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들 교육자료

인물 이야기 1, 최준

金 敬 峯 2014. 11. 3. 21:48

최 준

최준(崔浚, 1884년 ~ 1970년)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 사회운동가, 교육인이다. 호는 문파(汶坡). 본관은 경주,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경주 최부잣집' 12대로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져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투자하였고, 일제강점기때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 일제의 치열한 감시 속에서 임정 등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의 설립자이다.

생애[편집]

경주 지방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朴尙鎭)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피체되기도 했던 그는 3·1 운동 이후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여만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

1918년 봄 인촌 김성수는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1]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1]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김성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1]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닭았다 한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사후[편집]

1983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가족[편집]

전재산을 처분하여 최부잣집이 사라졌다고 알려졌으나 그의 후손들은 현존해 있다.

종손은 최염으로 고등학교 졸업후 출향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2] 성균관 고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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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12대, 400년 부자의 비밀

- 경주 최부자

최준 사진

지금까지 이런 부자는 없었다!

12대(代), 400년간 지속된 부(富)!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경주 최 부자,

그 부(富)의 비밀을 파헤친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사진>

왜 최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명사인가?

경주 교동에 위치한 최 부잣집에는 독특한 철학이 있다.

흉년이 되면 최부잣집에서는 자신들의 곳간을 헐어 양식을 나눠준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하려는 것.

흉년은 부자들에게는 농토를 싼 값에 구입하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지만 최부잣집에서는 흉년에 절대 땅을 사지 않는다.

숙박시설이 여의치 않은 조선시대. 최부잣집은 수 많은 과객들의 쉼터였다. 어떤 손님이라도 극진히 대접. 노잣돈과 하루 양식 챙겨 보냈다.

특권층의 의무를 넘어, 사회 선을 실현했던 경주 최부자. 최부잣집은 한국 역사상 유례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명사로 손꼽히게 되었다.

최부자, 그들은 누구인가!

경주 최부잣집의 유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경주 최부잣집의 파시조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적들에게 포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6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감행. 아군이 수세에 몰렸지만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순국한다. 후에 최진립은 정무공의 시호를 받고 병조판서에 추증. 무신으로서는 드물게 용산서원에 모셔진다.

최부자, 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

양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 땅. 최부잣집에서는 관개시설을 확보. 이로 인해 새로운 농사법인 이앙법의 도입이 가능해지고, 투입되는 노동력을 크게 절감하게 된다. 또한 성과급 제도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인다.

혁신적인 신농법의 도입. 지주와 소작인 모두가 함께 잘살고자 하는 상생의 원리! 이것이 경주 최부자의 부(富)의 비법이었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최씨 문중의 장손인 최준을 고민에 빠진다. 이에 백산 안희제 선생이 최씨 문중을 방문. 함께 백산상회를 운영해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낼 것을 제의한다.

최준은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 일제의 치열한 감시 속에서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동생 최완을 대동청년단의 비밀요원으로 보낸다. 해방 후 김구는 최준을 경교장으로 초대, 최준의 노고를 치하한다.

영원한 부자로 남는 법-기쁘게 버려라!

해방 후 인재양성에 뜻을 품게 된 최준. 그는 400여 년 간 모아온 전 재산을 영남대학의 전신인 계림대와 대구대에 기부한다. 세계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주 최부자의 이야기. 모든 재산을 버렸지만, 경주 최부잣집의 이름만큼은 영원히 조선 최고의 부자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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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리는 열정에 불을 당기는 심지다

'경주 최부자'로 잘 알려진 최준(崔浚)이 백산 무역을 경영할 때의 일이다. 백산 무역은 1925년 독립운동가 안희제(安熙濟)와 최준이 함께 설립한 회사로 당시 서울을 비롯하여 원산·대구·안동현·봉천 등지에 지점을 둔 국내 최대 규모의 무역회사였다. 설립 당시 주주는 1백80명에 달하였으며, 안희제가 2천5백60주로 가장 많았고 최준이 1천8백 주를 출자하였다. 따라서 회사 이름도 '백산(白山)'이란 안희제의 호를 따서 지었다. 그러나 안희제는 취체역(주식회사의 '이사')을 맡았고, 최준이 사장겸 지배인 역할을 하였다.

백산 무역의 겉모습은 무역회사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독립군 자금을 공급해주는 하나의 위장회사였다. 따라서 국내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무역회사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늘 적자를 면치 못했다. 벌어들이는 돈이 안희제를 통하여 상해와 만주에 독립군 자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주주들은 계속 자본을 투입하여 적자를 메꾸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주주들 역시 자금을 투자하는 형식으로 알게 모르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은 많이 벌어들이는데 늘 적자로 허덕이는 백산 무역에 대하여 당시 일본인들의 눈은 가시와도 같았다. 회사 경영을 책임진 사장 최준에게 꽂히는 일본 순사들의 눈꼬리도 늘 낚시바늘처럼 휘어져 있었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데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 순사들이 의심을 갖기 시작할 때 백산 무역은 진짜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벌어들이는 돈보다 독립군 자금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많은 데다 주주들이 적자를 메워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백산 무역 사장에 취임할 당시 최준은 사재를 털어 선뜻 1백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소문난 '경주 최부자'라 하더라도 날로 악화되는 부채를 갚기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백산 무역의 부채는 1백30여만 원이었다.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이렇게 빚이 늘어난 것은 지점망을 통해 보낸 물건값을 고스란히 독립군 자금으로 빼돌렸기 때문이었다.

최준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백산 무역이 문을 닫게 된다면 독립군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막히게 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다 백산 무역의 부도 위기설이 떠돌자, 일본 순사들이 부쩍 의심을 하고 은밀한 뒷조사까지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일단은 부도를 내고 보는 거야"

최준은 우선 뒷조사를 하는 일본 순사들부터 따돌리고 싶었다.

백산 무역이 부도를 내자, 거래은행인 식산은행과 부산합동은행은 최준의 개인 재산을 압류하였다. 사장 혼자서 백산 무역의 부채를 고스란히 떠맡게 된 것이었다. 일본은행인 식산은행의 개입으로 일본 순사들도 더 이상 뒷조사를 하지는 않게 되었다.

당시 식산은행은 의식적으로 최준에에 개인보증을 요구함으로써,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인심 좋은 경주 최부자'로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한 그에게 반강제로라도 관직을 주어 민심을 수습해보려 했던 것이었다.

최준은 이러한 기회를 역이용하기로 하였다. 양동작전을 쓰려는 것이었다. 일본은행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면서, 독립군 자금의 창구인 백산 무역도 살려내자는 작전이었다.

최준은 식산은행 총재를 찾아갔다.

"어차피 내 재산을 압류 당한 상태이니, 그 정도면 충분한 담보가 될 거요. 백산 무역을 살려내야겠소. 돈을 좀 빌려주시오".

최준의 말에 식산은행 총재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식산은행 총재는 당시 조선총독의 왼팔격이었다. 사실은 총독의 명을 받고 최준을 회유하기 위하여 개인 재산을 압류해놓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대의 발목을 잡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뒤, 미리 장치해 놓은 덫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 덫을 향해 생쥐가 스스로 걸어온 격이니 회심의 미소가 아니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좋소. 우리가 백산 무역의 빚을 탕감해 드리겠소.

식산은행 총재는 선뜻 70여만 원을 최준에게 대출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식산은행 총재는 최준을 만나 긴히 부탁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무슨 부탁입니까?"

"총독 각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중추원참의를 맡아주시오."

"나는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최준은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하, 그렇다면 총독부 문교부장은 어떻습니까?

나는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교육에 관해서는 더더욱 모르지요.

최준은 그러나 삭산은행으로부터 거액을 대출 받은 입장이라 끝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그는 결국 동생 최윤(崔潤)에게 중추원참의 자리를 떠넘겼다.

독립군 자금을 대주는 최준의 입장에서 볼 때 식산은행 총재는 적군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의리를 지킬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최준은 식산은행 총재의 신변을 염려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들의 비난하는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인 총재를 경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융숭하게 대접을 한 후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형을 대신하여 중추원참의를 지낸 최윤은 해방 직후 민족 반역자로 몰려 반민특위(反民特委)에 구속되었다. 최준은 자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족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 동생을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사정을 알게 된 반민특위에서는 재판에 들어가기 직전에 정상참작으로 최윤을 석방시켰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경주 최부자집은 오래 전부터 지켜온 철칙이 있었다. 즉,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 시장에 가서도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재산이 만석지기 이상이 될 때는 그 남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칙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 배려의 마음속에 의리가 숨어 있다. 의리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심지와도 같다. 즉 의리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자리잡은 열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심지에 불이 당겨질 때 비로소 아름다운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다.

[출처] 경주 최부자 최준 일화~|작성자 경주교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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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부자집에서 외동 아들의 배필을 구하는데, 그 집 재산을 잘 지키고 키워낼 수 있는 며느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험을 봐서 뽑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명이 겨우 보름 정도 먹을 수 있는 쌀을 주고 계집 종 한명을 딸려서 방 한칸짜리 조그만 집에서 석달을 버티면 며느리로 삼겠다는 것이다. TV 코메디 재료로도 가끔 채용된 적이 있다. 언젠가 김미화가 거기 출연한 적도 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시험에 응시한 젊은 처녀들은 하나둘 두 손을 들고 나온다. 응시자들은 어떻게든 먹는 양을 줄여서 조금씩 먹으며 버티는데, 배고픔을 이겨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면 극도의 배고픔에 고생을 하게 되고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두 손 들고 나온다.

그러던 차에 어느 가난한 집 딸이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선다. 쌀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을 하더니 계집종에게 밥을 넉넉히 해서 먹자고 시킨다. 둘이 배불리 밥을 먹고 나니, 이제 일하러 나가자고, 주변에서 둘이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자고 나선다. 시험평가관인 이 계집종은 본가 주인에게 긴급히 소식을 전한다. 이번에는 가망성 있는 여자가 왔다고.

과연 석달 동안 열심히 이집 저집의 이런 저런 일을 해가면서 품삯으로 곡식을 받기도 하고 반찬거리를 받기도 하여 이 응시생과 평가관은 배고픔 없이 3개월을 살았고, 처음 지급받은 쌀보다 조금 더 많은 쌀을 가지고 부자집에 들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음을 보고하고 그 집 살림을 물려받았다는 이야기이다.

너무 유명하여 회원님들 중에 이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거의 없으리라 본다. 이것이 바로 경제와 복지의 기본적인 답이다. 아무리 부자집이라고 해도 수입이 지출보다 크면 점점 가난해지게 되어 있다. 이 간단한 원리를 알고 지키면 부를 지키고 키울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를 한다. 조선일보와 그 계열사에서 발행하는 여러 매체들에 많이 나왔다.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경주 최부자집 가훈"이라고 검색을 하면, 무수한 카페며 블로그에 그것이 올라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주 최부자집 가훈에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까마귀는 실제로 이게 진짜 중요한 요인이였다고 본다.

1.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보유하지 말라

3. 흉년기에 땅을 늘리지 말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1~6번은 명시적인데, 글로 쓰여있지 않은 0번이 있다. 그 0번은 바로 "땅을 팔지 말라"라든지 "생산의 근본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본다. 경주 최부자집 가훈의 1조 앞의 0조는 바로 그것이다. "땅을 팔지 말라!" 몇천 마지기의 땅을 가진 부자라고 해도 그것을 조금씩 팔아먹다 보면, 나중에는 우스운 꼴로 전락하는 일이 많다. 인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그 땅을 나눠줬어도 마찬가지다.

최부자집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땅을 조금씩 나눠줬다면, 어땠을까? 12대 300년은 커녕 2대 30년도 되기 전에 갑부집에서 부농으로, 부농에서 중농으로, 중농에서 소농으로 뚝뚝 떨어졌을 것이다. 최부자집에 12대 300년을 유지한 것은 땅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력을 훼손하지 않고 지켰기에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1번부터 6번까지의 가훈도 잘 뜯어보자.

1.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 높은 벼슬로 올라가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여기저기 뇌물도 바쳐야 한다. 그러러면 땅을 팔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을 보면 답이 보인다. 또한, 높은 벼슬을 하게 되면 본가의 농사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 까딱하면 생산력에 훼손이 온다. 본업을 잘 지키라는 뜻이다. 높은 벼슬에 오르면 자칫 큰 책임을 지고 벼슬을 잃게 되는 수가 있는데, 자칫 사화에 연루되어 집안이 큰 화를 입게 될 수도 있다. 재산을 몰수당하는 것은 기본이고 생산력의 원천인 땅을 빼앗기게 될 수도 있다.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보유하지 말라

 → 재산이 만석을 넘게 되면 관리가 힘들어지고 일 안 하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니 만석을 잘 유지하고 농사를 잘 지어서 살림을 유지하도록 하라.

3. 흉년기에 땅을 늘리지 말라

 → 쉽게 얻은 재산은 쉽게 쓰게 된다. 싼 값에 산 땅이 나중에 값이 오르면 그것을 팔아서 쓰고 싶은 생각이 쉽게 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일 안 하고 놀고 먹을 생각을 하게 된다.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이미지 관리, 인맥관리, 잉여재산 투자, 잉여재산으로 가족들이 사치하고 방종하는 것 보다 남에게 쓰는 게 낫다.

5.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이미지관리, 인맥관리, 나아가 주변 안정이다. 주변에 도둑과 강도가 생기면 결국 재산과 가족의 안전이 손상될 수 있다. 이러면서도 땅을 떼어 주라는 말은 없다.

6.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 이것이 바로 며느리 뽑는 이야기와 같은 취지이다. 생산을 등한히 하고 좋은 옷 입고 노는 쪽으로 빠지면, 집안 살림은 기울어진다. 일하고 생산하는 것을 그치지 않도록 그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명옷 입고 일하는 정신을 잃지 말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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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집 육훈과 육연 역사

1600년대 초에서부터 1900년대 중반 일제 강점기까지 무려 12대를 거치며 400년 가까이 만석꾼의 부자 지위를 유지해 왔던 경주 최부자 집은 육훈과 육연을 지켰다.

최부자집의 6훈(訓) :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

1,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부(富)와 귀(貴)를 동시에 소유하지 말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3, 찾아오는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 (남의 불행으로 자산을 늘리지 말라.)

5, 흉년에는 곡식을 풀어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간은 무명옷을 입도록 할 것이며, 보릿고개 때는 집안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말 것이며, 은수저도 사용하지 말라.

최부자집의 6연(然) : 자신을 다스리는 지침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며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득의담연(得意淡然) :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패했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Mirabeau's dictum: "Be bold, still be bold; always be bold."

나는 막시무스에게서 극기심과 확고한 목적 의식, 언제나, 건강이 나쁜 경우나 불행한 일을 당한 경우에도, 쾌활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권

[출처] 최부자집 육훈과 육연|작성자 en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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