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창제와 속리산 복천암은 관계가 있다.
세종대왕 당시 최고의 학자는 신미대사였다. 신미대사는 사서삼경 뿐만 아니라 불경, 노장철학,
범어까지 달통하고 있었다. 그 당시 범어를 아는 분은 신미대사 혼자뿐으로 세종대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한글을 창제에 참여하였으며 불경을 한글로 언해하였다. 그 공으로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子)라는 상상할수 없는 존자 시호를 받았으며, 문종 당시에는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승양조도 체용일여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로 고쳤다 .
또한 세조와 각별한 사이로 天順 8년 2월 28일에 신숙주 이하 많은 신하를 대동하고 청주서 2박을
하고 장재리를 거쳐 말띠재를 넘어 큰소나무 아래까지 당도하였다 바로 길옆에는 2등변 3각형의
아름드리 낙낙장송이 가지를 길위에 드리우고 있어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즉석에서 정2품의
벼슬을 주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2품송 이라 지금도 부르고 있다..
자신의 심신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법열을 느꼈다 .
복천사 법회를 마치고 아쉽게 떠날무렵 신미대사는 세조대왕에게 청원을 하기를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부처님(석가여래)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오랜세월로 심히
퇴락하여 민망한 지경에 있으니 대왕께서 이보궁을 중수하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간청하자 세조는 쾌히 승낙하여 이에 바로 학열(學悅)스님을 상원사로 보내어 중수를
이 어첩은 상원사 중창시 나온 원본을 복사한 사본이다.
세조 당시 한글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두루말이 어첩을 펴니 약 5m나 되려나....
세조 당시에도 싸인(수절:手節)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절을 건립하는데 쌀 몇 가마, 돈 몇 량을 시주하였다는 사인 표시가 있다.
이것이 문종 왕비와 세자의 관인이다.
복천암 사적기(福泉庵事蹟記) "세종은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얼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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