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을2

[詩와 함께 하는 아침] 바닷속에서 물질하는 ‘어멍’을 위하여

金 敬 峯 2009. 3. 4. 22:03

[詩와 함께 하는 아침] 바닷속에서 물질하는 ‘어멍’을 위하여  (4)
  2009년 3월 2일 / 삼성

‘엄마'라는 호칭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체온을 갖고 있다. 딸도 아들도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세상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금방 잦아들 것만 같다. ‘엄마'는 저 제주도 귤 밭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든든한 삼나무 방풍림(防風林)이다. 


이제는 머리에 하얀 서리를 이고 목과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해졌지만 내게도 엄마는 든든한 삼나무 방풍림 같았다. 따뜻한 밥은 어린 자식들에게 내주고 솥 걸린 부엌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식은 밥으로 끼니를 때우셨다. 식은 밥을 먹고 나서 또 당신의 젖을 내주셨다. 속이 까맣게 타서 남몰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내가 아플 때 나를 업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셨다. 마늘 농사 지어 갚겠다며 돈을 빌리러 다니시는 것을 나는 철없이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평생을 산비탈 밭에서 살았고, 어둑어둑한 저녁에는 국수를 삶았다.

골짜기가 되어 자식을 깊숙이 품고, 자식 대신 앓는 이 세상의 엄마들. 자식들이 꽃으로 잎으로 살게 해달라고 늘 기도를 올리는 이 세상의 엄마들. 나는 엄마가 산미나리를 쪄서 이고 오실 때나 깻잎을 잔뜩 따서 안고 돌아오실 때가 좋았다. 엄마의 품에서도 산미나리와 깻잎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무릎 삼아 베고 사르르 잠들 때가 좋았다.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은

                                                                             - 정일근

따뜻한 말이 식지 않고 춥고 세찬 바람을 건너가기 위해
제주에선 말에 짤랑짤랑 울리는 방울을 단다
가령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이 그렇다
몇 발짝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어머니라는 말에
어멍이라는 말의 방울을 달면
돌담을 넘어 올레를 달려 바람을 건너
물속 아득히 물질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찾아간다
어멍……,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나
o 이라는 바퀴 제 몸 때리듯 끝없이 굴리며
그리운 것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저 숨비소리 같은 것

정일근 시인의 ‘제주에서 어멍이라는 말은'이라는 시를 읽는 순간 나는 몇 해 전 제주도에 가서 우연히 마주쳤던 물질하는 해녀 엄마들 생각이 났다. 통눈의 방수경과 갈쿠리와 태왁(물 속에서 나와 참았던 숨을 쉴 때 몸을 지탱하는 도구) 과 망사리(물질할 때 잡은 전복, 소라 등을 담아두는 도구)를 챙겨 든 까만 잠수복의 해녀 엄마들은 하나같이 늙은 엄마들이었다. 다리가 휘어졌고 등이 구부정해진 엄마들이었다. 그래도 연신 웃는 엄마들이었다. 집채같이 큰 파도가 아니라면 늘 바닷물 속에 들어가 해삼과 전복과 미역을 따오는 엄마들이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시 ‘시론(詩論)'에서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濟州海女)도 /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라고 노래한 순정의 엄마들이었다. 그 엄마들을 제주도에서는 ‘어멍'이라고 불렀다.

‘어멍'이라고 부르면 살랑살랑 봄바람이 일 것 같고, 노랗게 핀 유채꽃을 보는 것만 같다. ‘어멍'이라고 부르면 짤랑짤랑 작은 방울이 명랑하게 울리는 것 같다. 우리네 엄마들은 살림이 고단하고 눈물이 많아 풀썩풀썩 주저앉는 운명으로 사셨지만, ‘어멍'이라고 부르면 뒤웅박처럼 물질하는 바다에서도 둥실둥실 떠오를 것 같다. ‘어멍'이라는 호칭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자꾸자꾸 살갑게 다가가는 것이 있다.

 

제주도 어멍들은 설문대 할망의 딸들이다. 힘이 엄청 셌다는 설문대 할망. 키가 엄청 컸다는 설문대 할망. 키가 너무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아서 누우면 발이 비양도까지 닿았다는 설문대 할망. 슬하에 자식이 500명이나 되었다는 설문대 할망. 그런 거녀(巨女)의 딸들이 제주도 어멍들이다. 제주도 오름처럼 성격이 유순한 어멍.

‘어멍'이라고 부르면 물질하는 엄마의 숨비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물 속에서 참았던,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쉴 때 나는 휘파람 같은 소리. ‘어멍'이라고 크게 부르면 그 소리는 짤랑짤랑 방울을 울리며 어린 말이 어멍 말을 찾아 가듯 올레를 지나서 돌담길을 지나서 전복이 붙어사는 바닷물 속까지 가 닿을 것만 같다. 제주도 바다보다 파래보다 더 푸르디 푸른, 출렁출렁 하는 생명의 어멍들을 만날 것만 같다.


[Tip. 눈물 속에 또 눈물 솟던 ‘울엄매']

박재삼(1933~1997) 시인은 삼천포 바닷가에서 자랐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앞바다에 떠 있는 목섬 은 물이 나면 천연의 길이 생겼는데, 박재삼은 거기 가서 바지락도 캐고 꽃게도 잡고 해초도 캐고 미역귀를 따먹었다 한다. 주사 맞힐 돈을 빌리지 못해 남동생이 죽은 후 박재삼의 어머니는 마른 해산물을 파는 도붓장사로 나섰다. 후일에는 진주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아서 자식 공부를 시켰다. 박재삼의 시 중에는 어머니를 기리는 시가 여러 편 있는데 아래는 진주 어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박재삼 시인이 쓴 시이다. 신새벽에 집을 나서서 밤 늦게 돌아오느라 진주 남강 맑은 물을 맑게 본 적 없이 사셨을 엄매야.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눈빛으로 살았던 엄매야. 눈물 속에 또 눈물 솟던 울엄매야.


추억에서
                                           - 박재삼

진주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 밑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사진 제공: 제주도민속사진연구회

- 문태준 / 시인,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이 있다.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