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들 교육자료

인물 이야기 2. 백산 안희제

金 敬 峯 2014. 11. 3. 23:11

백산 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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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安熙濟, 1885년 8월 4일 ~ 1943년 8월 3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아호는 백산(白山)이다.

생애[편집]

경상남도 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안희제는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 모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를 설립한 뒤 실업가로서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의령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장학회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했으며,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대종교 교인이었던 그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벌였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시간 뒤에 사망했다. 이 당시 헤이룽장 성 액하감옥에서의 일제의 고문은 혹심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로 인해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1명 중 10명이 살아나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 사망한 열명의 대종교인을 가리키는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향인 의령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부산에는 백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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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에 養正義塾(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 서양의 선진 학문을 접목하여 갔다. 이 때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을사륵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한편에서는 즉각적 항일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적인 구상으로 각계각층에서 구국계몽운동을 펼쳐가던 당시 민족사회의 분위기와 그에 대한 선생의 자각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龜浦(구포)에 龜明學校(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宜新學校(의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徐相日(서상일)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大東靑年黨(대동청년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白山商會(백산상회)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己未育英會(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독립운동가를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요, 민족언론의 선구자이면서 독립투사였지만 즐겨 카이제르 콧수염을 기르고 다니며 언제나 멋을 아는 신사였다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며 창의성이 풍부했고 말이 나오면 청산유수 같이 좌담에 능했다고 한다. 27세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였다. 30세에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본금을 마련하였으며, 기미 육영회를 조직하고 1926년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다. 1911년 러시아 망명 등을 거쳐 1914년 귀국한다. 망명 중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에서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해산물, 농산물을 취급하는 무역상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중국 대륙 등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연결하는 국내 거점이었다. 안희제는 국내에는 서울, 대구, 원산 등 18개소, 중국에는 안동, 봉천, 길림 등 3개소에 백산상회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만들어 임정에 독립운동을 보냈다. 임정에 어느 정도의 자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자금을 주고받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로 자금조달 자체가 극비리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다만 안희제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이 구술로 전해 전해지고 있다.

백산은 이른바 '임정36호'의 국내 책임자로 미국 중국의 첩보조직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셨으며, 임정 운영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한다. 백산상회가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을 임정에 보내, 상회는 항상 적자 상태였다. 국내 갑부나 주요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한 돈을 임정으로 전달하는 일도 도맡았다. 변장술에 능하여 족적이 항상 신비로워 총독부에서도 그를 정체불명의 인물로 보았다. 백산은 때때로 금테안경에 일본 옷을 입고 다녔으며 단장을 짚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그는 어디를 가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고급호텔에 투숙함으로써 일경의 시선을 따돌렸다. 안희제가 경주 갑부 최준 집에 강도 복면을 하고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최준에게 여러 차례 헌금을 받아 면목이 없고, 거절당할까 두려워 강도로 위장했으나 결국 안희제 본인임을 밝힌 뒤 약속어음을 받아나갔다

최준은 자의로, 때로는 안백산의 강권에 의한 타의로 엄청난 액수의 독립자금을 내놓으면서 그 돈이 그대로 모두 상해 임시정부로 전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백산도 생활을 해야 하고, 또 상해로 오가는 여비며 활동비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해방 뒤 김구와의 만남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돈과 김구가 받은 돈이 일치한 것에 감격, 조금이나마 안희제를 의심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경교장 남쪽으로 난 창을 열고 안백산이 묻힌 경남 의령을 향해 절을 하며 대성통곡했다고 전해진다. 김구 선생도 함께 울었다한다.

신한청년단원이었던 장덕수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안희제는 1919년 2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여비 일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은 민초들의 십시일반에서부터 거부들의 쾌척, 해외동포들의 모금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일제시대 자금 조달은 목숨을 건 행위였으나 많은 독립운동가, 재산가, 민초들이 기꺼이 큰돈을 내놓거나 조달활동을 펼치며 독립운동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우당 이회영((1867~1932)은 현재 8백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다 처분해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쳤다.

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2년 독립운동 세력 규합과 주만 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향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1월 17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셨다. 우당의 나이 환갑이 지난 66세였다.

김용환(1887∼1946)은 대를 이어 내려오던 전답 500여 마지기와 임야 200여 마지기등 18만평 가까운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1911년 거액의 독립자금을 만주에 전하다 세차례나 체포됐으며 1922년에는 비밀결사단체인 의용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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