는 것이 낫네 사랑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의 고통이 더 낫네 사랑이 없는 삶은 길을 잃어버린 삶이라네 삶을 어떻게 사는가를 아는 것은 삶 그 이상의 것이네 사랑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의 고통이 더 낫네
- 문태준 / 시인,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이 있다.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