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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 수난사

金 敬 峯 2011. 2. 4. 20:36

한글창제 수난사

 

 

오늘은 10월9일 562돌 한글날이다.

 

오늘은 한글날 제정의 뒷사연들에 대해 이야기을 해보고자 한다.

 

한글날이 오늘날과 같이 10월 9일로 정해지게 된 데에도 곡절이 많았다. 세종은 한글을 만드는 작업을 은밀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실록에도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그로인해 수많은 학자들역시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은 실록에 전혀 보이지 않다가 1443년(세종 25) 12월 조의 맨 끝에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그냥 ‘이번 달에 왕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3년 뒤인 1446년(세종 28) 9월 조의 맨 끝에 역시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이번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는 기록때문에 의견들이 분분한 상태다.

 

왕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은 날짜를 정확히 명시해서 기록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은 실록에 전혀 보이지 않다가 중간과정과 마지막 완성으로만 끝이 기록되어 있는가라는 의문들에 빠진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답은 쉬운것에 있었다. 정치적 외세와 자국내 정치적 이유로 훈민정음 창제는 지극희 기밀에 부쳐진 역사였다.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가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최만리를 대표로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모두 일곱명의 원로학자들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한글 창제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는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등 모두 일곱사람이다.

반대상소를 낸 학자들이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로 소장파 학자에 속한다. 젊은 학자들에게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빠지자 자신들의 작아지는 입지에 발끈한 것이였다. 

 

곰곰희 훈민정음에 대한 이 양반님네들의 당시 생각들을 훔쳐보면 2008년 지금의 현실과 다를바 없는 모습들이 보인다. 명나라의 눈치을 살피는 권력치들 자국의 문화적 정치적 발전을 쾌하기전에 명나라의 눈치와 정치적 입지때문에 훈민정음을 우숩게 보며 언문(쌍놈들의 글자)이라 부르며 한글반포에 무수한 반대 친명세력은 지금의 나라의 안보와 애국심을 내세워 친일과 친미로 위장된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생각들을 해본다.

 

오늘날 자칭 우파들은 자신들어 사용하고 있는 말이 무언지를 망각한 채, 한글 사용하지 말고 영어를 강화하자라는 모습만 보더라도 이을 극명하게 잘보여주고 있다라고 본다.

 

또한 윗글에서 이야기한 훈민창제의 비밀에 부친 작업덕분에 학자들간의 오해을 낳게되기도 한다.

 

1446년 9월 조의 맨 끝에 역시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이번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지만 그후 1443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거기에 문제점이 많아서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3년 동안 해서 1446년 9월에 한글을 제대로 완성했다는 식으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그로인해 1443년 12월보다는 1446년 9월을, 한글이 만들어진 시기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록에 월 며칠인지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9월 그믐날로 가정하고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방종현 선생이 실록의 1446년 9월 조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라는 책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방종현 선생은 실록의 1446년 9월 조 기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고가 완성된 것을 세종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당시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책이 간행되어 신하들에게 하사되기까지는 통상 몇 달 이상 걸리며, 따라서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로인해 1446년 9월 조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라는 책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하며, 그동안 학자들의 의견에 못을 박았다.

 

그러나 당시 친일 사학자들의 주류 학자들은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으니 이 때를 한글날로 정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을 하면서 10월 29일이 한글날로 계속 유지시켜버린다.

 

당시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어떤 공식 행사를 열었다는 기록도 없다. 한글날이 10월 29일로 정해졌던 것은 학자들의 사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웃지 못할 사건이였지만 주류 학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을 생각해서 이 촌극을 유지시킬 원하였다.

 

그러다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본(현국보70호)이 발견되자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은 입지을 상실하게 된다.

 

방종현 선생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정인지의 서문을 보면 '세종 28년 9월 상순’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다. 역시 정확한 날짜는 애초에 9월 그믐으로 잡았던 것에서 20일 정도 앞당길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학자들의 주장은 사라지고 `10월 29일에서 20일을 앞당겨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비단 한글날의 슬픈 역사는 또 있다.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평일로 전환한건 노태우때 효율을 올려야지, 오래 나와있는게 장땡이냐라는 논리로 푸대을 당하기도 했다.

 

 

노태우때 평일로 전환된 한글날의 그해에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맹 퇴치에 힘쓴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종대왕상'을 만들어지는 아이러니는 우리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적 문화적 유산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달빛소녀/ 이승환(Faet.정성미) (장금이의꿈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