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을

안도현 시 모음

金 敬 峯 2010. 2. 3. 20:40

     

    자작나무를 찾아서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숲길을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가 멀쑥한 백양 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예쎄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다 말했을 때
    대기업의 사원 내 친구 하얀 와이셔츠는
    나의 사상이 의심된다고, 저 혼자 뒤돌아 서서
    속으로 이제부터 절교다, 하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연애시절을 아프게 통과해 본 사람이 삶의 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런 거라고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뭐니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 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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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나무 한 그루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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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길이 없다면

    내 몸을 비틀어
    너에게로 가리

    세상의 모든 길은
    뿌리부터 헝클어져 있는 것,
    네 마음의 처마끝에 닿을 때까지
    아아, 그리하여 너를 꽃피울 때까지
    내 삶이 꼬이고 또 꼬여
    오장육부가 뒤틀려도
    나는 나를 친친 감으리
    너에게로 가는

    길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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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생각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위에 點點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外邊山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 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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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백나무가 되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내려앉는 참새떼,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고마워라
    나를 측백나무 한 그루쯤으로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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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나무는 건달같이


    군산 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女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

    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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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숲이 푸른 이유


    대숲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질하려고
    바람이 대숲으로 들어가네
    댓잎들이 배때기를 일제히 뒤집은 채
    바람을 밀어내려고 버티네
    이것 좀 봐 화가 잔뜩난 바람이
    한 손으로 대숲의 머리채 휘어잡고
    한 손으로 대숲의 종아리 후려치네
    대숲이 왜 저렇게 푸르냐 하면
    아으, 한 평생 서서 매맞은 탓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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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으로 뱉아 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것 같아 두렵다

    살아 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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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 번 건드려 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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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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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의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 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 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녁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 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 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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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이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를 모아 둔
    비 온 뒤의 연못물은 젖이 불어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네
    내 장딴지에는 살이 올라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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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두집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 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미운 단발머리 너는
    창밖 은행잎 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두값도 내지 않고 나와버렸다
    네가 뒤쫓아오기를 바라면서
    왜 그냥 가느냐고 이대로는 못 간다고
    꼭 그 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너는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네가 보고 싶어도
    매일 가던 너의 만두집에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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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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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편지


    당신, 저 강을 건너가야 한다면
    나, 얼음장이 되어 엎드리지요

    얼음장 속에 물고기의 길이 뜨겁게 흐르는 것처럼
    내마음속에는 당신이 출렁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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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올 때까지는


    보고 싶어도
    꾹 참기로 한다

    저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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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불빛


    들녘 끝으로 불빛들이
    일렬 횡대로 줄지어 서 있는 만경평야
    이 세상 개울물을 잠방잠방 맨처음 건너는
    아이들 같구나
    너희도 저녁 먹으러 가느냐
    날 추운 데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
    저 스스로 몸에다 불을 켠다는 것
    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
    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
    못했는가 생각할수록 어두워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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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다는 것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진것이
    빈 손밖에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 바라보는 동안은
    나 무엇하나
    부러운것이 없습니다.

    그대 손등 위에 처음으로
    떨리는 내 손을 포개어 얹은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스스럼 없이 준다는것
    그것은
    빼앗는 것보다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이지상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
    그것은
    세상 전체를 소유하는 것보다
    부끄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대여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줄 것이 없어
    마음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누구에게 준
    넉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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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철 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께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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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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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식한 놈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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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꽃의 종아리에 인둣불을 지질까
    물고기의 누에 먹물을 뿌릴까
    바지랑대로 하늘을 휘저어 별들을 섞을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시여
    우주로 통하는 쥐구멍을
    꼭꼭 틀어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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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 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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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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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의 분별력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하고요

    장닭 벼슬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벼슬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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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치


    山西에 와서 여름내내 여치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치에 대해 시를 써보겠다는 욕심이
    내 마음속에서 찌릿찌릿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나는 아직 그 풀숲으로 들어가본 적은 없습니다
    웬지 두렵고, 또 부끄럽기도 해서요
    한번은 풀숲 근처에 오래오래 서 있었는데
    그날은 여치 우는 소리를 잠깐도 듣지 못했거든요


    여치는 밤이 깊어야 뜨는 아련한 별처럼 웁니다
    타고 앉은 풀잎을 앞다리로 긁어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여린 날개로 상심한 애인의 가슴을 문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곤충도감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지만요


    한 마리가 울면 여러 마리가 한데 덩달아 우는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는 들리지 않다가도
    책장을 덮으면 내 귓가에까지 바짝 다가와 울어쌓는
    여치의 마을에 나는 잘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쓰는 시라는 것,
    아마 여치 우는 소리를 닮으려는 인간들의 꿈의 부스러기가 아닐는지요?
    여기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도 겨울도 또 다른 봄도 보내고 나면
    내년 여름쯤엔 내 시에도 여치 우는 소리가 날지 누가 압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고요

    ~~~~~~~~~~~~~~~~~~~~~~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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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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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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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자전거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

    도둑들


    생각해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내 손끝에 닿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
    그게 잠자던 참새의 팔딱이는 심장이었는지, 깃털 속에 접어둔 발가락이
    었는지, 아니면 깜박이던 곤한 눈꺼풀이거나 잔득잔득한 눈곱 같은 것이었
    는지,
    어쩔 줄 모르고 화들짝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슬퍼져서 한 발짝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
    고 허공을 치며 소리내어 엉엉 울지도 못하고, 내 이마 높이에 와 머물던 하
    늘 한 귀퉁이에서 나 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
    정말 별들이 참새같이 까맣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울던 밤이었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보던 날도 그랬다
    나는 오래 흐른 강물이 바다에 닿는 순간 멈칫하는 때를 생각했고
    해가 달의 눈을 가려 지상의 모든 전깃불이 꺼지는 월식의 밤을 생각했지만,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진
    내 손끝은, 나는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뜨거워진 몸을 뒤척이며 별처럼 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던 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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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기똥풀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얼굴 쳐다보았을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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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어제도 나는 강가에 나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오시려나, 하고요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가슴으로 눌러두고
    당신 계시는 쪽 하늘 바라보며 혼자 울었습니다
    강물도 제 울음소리를 들키지 않고
    강가에 물자국만 남겨놓고 흘러갔습니다

    당신하고 떨어져 사는 동안
    강둑에 철마다 꽃이 피었다가 져도
    나는 이별 때문에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란도란 열매가 맺히는
    것을
    해마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별은 풀잎 끝에 앉았다가 가는 물잠자리의 날개
    처럼 가벼운 것임을
    당신을 기다리며 알았습니다

    물에 비친 산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던
    그 뻐꾸기 소리가 당신이었던가요
    내 발끝을 마구 간질이던 그 잔물결들이 당신이었
    던가요
    온종일 햇볕을 끌어안고 뒹굴다가
    몸이 따끈따끈해진 그 많은 조약돌들이
    아아, 바로 당신이었던가요

    당신을 사랑했으나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오늘은 강가에 나가 쌀을 씻으며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 밥 한 그릇 맛있게 자시는 거 보려고요
    숟가락 위에 자반고등어 한 점 올려 드리려고요
    거 참 잘 먹었네,그 말씀 한 마디 들으려고요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詩.안도현

    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2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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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밥


    일찍 나온 초저녁별이
    지붕 끝에서 울기에

    평상에 내려와서
    밥 먹고 울어라, 했더니

    그날 식구들 밥그릇 속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찬 없이 보리밥 물 말아먹는 저녁
    옆에, 아버지 계시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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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오는 밤


    한 입,
    또 한 입,
    눈을 받아먹던 아이들이 집으로 다 돌아간 뒤에

    한 등,
    또 한 등,
    마을의 집들이 모두 전등 스위치를 내린 뒤에

    오줌이 누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가
    그때, 가로등은
    흉내를 한번 내보기로 하였다

    아,
    아아,
    눈을 받아먹으려고
    저 혼자서 입을 크게 벌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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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엽서


    한잎 두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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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를 위하여


    그대를 만난 엊그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던 까닭은
    세상에 지은 죄가 많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죄는
    잊어버릴수록 깊이 스며들고
    떠올릴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 중
    숨길 것은 영원히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여
    아픈 가슴을 겪지 못한 사람은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수 없음을 배웠기에
    내 가진 부끄러움도 슬픔도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의 한 두 배쯤
    마음속에 바람이 불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대를 위하여
    내가 주어야 할 것을 생각하며
    나는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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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밭가에서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오니다
    마늘순이 한 뼘씩 쑥쑥 자랍니다
    나는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 끝은 알알하게 쏘고 말
    삼겹살에도 쌈 싸서 먹고
    장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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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과 연어와 물푸레나무의 관계


    남대천 상류 물푸레나무 속에는
    연어떼가 나무를 타고
    철버덩거리며 거슬러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세차게 흔들 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알을 낳으려고
    연어는 알을 낳은 뒤에 죽으려고
    죽은 뒤에는 이듬해 봄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수천개 연초록 이파리의 눈을 매달려고
    연어는 떼지어 나무를 타고 오른다
    나뭇가지가 강줄기를 빼닮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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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사는 집


    주인 내외는 어디 일 나갔나?
    사립문은 열려 있고
    기울어진 울타리 위에는
    호박덩굴이 마음껏 달릴 듯하더니
    잠시, 멈춰 하늘을 만지고 있고
    마당에는 쉬고 있는 경운기 한 대
    삽 두 자루, 빈 경유통 하나
    툇마루 끝에는 걸레가 하얗게 말라가고 있고

    나는 좀 기다릴 요량으로 뒤뜰로 가본다
    오동나무 그늘 아래
    낯선 객이 왔는데도 짖지 않는
    잠든 똥개 한 마리
    햇살이 그 주변에서
    아차, 하고 짐짓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이고

    이집은 저 혼자 산다
    이럴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한번쯤은 나를 비우고
    누가 나를 두드리면 소리가 나도록
    텅텅,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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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자전거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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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땅에서 결혼 이라는 것은


    지금 이 땅에서 결혼 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지아비가 되고
    한 사람의 지어미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노예가 돠ㅣ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두 가슴에 불이 붙이는 일입니다.
    키 큰 저 신랑의 숨결이 자꾸 거칠어지고
    이쁜 저 신부의 얼굴이 홍옥처럼 붉어지는 것은
    서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쓸쓸하던 분단의 날들을 깨부수고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선언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기어코 결혼이라는 것은
    해방이라는 이름의 기관차를 함께 타는 일입니다.

    신랑이여 신부여
    이제 그대들이 맨 처음으로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첫 아기의 눈부신 울음소리를
    이 세상의 들려주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통일의 전사로
    그 사랑스런 아기를 키우는 일입니다.
    신랑이여 신부여
    그대들은 오늘부터 비로소
    조국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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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 이불


    소설가 박범신 선배 말에 따르면
    중국 연변 땅에 가면
    첫날 이불 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혼수품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집의 분홍 이불 한 채 같이 덮고 자면
    누구나 착한 짐승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찬란한 날이 올때까지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눈비 오듯이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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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


    바람은 불지요,
    길을 열자고 같이 나섰던 동무들은
    얼음장 꺼지듯 가라앉아 소식 없지요,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언덕배기 빈 터에 쑥 돋듯 하지요,
    저 연록 물오른 바람난 실버들 가지처럼
    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요,
    나도 내 존재를 어쩌지 못해서요,
    아래서는 안돼, 안돼 하면서
    내 몸은 자꾸 꼬여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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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에게 가는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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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 삼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긋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가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 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 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

    가령, 네 눈동자에 눈물이


    가령, 내가 네 손을 처음으로 덥석 잡는다면
    너는 손을 빼다가는 아무 일도 아닌 듯
    결국은 나에게 안겨올까 아니면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노라며
    얼음장같이 돌아설까 사라지고 말까, 개같은 놈이라며
    그러나 차라리 욕을 얻어먹을 때 먹더라도
    나는 용기를 내어

    네 손목을 잡아 이끌고 골목을 찾아든다면
    내 마음보다 어두운 여인숙이 거기 웅크리고 있다면
    귀 떨어져나간 누런 숙박계에다
    엉터리 주민등록번호를 빨리빨리 쓰고
    금방 새로 지어낸 내 이름도 하나 쓰고
    모나미 볼펜을 던지듯 내려놓고

    네 외투를 벗기게 된다면 그리고
    네 치마를 벗기게 된다면 그리고
    이 세상의 더럽게 순결한 담요 위에
    마지막으로 너으 팬티 한장만 남겨둔다면
    너의 마음은 벗기지 못하고 그때
    너의 몸이 작은 짐승같이 바들바들 떨게 된다면
    그 떨림 끝에

    가령, 네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게 된다면
    마침내 그 눈물의 홍수에 내가 갇히고 그리하여
    네가 흘린 그 눈물에 너도 갇히게 된다면
    나는 사람도 아니야, 사람도 아니야
    내가 나늘 때리며 소리 없이 울까 아니면
    너에게 쓴 모든 편지를 이제 불살라버리겠노라고
    성냥이나 뒤적뒤적 찾는 척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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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과나무

    모과나무는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

    외로움


    시 쓰다가
    날선 흰 종이에 손 벤 날
    뒤져봐도
    아까징끼 보이지 않는 날

    ~~~~~~~~~~~~~~~~~~~~~~~

    이웃집


    이웃집 감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가지 끝에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도 몇 개 데리고
    우리집 마당으로 건너왔다
    나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저 홍시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몇 날 며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당장 따먹어버리자고 했고,
    딸은 절대로 안 된다 했다

    이웃집 감나무 주인도
    越境한 감나무 가지 하나 때문에
    꽤나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홍시를
    따먹었는지, 그냥 두었는지
    여러 차례 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서
    홍시가 떨어질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한다
    밤중에 변소에 가다가도
    감나무 가지에 불이 켜져 있나, 없나
    먼저 살핀다고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감나무 때문인가
    홍시 때문인가
    울타리 때문인가

    ~~~~~~~~~~~~~~~~~~~~~

    20세기가 간다


    자기 살을 자기 손으로 떼어내며
    백일홍이 지고 있다

    백일홍은 왜
    자기 연민도 자기에 대한 증오도 없이
    자신한테 버럭 소리 한번 지르지도 않고
    뚝뚝, 지고 마는가

    여름 한낮, 몸 속에 흐르던 강물을
    울컥울컥 토해내면서
    한 마리 혼절한 짐승같이 웅크리고 있는 나무여

    나 아직도 너에게 기대어
    내 몸을 마구 비벼보고 싶은데
    혼자서 피가 뜨거워지는 일은
    얼마나 두렵고 쓸쓸한 일이냐

    女中生들이 몰래 칠한 립스틱처럼
    꽃잎을 받아먹은
    지구의 입술이 붉다

    그 어떤 고백도 맹세도 없이
    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는 날이 오느냐

    ~~~~~~~~~~~~~~~~~~~~~~~

    천진난만


    눈이 내려오신다고
    늙은 소나무 한 그루
    팔 벌리고 밤새 눈 받다가
    팔 하나 뚜둑, 부러졌다

    이까짓 것쯤이야
    눈이 내려오시는데, 뭘
    이까짓 것쯤이야

    ~~~~~~~~~~~~~~~~~~~~~~

    낙서


    군내 버스 때 절은 좌석 덮개 뒤에다
    나도 삐뚤삐뚤
    사인펜으로 쓰고 싶다

    애인 구함
    나이:25세
    성격:표현하기난감
    TEL:019-572-64XX
    많은 연락 바람
    기다릴게요


    ps 필요없음

    ~~~~~~~~~~~~~~~~~~~~~~~~~~~

    나의 희망


    학교 관사 옆 공터가 심심하지 않게
    거기에다 호박을 심자 했더니
    선생님,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심나요?
    깔깔대더니

    어느새 호미와 삽과 괭이가 모이고,
    비료가 한줌씩 오고,
    쇠똥거름도 한 리어카 달려왔지
    사실 이런 일이 생전 처음인 나는
    구덩이마다 호박씨 서너 개씩을 꼭꼭 심으며
    이것들이 땅속에서 부디 숨결을 열어주기를
    그리하여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주기를
    얼마나 조마조마 기다렸는지 몰라

    떡잎이 삼삼오오 오종종 돋은 날
    나는 고것들이 햇볕의 끈을 부디 놓치지 않기를
    빌었지, 덩굴손을 가지게 되면
    자기 아닌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손 뻗어 툭, 건드려보는 재미로 살아가기를
    수업 없는 빈 시간에 둘러보고 물을 주며
    또 빌고는 했지

    사는 게 뭐 별거 있겠어
    자꾸 물을 주다보면
    호박꽃은 필 거야
    그러면 어느날 아침 한때
    나, 호박꽃 주위에서 붕붕거리는 한 마리 벌이 될지도 몰라
    세상 속으로 뚫린 귀가 있다면
    두두둥 둥둥둥 두둥두 둥둥두둥
    호박이 익어가는 소리도 들을 거야 그래 그래, 삶의 뜨거운 날 다 지나간 뒤에
    우리 반 여학생들 궁뎅이 같은 놈이나
    드문드문 열렸으면 좋겠어

    ~~~~~~~~~~~~~~~~~~~~~~~

    사내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사랑이여
    나에게도 붉은 마음 한 조각 있습니다.
    첫눈 오시기 전에...
    첫눈 오시기 전에...

    ~~~~~~~~~~~~~~~~~~~~~~~~

    연애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

    또 하나의 길


    영대산 오르다가 길을 잃어버렸네
    씩씩한 남학생 두엇 앞장서겠다 하네
    그 뒤로 여학생들 나란히 따라가네
    나는 맨 뒤에서 따라가네

    아하, 없는 길이 생겨나네

    ~~~~~~~~~~~~~~~~~~~~~~~~~

    모악산을 오르며


    산을 오른다
    몇 해만인가 참으로 홀가분하게
    집 나오면 생활의 궁핍도 곤곤한 투쟁도 나의 것이 아닌듯 여겨져
    좀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면
    혹시 신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리나무숲을 헤치고 개암나무잎을 만져도 보며
    산을 오른다
    내가 위로 올라갈수록
    발갛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들이 하나 둘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보이고
    나느 그래서 아, 탄식이라도 내뱉고 싶지만
    이 큰 산에 비해 내가 너무 작은 것 같아
    아뭇 소리 않고 오른다
    산은 의로 오를수록 더 깊어지는데
    나는 저 아래 도시에서 한 뼘이라도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고
    얼마나 앝은 물가에서 첨벙대기만 했던가
    세상을 휘감고 흐르는 강물이 되지 못하고
    하염없이 바짓가랑이만 적셔왔던가
    산에 오르는 일을 한낱 사치로 여기던 내 어리석음과
    잘 보이지 않은 미래에 대해 애타던 조바심을
    솔방울로 힘껏 멸리 내던지고는
    한 발 두 발 오르다가 보면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 결국은 고생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저기까지만 더 가보자,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언뜻 결론 지어 보면서
    칡넝쿨을 만나면 칡넝쿨로 누워 흔들리면서
    산을 오른다
    내려갈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나는 나를 잊고 오르리라
    깊은 밤에 여우가 다가와 내게 꼬리를 툭 치고 지나간 일을
    잠시, 상상해 보기도 하리라.

    ~~~~~~~~~~~~~~~~~~~~~

    겨울 숲에서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밭 소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 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 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

    제비꽃 편지


    제비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기에
    화분에 담아 한번 키워보려고 했지요
    뿌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삽으로 떠다가
    물도 듬뿍 주고 창틀에 놓았지요
    그 가는 허리로 버티기 힘들었을까요
    세상이 무거워서요
    한 시간이 못되어 시드는 것이었지요
    나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어요
    시들 때는 시들 줄 알아야 꽃인 것이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그대로 두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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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작구 하챦은 것이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

    해와달


    이 고개 넘다가
    호랑이가 턱 버티고 서서
    팔뚝 하나 달라 하면
    팔뚝 하나 떼어 주어야지요

    저 고개 넘다가
    호랑이가 턱 버티고 서서
    발목 하나 달라 하면
    발목 하나 떼어 주어야지요

    하지만 두 눈만은 똑바로 뜨고
    오래 오래 바라보아야겠지요
    이 고개 넘으면
    또 저 고개
    해가 지고 나면
    어느새 달이 떠올라
    이 풍진 세상을 골고루 비추는 것을
    내 두 눈 짓물러지도록 바라보아야겠어요

    ~~~~~~~~~~~~~~~~~~~~~~~

    바람이 부는 까닭


    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천, 수만 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

    ~~~~~~~~~~~~~~~~~~~~~~~~

    분홍지우개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 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

    ♥그대...


    한 번은 만났고
    그 언제 어느 길목에서 만날 듯한
    내 사랑을
    그대라고 부른다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홀연히 떠나는 강물을
    들녂에도 앉지 못하고 떠다니는 눈송이를
    고향 등진 잡놈을 용서하는 밤 불빛을
    찬물 먹으며 바라보는 새벽 거리는
    그대라고 부른다
    지금은 반쪼가리 땅
    나의 별 나의 조국을
    그대라고 부른다
    이 세상을 이루는
    보잘것없어 소중한 모든 이름들을
    입 맞추며 쓰러지고 싶은
    나 자신까지를
    그대라고 부른다

    ~~~~~~~~~~~~~~~~~~~~~~

    철길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고 이렇게
    나란히 떠나가리서로 그리워하는 만큼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는 우리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리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날까지
    혼자 가는 길보다는둘이서 함께 가리

    ~~~~~~~~~~~~~~~~~~~~~~~


    어둠이 되어


    그대가 한밤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 주겠습니다

    ~~~~~~~~~~~~~~~~~~~~~~~~




    장수 가는 길 2차선 국도에
    녹색 군내버스가 한번 멈춰 설 때마다
    그 꽁무니 뒤따르던 것들이 일제히 부동자세로
    전원 앞으로 나란히, 하고 선다

    삶이란,
    뒤빠꾸해서 한 수 물릴 수도 없는 것이다.

    ~~~~~~~~~~~~~~~~~~~~~~~~

    화투놀이


    또 눈이 내리고, 어디 갈 데 없으니
    화투나 치자
    사철 한지붕 아래 찬밥 나눠 먹으며
    마른 수숫대만큼 키가 자란 노여움아, 슬픔의 새끼야
    우리집 아궁이 가득 상수리나무 장작 군불을 지펴두고
    붉고 푸른 잡꽃들 싸움 붙여보자
    우리가 뜨거운 이마 보이며 놀자
    새벽마다 더듬거리며 기어가던 밭두렁이며
    서울로 어디로 길 뜬 온갖 귀신들아
    타향객지 반납하고 모여라, 눈은 계속 내리고
    나라가 어둡다고 저리 왁자지껄 떠들며 내리고
    마침내 우리를 덮는 이불이 되고 막막한 사랑이 되나니
    귀 닳은 마흔여덟 장의 세월과
    군용 담요를 펼치고 앉은 우리는
    혼곤한 노동의 텃밭 가에서
    잠시 허리띠를 푸는 가난한 풀잎이자
    그리하여 사랑방은 숨죽인 풀밭이 되지만
    여섯 장을 깔고 다섯 장을 드는지
    여덟 장을 갈고 여섯 장을 드는지 모르는 민화투
    어찌하랴, 둥지 안의 까마귀알처럼 살아왔으니
    검은 날개라도 펴고 놀아나 보자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청무우를 씹으며
    홍싸리와 벚꽃과 국화 몇 장씩 움켜잡고
    눈 내리는 겨울밤에, 서로 싸움 붙이자
    듣자면, 하 수상하다는 이 시절에
    똥껍데기로 똥광을 먹기도 하고

    ~~~~~~~~~~~~~~~~~~~~~~~

    석 류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긁는 것이었어요
    새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 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

    늣여름 저녁



    마당에 풋감 하나가 쿵, 하고 떨어진다

    쿵, 하는 그 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탕아가 때늦게 제 이마를 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낯선 지구의 산기슭에 별똥별이나 번갯불이
    머리를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한데,
    어쨋거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거니 했는데

    문득 그 소리를 혼자 서서 들어야 하는,
    감을 쥐고 있다가 어떻게 그만 떨어뜨려버린
    감나무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짠해졌다

    나는 방문을 열고 감나무 아래로 걸어가서 풋감,
    먹지도 못하고, 다시 어느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쿵, 하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할 으깨진 풋감을 주워 들고
    기분 좋게 담 밖으로 멀리 내쏘아 버릴까 보다,
    이렇게 혼자 생각하다가 보았던 것이다
    감나무가 구부정한 팔을 뻗어 이리저리 손을 내두르면서
    풋감을 찾고 있는 것을

    날은 점점 어두워오고,
    눈이 침침해진 감나무는 내 손을 한없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

    느티나무 여자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을 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시간을 다 써 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자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는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

    세수를 하며


    오늘 아침 수도 꼭지에서 터져 나와
    물구나무 서서 대야 속으로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들이 맑다
    밤새도록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는가
    錦江으로부터 왔으리라
    거기 아직도 사람이 사는지
    거기 아직도 붉은 꽃들이 피는지 안 피는지
    씩씩한 물아
    지금은 누구의 밥을 위해
    어느 남비 속에서 몸을 또 바치는가
    나의 곤한 삶이 물을 더럽힌다
    가엾은 물 내가 쏟아 버린다
    그래 험한 날들이 거듭 거듭 닥쳐 오리라

    ~~~~~~~~~~~~~~~~~~~~~~~~

    열심히 산다는 것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 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하고
    백 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 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 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일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

    마흔살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쓰레기 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물 한 동이 퍼 담을 수 없는 몸, 그 무게 불린 일


    병산서원 만대루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와이셔츠 단추 다섯 개를 풀자,
    곧바로 반성된다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바람이 겨드랑이 털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2001

    ~~~~~~~~~~~~~~~~~~~~~~~~~~

    붕 어


    또록또록
    붕어는 눈망울을 굴리며
    물풀 속에 먹을 것이 있나, 없나 살피려고
    아가미를 벌리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켜 보려고
    우선
    등지느러미를 활짝 펼쳐 세웠다
    그 다음에는 꼬리지느러미에 있는 힘을 다 모아 좌우로 힘껏 물을 튕기려고
    기울지 않도록 몸을 곧추 가누었다
    그러자
    물 속 바위에 마구 비벼대고 싶은 비늘이 눈부셨다
    월척의 품위를 염두에 두고 유유히, 헤엄을 치기만 하면 된다


    아, 안 된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럴 수가 없어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런 흔적을 남기려고 살았던 것은 아니야
    붕어는 퍼덕거리며 강물을 거슬러올라 갈 때 꼬리 뒤에 남는 물살의
    그 생생한 흔적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야, 그놈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네
    슬픔도 모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다씩 던지고는 갔다

    ~~~~~~~~~~~~~~~~~~~~~~~~~

    산에 대하여



    산은 저 홀로 푸르러지지 않는다네
    한 산이 그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산에게 자기를 넘기면
    그 빛깔 흐려진 산이 또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산에게 자기를 넘긴다네

    산은 또한 저 홀로 멀리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 산이 한 산을 받아 앞에 선 산에게 짙어진 빛깔 넘기면
    그 산은 또 그 앞에 선 산에게 더 짙어진 빛깔 넘기고
    그 빛깔 넘겨받은 산은 그 앞에 선 산에게 더더욱 짙어진 빛깔 넘긴다네

    소나무 푸른 것은
    우리 동네 앞산
    우리 동네 앞산은
    소쩍새를 키운다네

    ~~~~~~~~~~~~~~~~~~~~~~~~

    저물 무렵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애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완주군 동상면 들어가는 입구에
    저 밤나무숲이 무성하게 풀어 놓은
    밤꽃냄새
    퍽 징하네

    살아보려고 기를 쓰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남의 코를 찌르는가 보네
    인간도
    가장 오래 헤맨 자의 발바닥이
    가장 독한 냄새를 풍기는 법

    나는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여태 무슨 냄새를 풍기고 있었나
    단단한 밤 한 톨 끝내 맺지 못하더라도
    저물어 하산하기 전까지는
    독해져야겠네 자네한테 말고
    오늘 나 자신한테 말이야

    ~~~~~~~~~~~~~~~~~~~~~

    우물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
    거리지 않고

    말랑 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 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날은 구름이 머문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퀴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철쭉꽃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열일곱 살 숨가쁜 첫사랑을 놓치고 주저앉아서
    저 혼자 징징 울다 지쳐 잠든 밤도 아닌데
    회초리로도 다스리지 못하고
    눈물로도 못 고치는 병이 깊어서
    지리산 세석평전
    철쭉꽃이 먼저 점령했습니다

    어서 오라고
    함께 이 거친 산을 넘자고
    그대, 눈 속에 푹푹 빠지던 허벅지 높이만큼
    그대, 조국에 입 맞추던 입술의 뜨거움만큼

    ~~~~~~~~~~~~~~~~~~~~~~~~~~~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빈 들판을 떠돌다 밤이면 눕는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긴 긴 날을 혼자 서서 울던
    풀잎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밫 하나 없는
    가난한 어둠이었는지도 몰라
    그대를 만나기 전에

    그대를 만나기 전에 나는
    바람도 풀잎도 어둠도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몰라...

    ~~~~~~~~~~~~~~~~~~

    눈물


    빈땅에 떨어지는 한 톨의 씨앗
    먼데서누가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보이지 않는 비 한밤 내 내리고
    목련꽃은 젖은 옷 벗어두고 하늘로 간다.
    그대의 녹은 발소리도 하늘로 간다.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이름으로
    밤이면 별이 되는 하얀 꽃
    먼 마을 쥐똥 같은 불빛
    다 떠나간 빈터에는
    하모니카 소리 눈물처럼 툭툭 떨어지고 있다.

    ~~~~~~~~~~~~~~~~~~~~~~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냉이꽃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보일 듯 보일 듯 냉이꽃이 피었다
    너하고 둘이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냉이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꽃이 피었다

    ~~~~~~~~~~~~~~~~~~~~

    시인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 본다

    ~~~~~~~~~~~~~~~~~~~

    낙동강(洛東江)

    저물녘 나는 洛東江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木船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

    다시 낙동강


    아우야
    우리가 흰 모래밭 사금파리 반짝이는 소년이었을 때
    앞서거니 뒷서거니 땅으로만 기어 흐르던 낙동강이
    오늘은 저무는 경상도 하늘 한 끝을 적시며 흐르는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로
    강물이 하나의 회초리라는 것을
    우리 어린 종아리에 감기던 아버지 싸리나무 푸른 매
    강물도 河回 부근에서 들판의 종아리를 때리며 가는구나
    아우야
    아버지 수십 년 삽질로도 퍼내지 못한 낙동강이
    아직 철들지 않은 물고기들 하류로 풀어 보내며
    조심하여라 조심하여라 웅얼대는 소리 듣느냐
    아버지 등줄기에 흐르던 강물 보았느냐
    그 속을 거슬러올라 헤엄치던 어린날 우리는
    그렇지 한 마리씩의 빛나는 은어였을 것이다
    먼 훗날
    다시 낙동강에 나갈 때 아우야
    강물이 스스로 깊어진 만큼 우리도
    나이가 부끄럽지 않고 서글프지 않은 물줄기 이루었을까
    저무는 강가에 아버지가 되어
    푸른 매가 되어 돌아와 설 수 있을까
    아우야

    ~~~~~~~~~~~~~~~~~~~~~

    나그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

    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저 벽에 걸린 바지는
    국방색이다
    단단한 청춘의 허벅지가 쑥 빠져나갔다
    나는 후줄그레한 저 바지를 볼 때마다
    우리들의 뒷골목을 돌아가야 빠꼼하게 간판불을 달고 있는
    여인숙을 생각한다
    그리운 냄새가 킁킁, 날 것도 같다
    휴전선 이남에서 국방색 바지 입고 좆뺑이친 사내들 중에
    50년대 이후 거기 누워 옆방에서
    힘쓰는 소리, 욕지거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국방색 바지가 걸려 있는 모든 방은
    그래서 붉은 유곽이며
    우리는 유곽이 키운 자식들이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 훌러덩 벗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나라에서
    그 바지 속에다 팽팽한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헌 자전거 타고 연대본부에 출근하던 나는
    방위병이었다, 그때
    군용트럭 위에서 여자만 보면 주먹감자를 먹이던
    현역들의 성욕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국방색 바지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짬밥을 퍼먹을 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어이 물방위, 하고 불러서는 차렷, 열중쉬어 시키던
    한참이나 어린 상병의 낯짝에 침 한번 뱉지 못했던 것도
    계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국방색 바지를 그보다 먼저 벗게 되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군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 하셨지만
    나는 내 아들에게는 다시는 입히지 않을
    녹슨 못대가리에 달랑 매달려 있는
    치욕의 빈 껍데기 같은
    저 국방색 바지.

    ~~~~~~~~~~~~~~~~~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

    사랑은 싸우는 것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 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 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 것을

    ~~~~~~~~~~~~~~~~~~~~

    연애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 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일생 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 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래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놀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 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매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때로는 그늘의 평수가 좁아서
    때로는 그늘의 두께가 얇아서
    때로는 그늘의 무게가 턱없이 가벼워서
    저물녘이면 어깨부터 캄캄하게 어두워지던 아버지를
    나무,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눈 내려 세상이 적막해진다 해서 나무가
    그늘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쓰러지지 않는, 어떻게든 기립 자세로 눈을 맞으려는

    저 나무가
    어느 아침에는 제일 먼저 몸 흔들어 훌훌 눈을 털고
    땅 위에 태연히 일획을 긋는 것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터

    ~~~~~~~~~~~~~~~~~~~~~~~~

    염소의 저녁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번 더 힘을 준다
    그러나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으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

    겨울 아침


    눈 위에 콕콕 찍어놓은 새 발자국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간 새 발자국
    한 글자도 자기 이름을 남겨두지 않은 새 발자국

    없어졌다, 한순간에
    새는 간명하게 자신을 정리했다

    내가 질질 끌고 온 긴 발자국을 보았다
    엉킨, 검은 호스 같았다

    날아 오르지 못하고,
    나는 두리번거렸다

    ~~~~~~~~~~~~~~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 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출처 : 마음 고인 샘  |  글쓴이 : 思岡 안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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