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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

金 敬 峯 2009. 8. 27. 16:01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고.

‘예수는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 당했다.’는 한 마디가 예수에 대한 편협한 생각들을 흔들어 놓았고, ‘마르코복음’을 바탕으로 한 타당성 있는 작가 김규항의 논리들이 기독교에 대한 고정관념을 움직여 주었다.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담은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도 ‘마르코복음’은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종교적 첨가도 적은 책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모든 독실한 신자들에게 느끼는 거부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 때론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다준 정신적 순수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내게 그런 순수함이 결여되어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영원히 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독실한 신자들이 보기에 아마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교신자다. 불교를 믿는다고 반드시 절을 찾아 삼배를 올려야만 불, 법, 승에 귀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너무 똑똑해서 좀처럼 아상을 허물지 못하는 구제불능 불쌍한 중생이지만,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게 불교신자임을 밝힐 수 있다. 참고로, 절에서는 가장 불쾌하고 심한 욕이 똑똑하다는 말이다.^^

예수전은 이렇게 삐딱 선을 타고 있는 나의 종교적 열등감(?)에 적지 않은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나처럼 ‘독실한’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싫어하는 사람이 불교라는 종교에 그리 큰 반감을 갖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수든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는 책은 아무리 주변에서 좋은 평을 받았어도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간 혹 제목에 속아 사들였다 하더라도 머리말에서 색깔이 드러나면 책값을 아까와 하지 않고 덮어버릴 정도로 종교적인 서적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다. 종교적인 체험담이나 비슷한 류의 책들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를 인정해야하는 대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쓸모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전’은 시종일관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보다는 ‘기독교도 이런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구나’라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내게는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지배계급의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혁명을 꿈꾸는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려내었다. 그 시대를 통탄하며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바로 오늘날 우리의 문제들에까지 이르게 된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부패한 지배계급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에게 분노하고 저항하는 혁명가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는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더 이상의 사족이 필요치 않은 별처럼 반짝이는 문장들이 ‘예수전‘에는 있다. 종교에 대한 생각들, 혹은 이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인상적인 말들을 뽑아 보았다.

  예수전에서-

* 입이 돌아가고 미친 말을 해대는 것만 귀신들린 게 아니다. 진짜 심각한 귀신 들림은 오히려 겉보기엔 멀쩡해서 귀신 들렸다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태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

*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종교적 천국으로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선교나 전도로만, 기도를 종교적 간구로만 이해하는 건 본의 아니게 그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말로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말로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며 기도는 우리의 말로 ‘신념을 다지고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지배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안전하다.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체제가 얼마간 수용할 수 있다. 사실 그런 수용은 체제 유지를 위해 유익하다. 체제가 좀 더 근본적인 저항이나 위기를 맞는 상황을 미연에 막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예 체제 자체를 부인해 버리거나 적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체제는 개혁은 수용할 수 있어도 변혁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여 개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다시 세우려 한다. 예수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나아가 제거될 위험 속으로 발을 디딘다.

*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교회는 그 ‘시점상의 혼란’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부추겨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 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 가는 쪽보다는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 대개 개신교는 중세 카톨릭의 타락에 대항한 종교개혁으로 만들어진 걸로 알려져 있다. 물론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의 좀 더 중요한 본질은 십자군 이후 봉건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왕과 귀족들을 제치고 서서히 서양 세계의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난 도시 상인들, 즉 부르주아들이 왕과 귀족의 교회인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에 맞는 교회를 세운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사회 탄생의 서막이다.

* 예수당시에도 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져졌다. 그러나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면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가 된다. 물론 누구도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대 놓고 말하진 안지만,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미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셈이다. 예수는 그 저주를 뒤집는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만연한 세상을 향해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 이번에도 예수는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는 건 물론 ‘하느님에게 감사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예수는 이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라는 것, 이적이란 ‘나와 하느님의 소통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 예수의 태도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깨우침을 준다.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라고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쳤듯이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 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강도들의 소굴”이라 외쳐야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이다. 사실 그런 관점은 계급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한 오늘 세상에서도 일반적이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계급은 인민들로 하여금 세상을 계급으로 나누어 보지 못하게 하려,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뭉뚱그려 보게 하려 애쓴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민족’, ‘위대한 로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따위로. 그래야만 그 민족이나 국가 안에서 계급간의 억압과 착취를 숨길 수 있다.

* 예수는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믿음’을 가지라고,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느님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교회에 나가거나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차원이 아니다. 교회나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 한 방식일 수는 있지만, 유일하거나 완전한 방식은 아니다.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교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 (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해석이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 영성가, 비폭력주의자, 하느님의 아들 등등. 그런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 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 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출처 : 독일교육 이야기  |  글쓴이 : 무터킨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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