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자료

시와 산문의 경계

金 敬 峯 2009. 4. 15. 21:21

시와 산문의 경계




우리가 글을 쓰면서 무심코 지나가는 상식적인 생각중의 하나가 시와 산문의 구별이다. 글의 길고 짧음을 구별의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고, 시와 산문의 기능적 요소를 놓고 가름을 하기도 하며 다루고 있는 주제의 복합성 여부로 시와 산문을 나누기도 한다. 시의 요소가 언어의 압축과 문장의 생략이라고 하면서 이미지image를 그 중심에 놓을 때 산문에는 언어의 압축과 생략이 없으며 산문에는 이미지의 생성이 부재한 것이냐고 반문을 제기한다면 이 또한 대답이 궁색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시와 산문은 그 경계가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각자의 고유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시와 산문의 경계에 위치하는 작품이 가장 윗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잡문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시에는 ‘산문시’라는 영역이 존재한다. 산문, 즉 소설과 수필의 영역에서도 시적인 소설, 시적인 수필이 존재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 참 시적이야!’ 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보면 점점 애매모호한 경지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난점을 피해 가기 위해서 한 쪽의 영역을 확고히 함으로써 그 나머지 부분을 다른 한 영역으로 정의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수필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것은 수필이 아니라 시다’라고 부정하는 경우는 없다. 거꾸로 행과 연을 나눈 시들을 읽으면서 ‘이것은 시가 아니다’ 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훨씬 많다. 이것은 이미 소설이나 수필의 언어 구사가 문장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에 시의 언어 구사는 단어, 또는 구 句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 암시하는 바의 구조가 원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산문화된 시를 읽게 되는 것이다. 더 시와 산문의 경계를 구분짓는 요소를 열거한다면, 시는 시제 時制가 일정한 분할된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지거나 통시적 通時的인데 비하여 수필이나 소설은 자유로운 시제의 전개 또는 시간의 넘나듬이 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더 나아가 보면 시는 인과론에 얽매어 있지 않으나 소설이나 수필은 시보다는 훨씬 원인과 결과의 매듭이 분명하고 사건 중심의 작가의 의도가 보다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시와 산문을 구분 짓는 요소를 거론한다면 시의 기법은 비유에 의존하고 있으나 산문은 그러한 비유보다는 기승전결, 또는 서론 본론 결론과 같은 글의 구조에 따른 문체의 기법에 더 관점을 둔다는 것일 것이다.




어떤 장르를 택해서 글을 쓰는가는 오직 작가의 판단에 따를 뿐이지만, 우리 일상에서 마주친 사건이나 현상이 하나의 체험으로 모아지고 그 체험이 內省作用을 통해서 형상화되는 과정에서 시로 쓸 것이냐. 아니면 산문으로 쓸 것이냐 하는 결정은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시와 산문의 특성을 체득하는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시와 산문의 특성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지름길을 찾는 것과도 같다. 기질적으로 어느 사람은 시에, 어느 사람은 산문에 재능을 가진다. 그것은 사고의 형성 방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시적인 재능은 직관력에 의존하고 산문적인 재능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치우친다. 이 말은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이지 꼭 그렇게 들어맞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가 약간 샛길로 빠졌는데. 이야기의 요점은 글을 쓰는 우리는 때로는 시를 쓰고 때로는 산문을 써야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시와 산문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글을 쓸 때 우리는 이런 점을 늘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든 작품은 그 출발이 작가의 체험이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작품 하나 하나는 작가의 체험과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그 작품은 체험과 각성에서 이미 벗어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작가라는 한 개인의 경험이나 각성으로부터 빚어지는 작품은 체험과 각성을 모체로 하고 있으나 그러면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 갓 태어난 아이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독립적인 인격과 특징을 구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에게서 태어난 작품은 경험이나 각성을 통과하여 다시금 본질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것이다. 본질적인 질문이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는 것이므로 무어라고 확연히 말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삶이란 무엇인가?’ , ‘삶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인가?’를 되물어 보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많은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정서적, 현실적 체험을 공유할 수 있다. 그 공유 共有는 단순한 연대나 동감에 그쳐서는 안된다. 작품을 통하여 어차피 작가의 진면목이 드러날 수 밖에 없겠지만 그 진면목이 작가 자신의 과시나 과열, 과잉된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숙고의 과정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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