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함께 하는 아침] 사랑은 온몸으로 구체적으로 | |
2009년 2월 2일 / 삼성 | |
누군가에게 대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 바에야, 해진 옷소매의 실을 풀어서라도 다른 이의 상처를 싸맬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가 다른 이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은 마음의 창고에 가득가득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나도 업혀 자랐다. 어머니가 나를 업기도 했으나 두 누나가 드물지 않게 나를 업어 키웠다. 누나는 내 아랫배를 누나의 약하고 좁은 등에 댄 후 포대기를 둘러서 업었다. 누나의 또래들이 노는 마당 햇살 속에서, 혹은 돈 벌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서늘한 달빛 아래서. 그런데 누군가를 업는 일은 예사의 일이 아님은 틀림없다. 일곱 살 아이가 돌을 맞은 아가를 업으려 하는 것을 나는 최근에 보았다. 매우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겨우 두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한 아이가 다리를 후들거리며 아주 엉거주춤한 자세로나마 더 작은 아이를 애써 업으려 하는 것을 보노라니, 우리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사랑을 듬뿍 받는 동안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이미 사랑을 학습했고 또 가장 최초의 인류로 돌아가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법도 배웠다고 해도 될 성 싶었다. 그러니 ‘업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의 유전인가. 정끝별 시인이 근래에 펴낸 시집 <와락>을 읽다가 사랑에 관한 시 한 편에 오래 눈길이 갔다. 마음에 흐뭇하게 들어맞는 것이 있었다.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논에 물을 대주듯 사랑한다는 말 대신
우리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실상은 인가도 인기척도 없는 쓸쓸한 산(山)처럼 혈혈단신인 바, ‘대주는 것'만이 우리의 삶을 서로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고랑고랑하는 목숨에게 귀한 약을 구해다 주는 은인처럼. 다른 이의 상처를 대신 앓아 내가 먼저 눈물을 흘리고, 다른 이의 생의 의지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내가 먼저 바닥으로 내려가 받아 내고, 그리하여 다른 이의 허기진 영혼에게 내가 한 공기의 따뜻한 밥이 되는 일, 그것을 시인은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대주는 것'이라는 투박한 말을 통해 가장 크고 깊고 완전한 사랑의 성취에 대해 말한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지금껏 살아온 나는 물불 가리지 않고 덥석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한 적이 많지 않았다. 그이에게 온몸으로 나를 맡긴 적이 많지 않았다. 이리저리 재고 계산이 많았다. ‘손해는 없을까'하는 걱정과 어울려 살았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꾸짖는 시로 이 시를 읽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군가에게 대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옷을 걸치고 살아가는 바에야, 해진 옷소매의 실을 풀어서라도 다른 이의 상처를 싸맬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가 다른 이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은 마음의 창고에 가득가득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이 지상에서 사랑에 관한 시는 쉼이 없이 창작될 것이다. 사랑은 아주 높고 숭고한 산봉우리다. 산악인들처럼 시인들은 사랑의 고봉(高峰)을 찾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손에서 사르르 맥이 풀어지고 몸에서 온기가 떠나는 날까지 사랑을 찾아 나서야 하고 사랑을 베풀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은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새벽밥을 짓는 사람이 되어서. 별이 쌀이 되고, 쌀이 다시 밥으로 무르익을 때까지 우리는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밥솥 속에서 속속들이 잘 익도록 한참 뜸도 들여야 한다. 익은 밥처럼 으스러져라 껴안아야 한다. 김승희 시인이 지어낸 한 공기의 따끈따끈한 새벽밥을, 사랑을 부디 받으시라.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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