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
하 석 록
옛날 예수님 당시에 바울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똑똑한 청년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법률과 로마의 과학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소 출신으로 희랍의 철학을 알고 있었고,
유대 사람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가마리엘의 제자였다.
종교의 하늘과 철학의 사람과 과학의 땅을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만족도 평안도 없고 다만 고민과 공포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이 고통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이 누구일까”하고 깊은 한탄을 하였다.
나는 ‘옷’이라는 글자를 네 가지로 분해한다.
동그라미 ‘ㅇ’는 하늘이요 가로 ‘ㅡ’ 그은 것은 땅이요
내리그은 ‘l'것은 사람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가지고도
결국 인간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 세 토막을 가지고도
옷이 되지 못했다. 사람은 옷을 입어야 추위를 막고 벌벌 떠는
공포에서 자유롭게 되는 법인데 바울은 하늘과 땅과 사람, 종교와
철학과 과학을 가지고도 그의 몸을 싸줄 만한 세계를 만들 수가 없었다.
옷이 되려면 동그라미와 내리그은 막대기와 가로 그은 막대기에
이 셋을 받쳐주는 하나의 받침 ’ㅅ‘이 필요하다. 이 받침을
존재(存在)라고 하는데 이 받침을 찾아서 그는 몹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에다 또 하나의 받침, 이것을 안타깝게 찾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의 유대 사람의 물결에 끼어 마치 사냥이나 하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迫害)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더욱
신이 나서 예루살렘을 떠나 멀리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쫓아간 것이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그는
밝은 빛에 포위가 되었다. 눈이 시고 부셔서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땅에 쓰러졌다. 그때 그의 귀에 들려오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다.
복스러운 소리이기에 복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자기를 밝혔다.
바울은 깜짝 놀랐다. 예수는 얼마 전에 빌라도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느냐. 그는 고개를 들고 자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 그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그의 발에도
못 자국이 있었고 그의 옷은 흰빛이었다. 흰옷이란 죽음을 이겼다는 의미이다.
마치 부활을 세례로 표시하듯이 물속에서 깨끗이 빤 옷처럼 그것은 아무 때도
묻지 않은 하이얀 옷이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 그는 공포로부터 해방을
얻었다. 바울은 처음으로 사랑을 보고 성숙한 나(自)가 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받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밖에 받침을 가질 때 동그라미와
내리그음과 가로 그음이 하나가 되어 옷이라는 글자가 되고 만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이라고 한다. 그는 갈라디아 지방에 사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라고 한다. 사람은 옷을 입어야 사람이다.
나라가 있어야 사람이다. 진리를 깨달아야 사람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Robert Burns - Auld Lang Syne(Old version 1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