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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힘

金 敬 峯 2007. 8. 2. 15:37

 # 한국인의 힘

 


 

 

1. 남이 하면 나도 한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격언 가운데 이처럼 한국인들의 속내를 잘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배가 아프지 않으려면 상대에게 바짝 따라붙거나 그를 넘어서야 한다. 외제 명품을 사지 못하면 짝퉁이라도 가져야 마음이 편해진다.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단지마다 새 아파트에서 뜯어낸 벽돌과 장판, 벽지들로 산을 이룬다. 어느 집에서 고친다고 나서면 너나없이 똑같이 해달라며 나서는 통에 이내 단지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한다. 성형외과 전문의 진세훈씨는 많은 고객들이 자신의 얼굴 특성은 고려치 않고 대뜸 친구가 했는데~ 나도 누구처럼 해주세요~라고 말한다며 최소한 남과 같거나 더 나아져야 행복해한다고 말했다. 남이 하면 나도 하겠다고 달려드는 우리의 의식 속에는 특유의 평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주어진 여건, 타고난 능력이 달라도 누구나 균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에 깊게 내재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하향평준화됐다는 논란속에서 30여년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평등 하면 누구나 용인하는 풍토이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년 동안 경기침체로 기업 경쟁력의 추락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져도 평등은 시장경제의 핵심논리인 경쟁에 우선하는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평등주의가 빗나가 남을 끌어내려 자신에게 맞추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함과 투서 등이 대표적이다. 사법당국에는 지난해 1년 동안 무고가 9,253건이 접수돼 3,509건이나 기소됐다. 하루에 평균 30건에 가까운 무고사범이 발생해 10건이 처벌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평등에 관한 잔상이 비록 일그러져 있다 할지라도 마냥 부정적으로 보는 게 합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품고 있는 평등적 사고는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으로 조명할 필요도 있다. 남처럼 잘살고 잘먹겠다는 의지만큼 강력한 성취동기는 없다. 여기에는 개인이나 기업이 따로 없다. 누구나 출세하기 위해, 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 권력을 쥐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목적 지상주의가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지만 무엇이든 달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삶의 질을 급신장시킨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선진국 진입을 바라보게 된 배경에는 너도 하면 나도 하겠다는 평등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교육 폐해가 논란거리이지만 내 자식을 다른 집 자식에 뒤지게 할 수 없다는 부모들의 강박관념에서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빚을 내거나, 파출부를 해서라도 내 아이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엄마의 집착이 인적 자원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게 아닌가. 기업들이 한 업종이 잘된다면 너나없이 뛰어들어 문어발이란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복 투자, 비효율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남과의 경쟁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면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 기업 자신을 물론, 더 나아가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 우리 조선업은 삼성 현대 대우가 각축을 벌이면서 어느새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 한때 유럽 조선업계의 거센 반발과 우리 정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열한 독 확장경쟁을 벌였다. 이는 지난해 세계에서 발주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90% 이상을 우리 기업들이 차지하는 쾌거로 돌아왔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제한없는 경쟁이 가능한 게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라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고유한 평등의식을 선진사회 건설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 세계를 훔친 호기심

가지 말라 하면 더 가보고 싶고, 하지 말라 하면 기를 쓰고 해봐야 한다. 창피당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궁금한 건 못 참는다. 해외여행에서 흔히 보는 어글리 코리안(ugly Korean)의 단상들이다. 촬영금지구역인 박물관에서 용감하게 플래시를 터뜨리는 젊은이, 심야 우범지대 유흥업소를 나홀로 체험하러 나섰다가 봉변당하는 아저씨. 1987년부터 한국인 단체여행객들을 인솔해온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붙들어 매는 게 가장 힘들고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라면 끓일 때 면 먼저 넣나요, 수프 먼저 넣나요. 전투기에도 화장실이 있나요. 만약 사람에게 꼬리가 달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최근 인터넷 포털 네이버의 지식검색 코너에서 조회수가 높은 인기 질문들이다. 소소한 실생활 지혜부터 머나먼 상상의 세계까지 한국인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끝이 없다. 네이버측은 2002년말 지식검색 서비스를 개설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1억여건의 질문이 데이터베이스로 누적돼 있다고 밝혔다. 한 질문에 적게는 한두 개부터 많게는 10여개까지 답변이 붙는 걸 감안하면 각양각색 대답의 분량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많은 건 물론이고, 질문자보다 더 궁금해하며 애써 답을 찾아내는 사람도 부지기수인 셈이다. 한국인은 예부터 호기심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 특질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이 급속도로 확산하고 디지털 문화가 보편화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시다발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네트워크, 커뮤니티 안에서 저마다의 호기심을 공표하고 공유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무책임한 호기심의 확산은 사생활 침해 등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는 이점이 더 커진 게 분명하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는 새로운 집단이 생겨나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얼리 어답터는 남보다 빨리 신제품을 사서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소비자군(群)을 지칭한다.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에는 신기술 제품을 먼저 구입해 꼼꼼이 써보고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성능과 특성을 널리 알려주는 사람들로 의미가 확대됐다. 재미삼아, 취미삼아 한번 써보고 휙 버리는 소비지향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제조사와 소비자의 중간에 서서 양쪽에 이득을 주는 생산지향적인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해당 분야 제품의 재야 전문가이자 오피니언 리더인 그들에게 검증을 받는 것만큼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은 흔치 않다. 이제 인터넷 문화가 일상화되면서 우리 사회의 얼리 어답터층은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어졌다. 전문가가 넘쳐나는 한국의 강점은 해외에서 무시못할 힘으로 대접받고 있다. 지난 13일 미국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은 정보기술(IT)의 미래는 한국에 있다는 제하의 특집기사를 통해 실리콘 밸리의 유수 업체들이 한국 소비자들에게 합격 판정을 받기 위해 신제품을 속속 한국에 가져가고 있다면서 한국이 IT의 타임머신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이어 삼성이 신제품을 수출시장에 내놓기 6~8개월 전에 국내에 먼저 풀어 소비자들의 활발한 피드백을 통해 문제점을 개선한다는 사실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2년전 미국보다 6개월 앞서 한국에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를 선보였던 일을 예시했다. 한국민 전체가 필드 테스터(현장 시험요원)로 정평이 나 있는 셈이다. 실제로 휴대폰을 명품 반열로 끌어올린 삼성 휴대폰의 세계적인 성공 배경에는 한국인의 호기심이 상당 부분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외 경쟁사들은 1년에 고작 20~30종의 신제품을 내놓는 반면 삼성은 연간 120~160종의 새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나날이 다양한 기능, 다양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수요에 맞춰 발빠르게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결과 세계 최초의 카메라폰·MP3폰·TV폰·가로화면폰 등을 선보이며 성가를 높였다. 반면 한국 시장 진출을 꾀했던 노키아 등 세계 유수 업체들은 한국인의 얼리 어답터 취향에 걸맞은 신제품을 개발해 내놓는 데 실패, 소리소문없이 한국에서 퇴출당해 세계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호기심에 가득 차 새 제품을 앞다퉈 써보는 열렬한 소비자가 없었다면, 이같은 성공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지난해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인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다. 어린아이 같은 열린 눈과 열린 마음으로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호기심은 창조를 자극하는 에너지라 할 만하다.

 

 

 

3. 용광로 문화

한국인 개개인은 뛰어난데, 한데 모아놓으면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일본인 개개인은 한국인에게 뒤지지만 뭉쳐놓으면 진흙처럼 강력하다. 우리 한국인들이 민족성을 논할 때 흔히 일본인과 빗대 스스로를 폄훼하며 내뱉는 말이다. 가정이나 동네 모임, 학교, 직장 등 주변에서 일상사처럼 느끼는 현상이어서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한번 뒤집어보자. 진흙으로 빚을 수 있는 건축물은 겨우 2~3층이지만, 모래알에 시멘트를 붓고 철근을 심으면 거대한 마천루를 지을 수 있다. 단합을 모르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으로만 비쳐지는 한국인의 속성에는 철근과 시멘트, 모래알처럼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는 용광로 기질이 깔려있는 게 아닐까. 물론 뒤섞고 비벼서 나오는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기술과 설비, 원자재 하나 없이도 이것저것 끌어모아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우뚝 솟은 포스코가 단적으로 증명한다. 종교를 보자. 유불선은 외래종이지만 토착 신앙과 잘 어울려 있다. 이밖에 무수한 종교가 들어와 있지만 갈등은 별로 없는 편이다. 인도, 코트디부아르 등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분쟁으로 수백, 수천명이 죽어가고, 일상적으로 폭력이 난무한다. 우리는 불교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만나면 논쟁을 벌이다 멱살정도나 잡는 게 고작이다. 한국인에게는 이질(異質)을 동질(同質)로 만들려는 독특한 소화효소가 있다. 지난해 여름 유럽 배낭여행을 영국 런던에서 교외로 가는 기차간에서 중년여성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한국에서처럼 결혼을 했느냐고 물었다.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송씨는 몇살이냐, 종교는 뭐냐 등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물었다. 개인주의가 몸에 밴 영국인에게 큰 실례가 되는 질문이다. 송씨는 당황한 영국 여인의 모습을 보고서야 뒤늦게 아차~ 했다. 송씨는 표준적인 한국인이다. 나와 다른 것을 보면 일단 나와 맞춰보고, 친숙해지려 한다. 개인주의와 개성을 무시한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기질이 용광로처럼 강력한 사회융합의 에너지 역할을 한다. 부자 아파트 사람이 이웃한 빈자의 아파트와 분리하기 위해 담장을 만들면 빈자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연일 사라진 공동체 의식이 여론의 도마에 오른다. 왜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인은 끼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배제하면 참을 수 없고, 내 일이 아닌 성 싶어도 기어이 참견하고야 만다. 그런 기질이 한때 식민지였다가 부자나라의 사교장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낀 유일한 나라로 만들었다. 한국인은 분리를 좋아하지 않고, 분리된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도 않는다. 갈등을 극한까지 폭발시킨 뒤 조화와 통합을 요구한다. 지역갈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지역갈등은 어느 사회, 국가나 있으며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동서간 지역갈등 문제는 융합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심성 때문에 유난히 커다란 문제로 부각된 감이 있다. 다른 나라 같으면 그래,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련다~라고 넘길 문제도 우리는 나하고 친구하자며 억지로 끌어들여야 직성이 풀린다. 지역갈등은 그런 식으로 정치적으로 뒤범벅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비비고 버무리기는 한국인의 버릇이다. 비빔밥은 너무 흔한 예가 됐다. 휴대폰에 카메라, MP3 기능까지 뭉뚱그린 것은 버무리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휴대폰을 이용해 이동하면서 위성방송을 볼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최초가 될 것이다. 한국인의 용광로 기질은 자연스럽게 참여문화를 만들었다. 서양 사람은 객석에 분리된 채 전문인들의 공연을 감상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놀이마당이 벌어지면 공연자와 자연스럽게 어울려 춤사위를 벌인다. 이 또한 내가 끼어야 우리가 잘 된다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다. 한국인은 배타적인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접하면 그렇게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집요하게 부각시켜 해결하려는 게 한국인의 본성이다. 한국인은 모래알인가. 그렇다, 마천루 속의 모래알이다. 반짝 끓어오르는 냄비인가. 아니다, 모든 것을 녹여내는 용광로다.

 

 

 

4. 명품에 죽고 산다

최근 롯데백화점 명품관 개장이 화제였다. 에비뉴엘이라는 이름의 이 가게엔 샤넬, 루이비통, 버버리와 같이 우리 귀에 익은 유명 브랜드가 총출동했다. 팝의 여왕 마돈나가 즐겨 신는다는 구두 마놀로 블라닉과 8억원짜리 스위스 시계 에그르 꼴뜨르도 나왔다. 개장 첫날 3,000여명이 찾아 9억5천만원어치를 사갔다고 한다. 우리의 명품 선호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품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산 패션도 요즘 인기다. 최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산행하면서 쓰고 나온 독일 모자 보그너와 방탄용으로 제작된 제로(Zero)라는 브랜드의 선글라스는 벌써 명품 반열에 올랐다. 명품 열기는 인터넷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명품을 전문으로 다루는 인터넷 쇼핑몰이 수천개를 넘는다. 중고 명품을 저당잡히고 돈을 임시로 융통해 쓰는 명품 전당포도 성업중이다. 상위 1%를 상대로 한 업계의 귀족 마케팅이 상술로 자리잡은지도 오래다. 인천국제공항 휴대품 보관창구에 가득찬 외국 명품도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하나다. 매년 수백만원짜리 고가 핸드백과 시계가 1만개 이상씩 창구에 쌓인다. 경제력이 안되면 짝퉁이라도 사야 한다. 대학생 김모양은 요즘은 짝퉁도 진품과 진배없다면서 그래도 길거리표보다는 낫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매년 7,000~8,000여명의 상표법 위반사범이 검찰에 불려오는 것도 명품 열풍과 무관치 않다. 이 덕에 한국은 세계 명품의 시연장으로 통한다. 최근 스카치 위스키 로얄살루트 38년산이 세계에서 첫선을 보인 곳도 한국이다. BMW도 올 전략모델인 뉴3 시리즈를 지난달 제네바모터쇼에서 선보이자마자 가정 먼저 한국에 가져왔다. 한때 일부 부유층의 사치품으로 인식돼온 명품 구입 열풍은 이제 우리의 어엿한 문화코드로 자리잡았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파는 세계 명품을 동네 재래시장에서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서울지사 관계자는 27평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1천만원대 홈시어터를 구입하거나 와인셀러를 장만해놓고 집에서 10만원이 넘는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흔해졌다고 말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소비자들의 요구사항이 까다로워졌다는 얘기다. 국내 기업들도 국산품 애용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 어지간한 품질력 갖고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명품 선호가 곧 품질경쟁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애니콜지수를 새로 도입했다. 삼성 애니콜이 미국 빅맥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당당하게 자리잡았다는 징표다. 애니콜은 중국의 신흥 부자그룹인 신꾸이주(新貴族)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명품 브랜드다. 경제전문지 포춘은 미국시장에서 인기를 끈 LG전자의 카메라폰(VX6000)을 주머니 속의 보석(Pocket Jewelry)이라고 평했다. 세계인들이 한국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올렸던 싸구려 이미지는 이제 남의 나라 일이다. 1천5백만원짜리 중형차를 4~5년 만에 갈아치우는 게 다반사다. 기아차 고위 관계자는 한국 소비자처럼 까다로운 소비자는 전세계 어딜 가도 없다고 혀를 내두른다. 현대차가 지난해 미국 JD파워가 실시한 품질지수(IQS) 조사에서 도요타 벤츠 아우디와 같은 유명 브랜드를 제친 것도 그 배경엔 명품 의식이 숨어 있다. 미국 일간 USA투데이는 현대·기아차가 투자 확대와 함께 신모델을 내놓고 고소득층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명품 소비를 통해 고급화된 소비자들의 입맛이 오늘의 한국 브랜드를 만들었다. 박봉규 한국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은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국산 명품의 경쟁력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면서 치열한 경쟁과 소비자의 까다로운 안목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명품 소비도 경쟁력이다. 소비자는 명품을 선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산 브랜드의 고급화를 함께 요구했다. 부유층의 명품 소비는 때론 과소비의 주범으로 몰려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명품을 갈망하는 한국 소비자들이 없었다면 한국산은 아직도 세계시장에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았을지 모른다.

 

 

 

5. 싸움과 논쟁사이

조선 왕조는 당쟁 때문에 망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당쟁을 조선의 가장 부정적 요소로 기억한다. 그러나 당쟁이라는 말은 일본 학자들이 만들었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 분열과 갈등의 표본으로 당쟁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유봉학 한신대 교수는 당쟁은 조선시대 붕당간 정책 대결이었지 결코 파당간 소모적 대립은 아니었다며 모든 역사교과서에서는 이미 당쟁 대신 붕당정치라는 말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유교수는 100년 넘게 토론과 논의를 거쳐 시행된 대동법을 중세 토론 정치의 산물로 들었다. 상당수 학자는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유지되는 데 사대부들의 토론문화가 뒷받침됐다고 주장한다. 서로 종교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칼과 권총으로 결투를 벌이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서슴지 않은 유럽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 민족은 예송(禮訟)이나 호락(湖洛)논쟁(조선 후기에 충청도와 서울의 유학자들이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인 논의)에서 보듯 하나의 주제를 놓고 100년 이상 토론을 벌였다. 예송 논쟁 등이 당시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자칫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과 남북 분단은 우리 사회에서 토론 문화를 중단시켰다. 일제 때는 말 한마디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었다. 자유당에 이어 군사 독재 때는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이 횡행했다.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시대에 토론과 집회는 권력의 최대 적이었다. 몇명만 모여도 사전 신고해야 한다는 긴급조치는 그 상징이다. 오랫동안 잠자던 토론문화의 불씨가 다시 지펴진 계기는 1987년 6월항쟁이다. 민주화는 민간 정부 수립,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이어지며 토론문화를 꽃피웠다. 참여와 토론의 문화는 정치풍토를 바꿨다. 대통령선거 등에서 관훈클럽 토론회나 TV토론은 후보의 자질, 이념, 비전을 확인하는 마당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덕분에 청중 수백만을 동원하고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들여야 하는 선거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토론은 여론 수렴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됐다. 새 정책이나 법안을 만들려면 공청회나 청문회를 열어야 하고, 제대로 열지 않으면 그 법안과 정책의 절차적 정당성까지 의심을 받고 있다. 방송에서도 토론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100분토론(MBC), 심야토론(KBS) 등이 그것이다. 뉴미디어는 토론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허물어뜨렸다. 인터넷은 토론문화를 사이버공간으로 확장시켰다. 포털사이트들은 대다수가 토론방을 운영하고 있다. 엔간한 사이트들은 게시판이라도 만들어 댓글을 통해 토론의 장을 제공한다. 단일 토론사이트 중 최대인 미디어다음의 아고라는 일일 평균 방문자가 70만명이다. 아고라 운영자 임선영씨는 언제,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온라인 토론은 개인의 경험이나 의견을 공유하면서 이슈를 만들어낸다는 게 장점이라며 거대담론 중심의 방송 토론을 보완하며 새로운 토론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는 정부에서도 토론을 앞세우고 있다. 권위주의적 관료문화가 상당부분 불식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갑자기 펼쳐진 토론광장에서 참여자들은 아직 어리둥절한다. 노대통령과 평검사토론회에서 나온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말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 강미은 숙명여대 교수(언론학)는 토론은 일방적인 스피치가 아닌 쌍방향의 대화인데도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많다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얘기하는 대화법을 강조했다. 토론은 다양한 의사 및 아이디어의 소통을 통해 하나로 모으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 토론의 힘을 제도적으로 수렴, 실천으로 연결시키면 사회 발전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들이 쉽게 내뱉는 말로 해야지 싸우면 되나라는 말에는 온당한 토론 방식이 담겨 있다.

 

 

 

6. 시청 앞의 레드물결

얼마 전 독일월드컵 최종 예선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경기가 끝난 서울 상암경기장에 많은 쓰레기들이 널브러졌다. 사람들이 뒤떨어진 시민의식을 비판했다. 이는 우리의 가능성을 말해 준다. 아예 걱정하지 않았다면 희망이 없다. 한국인은 모래알이다. 개인적으로는 똑똑하지만 모아 놓으면 엉망이다. 숱하게 듣는 말이다. 여기에다 일본인은 정반대라는 말까지 붙이기 예사다. 우리들에게 공동체나 참여의식이 없다고? 그렇지 않다. 증거는 많다. 개인의 이기주의를 죽이고 참여를 통해 이뤄낸 성과는 하나 둘이 아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2002년은 그 절정이었다.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많이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 잘 난 사람과 못 난 사람이 없었다. 혼자, 가족끼리만 TV를 보기엔 너무 아쉬웠다. 모두가 스스럼없이 거리로 나와 어우러졌다.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시청 앞과 대학로에서 읍·면의 비좁은 골목길까지 멍석은 한달 내내 깔렸다. 2천5백만여명이 거리로 나왔다. 그런데도 쓰레기는 스스로 치웠고, 곁의 나무와 꽃은 온전히 지켜냈다. 일탈하는 이들에겐 질서 질서를 외쳤다.  3년이 지난 현재까지 가까운 불광성당에서 아들과 대~한~민~국을 외친 경험이 새록새록하다. 평소 얼굴도 모르던 이웃과의 벽이 무너진 것도 그때였다. 같이 손잡고, 발을 구르고, 목청을 돋우면서 하나가 됐다. 격정은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시인 김지하는 동원되지 않은 시민들의 이 자발적 참여를 한껏 치켜세우면서 그 연원을 멀리 동학농민전쟁에서 찾았다. 가까이는 6월 항쟁을 예로 들었다. 1987년 6월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민중들은 군사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자발적으로 전국 곳곳에서 최루탄을 뚫고 고함치고 내달렸다. 넥타이부대까지 뛰어들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챙겼다. 국민 스스로 민주화로 나아가는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 성취감에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외환위기를 이겨낸 것도 우리의 자발적 참여의식이었다. 1997년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두달 남짓 벌어진 금모으기는 민중의 자발성이 동력이었다. 달러 한장 만져보지 못한, 외환위기에 책임이 전혀 없는 이들이 먼저 나섰다. 거슬러 올라가면 1907년 해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닿는다. 역사는 운동에 양반뿐 아니라 농민·상인·장인·백정·기생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참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일월드컵 참여 열기가 일과성이 아니라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게 촛불시위다. 월드컵이 한창 때인 6월13일 경기 양주시에서 여중생 심미선·신효순양이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그 열기는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손에 손에 촛불을 켠 채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에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네티즌의 모이자는 말 한마디에 하루 최다 20만여명이 거리로 나왔다. 촛불시위에 자주 참가한 김진희씨(35·회사원·서울 신림동)는 국민을 하나로 묶은 월드컵 거리축제의 참뜻이 비폭력 평화를 지향하는 촛불시위로 모아졌다고 풀이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교과서 역사 왜곡에 맞서기 위해 급속히 번진 반일시위도 같다. 큰 고비를 여러차례 넘기면서 체득한 민족의 자발성과 마음 모으기가 엔진으로 작동하고 있다. 물론 자신과 가족만을, 혈연·지연·학연만을 따지고 챙기는 협소한 연고주의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가득하다. 참여의식이 자칫 왜곡돼 자신이 속한 집단 이익만 추구하느라 갈등과 대결을 낳기도 한다. 이같은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넘어서야 공동체적 선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어렵지만 가능하다. 우리는 한·일월드컵에서 경험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경기장의 쓰레기를 알아서 걱정하는, 국민들의 숨은 공동체의식이 그 가능성이다.

 

 

7. 암탉들의 세상

1. 전직 교장선생님의 증언. 남녀공학 중·고교의 쉬는 시간 매점 앞 풍경은 흥미롭다. 남학생들이 몰려 있을 때 그 사이에 홀로 낀 여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빵도 사고 우유도 산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드물다. 여학생들이 몰려 있으면 홀로 남학생은 슬그머니 줄 뒤편으로 가곤 한다.
2.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은? 할머니다. 직장 다니는 딸이나 며느리에게 아이 봐주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는 구세주에 버금간다. 살림의 귀재이자 정보의 창고. 역할이 무궁무진한 할머니는 늘 바쁘다. 그럼 할아버지는? 아내 없으면 끼니도 거르는 남성들을 두고 이사갈 때 혼자 남을까봐 아내의 애견을 안은 채 트럭에 타고 기다린다는 유머가 돈다.
한국 여성은 강인하다. 극성스럽다. 억척맞다. 세대불문, 지역불문이다. 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눈치보지 않고 슬라이딩하는 아줌마, 자녀를 명문학교나 학원에 보내기 위해 삼천지교도 불사하는 현대판 맹모(孟母)들. 복부인과 치맛바람은 뻔뻔할 만큼 드센 한국 여성의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했다. 우리 여성들의 혈관에는 어떤 유전자가 내려오는 것일까. 제가 죽은 뒤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 조선시대 이런 얘기를 했다면 간 큰 여성이 분명할 듯.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주인공은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알려진 신사임당이다. 그녀는 순종적 아내라는 남성들의 팬터지를 충족시키는 여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불붙었을 때다. 3개월간 금연과 현금 모으기 등이 제안됐다. 이는 사실상 남성들의 참여만 전제했음을 의미했다. 격분한 대구 여성들은 패물폐지 부인회를 조직하고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라는 격문을 발표한다. 이 격문은 전국 여성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켜 놀라운 성과로 이어진다. 1970~80년대 복부인들은 전국을 투기장으로 만들었다. 복부인은 2000년대 초반 수도권 아파트 시장에서 분양권 시세차익을 노리던 단타매매꾼, 이른바 마귀로 업그레이드됐다. 이들은 무모하게 베팅하는 대신 세무·법률지식을 훤히 꿰 중개업자 뺨칠 정도였다.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개발된 한국 여성의 투자DNA는 요즘 한단계 도약하고 있다. 각종 투자강좌와 인터넷에서 수집한 정보로 무장한 여성들이 진짜 재테크 전문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치맛바람은 한국을 사교육 지옥으로 만든 주범 중 하나다. 그러나 국토가 좁고 자원도 부족한 우리나라가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룩한 데 엄마들의 교육열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 386세대 여성들이 적극 참여중인 주민자치적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치맛바람을 긍정적으로 버전 업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 한국 영화 시장도 여자의 힘을 입증하는 무대다. 여운계·김수미·김을동·김형자 등 중견 여배우들은 모처럼 주연을 맡은 마파도에서 건강한 생명력과 에너지로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여성의 강인함이 섬세함과 결합, 21세기형 리더십으로 부각되고 있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남다른 소신과 정공법으로 검찰 개혁의 물꼬를 텄지만, 때로는 검찰총장과 폭탄주를 나누며 인간적 교감을 나누는 유연한 리더십을 과시했다. 지난달 태릉선수촌 역사 40년만에 첫 여성 촌장에 오른 탁구여왕 이에리사. 그는 어린시절 구슬치기를 해서 딴 구슬을 다시 팔아 탁구 라켓을 샀다고 한다. 이같은 집념과 여성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선수촌을 확 바꿔놓을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있다. 한국 여성은 왜 셀까. 남녀차별의 편견이 뿌리깊은 사회에서 역풍을 딛고 일어서야 했기 때문에 더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게 됐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여성학자 박혜란씨는 아들은 우대받고 자란 반면, 딸은 뒷전으로 밀렸기 때문에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면 삶을 이어가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다며 어떤 역경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지켜내야 했던 역사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잔존해 있는 사회·문화적 족쇄가 완전히 풀릴 때, 한국 여성의 강인하고 역동적인 개성이 만개할 것이란 데 입을 모은다.

 

 

 

8. 전국이 노래방

화가 박영균씨가 9년 전 그린 86학번 김대리는 1960년대 태어나, 자식 공부 시키느라 뼈빠지게 일한 부모 밑에서 빠듯하게 대학을 다닌 386세대의 초상화다. 한때 민주화 시위대 속에서 목청 터지게 부르던 솔아~솔아~를, 이제 반짝이 조명이 돌아가는 어두컴컴한 노래방에서 구성지게 부른다. 특별히 잘 나지도 못하고, 부모를 잘 만나지도 못한 9년 전의 김대리. 그는 지금 여느 사람처럼 김부장이거나 실업자 김씨가 돼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가 때때로 노래방에서 세상살이 희로애락을 풀고 있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쁘나 슬프나 신명난 노래 한자락으로 풀어버린 한민족 특유의 신명 DNA는 논두렁 밭두렁, 장터 한복판을 거쳐 노래방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어디 노래만 부를 만큼 신바람이 났던가. 가까이만 해도 일제의 침탈, 한국전쟁과 분단, 군사독재와 광주항쟁, 민주화운동, 외환위기까지 고통의 나날이었다. 엉터리 점쟁이라도 나이 지긋한 중년 이상에게 그 어려운 세월 어떻게 지냈어~라고 운을 뗀 뒤 부모 복 지지리도 없어 초년 고생 깨나 했지? 죽을 고비 몇번은 넘겼겠네~하면 거지반 용하다는 소리는 듣는다지 않는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에도 나오는 신명 DNA의 뿌리는 깊고 깊다. 소리의 고장 진도의 소포리에서는 노래방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일제 때 태어난 나이 지긋한 노래방 회원들은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농사일이 끝나면 지금처럼 집집마다 돌면서 노래를 했다고 기억해낸다. 눈물을 흘리고 절망해야 할 때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그걸 추진 연료 삼아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2만2천5백76개이던 전국의 노래방은 1년 뒤 2만3천7백49곳으로 늘어났다. 2003년 통계로는 3만3천8백32개나 된다.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노래방을 연 경우도 있겠지만, 어려운 생활에 지친 심신을 노래로 풀려는 욕구에 따라 수요가 늘어난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의 문필가 신흠(1566~1628)의 시조는 노래의 흥을 빌려온, 우리 민족의 오랜 현실 해결 비법을 증언한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사/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풀었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노래를 처음 만든 사람, 근심 걱정이 많기도 많았구나 말로 하려 하니 다 못하여 노래 불러 풀었단 말인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물론 지나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19년(1586) 조선에 온 일본의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예조판서가 베푼 술자리에서 노는 작태를 보며 이렇게 해이한 나라가 흥하기를 바라겠느냐고 했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남아 있다. 외국 바이어들은 밤의 술대접으로 모든 절차를 무마하려는 특유의 접대 문화에 머리를 내젓는다. 행락철만 되면 으레 빠지지 않는 노래방 관광버스 사고도 한 예다. 안전띠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좁은 통로에서 추는 관광버스 춤이 생길 정도로 가무를 즐기다보니 터졌다 하면 대형사고다. 하지만 어쩌랴. 관광버스 춤으로나마 시름을 덜고, 다음 한해 농사 지을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을. 밥벌이의 스트레스를 노래방에서라도 풀어야 내일에 맞서는 신명이 생긴다는데야. 세계 0.078%의 땅에, 0.77%의 인구에, 자원마저 보잘 것 없는 한국이 경제 강국이 된 데는 우리만의 독특한 신바람이 깔려 있다. 해외관광 등 쓰고 보자는 바람이 외환위기를 불렀지만, 한번 해보자는 신바람으로 그 힘들다는 외환위기를 거뜬히 넘어섰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만족하던 우리의 축구를 16강에서 4강까지 밀어올린 것도 신바람이었다. 거리에, 운동장에 거세게 몰아친 바람은 다른 팀에 공포였다. 팝송과 할리우드 영화가 수십년간 판친 대중문화판에서 어느새 우리의 노래와 영화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 신바람은 한류로 이어져 세계로 불어가고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을 소주 한잔, 고성방가로 풀어버리는 풀이문화와 신명은 점점 긴장이 고조되는 현대 사회를 헤치고 나가는 우리 민족만의 탁월한 해법이라고 말했다. 풀이의 문화, 신명의 문화가 바로 한류의 근원이자 우리 민족의 저력이라는 게 그의 평가다.

 

 

 

9. 빨리 빨리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지 않았지만 우르르 그 앞으로 몰려간다. 자판기에선 커피가 다 채워지지 않았는데도 손을 넣어 종이컵을 꺼내려 한다. 자장면이 맛없는 것은 용서해도 5분을 기다리는 것은 못 참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하는 한국인들의 생활상이다. 외국에서도 빨리빨리 때문에 한국인은 쉽게 구별된다.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안녕하세요 다음으로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다. 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림과 통하면서 대표적 한국병으로 꼽혔다. 망국병이라고도 했다. 물론 그 증거는 많았다. 새치기에서 무너진 다리까지 숱하다. 요즘은 다르다. IT강국을 만든 밑거름이라고 말한다. 제프리 존스 주한 미 상공회의소 전 회장은 저서 나는 한국이 두렵다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사회는 무척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한국 사람들은 단지 그 변화의 속도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나는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처럼 변화에 대한 부담(혹은 두려움)이 적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핸드폰, 컴퓨터, 자동차 등 다른 나라에서라면 5~10년 족히 쓸 물건도 한국에서는 1~2년만 되면 골동품이 된다. 한국사람들은 그만큼 변화에 익숙하며 변화를 좋아하고, 또 즐기기까지 한다. 마샹우 중국 런민(人民)대 교수는 한 칼럼에서 한술 더 떴다. 한국인들이 부끄러워했고 한때 세계적 웃음거리였던 빨리빨리 문화도 한류의 기세에 한몫하지 않나 싶다. 사실 음악이나 드라마, 영화 등의 빠른 전개는 한류에 빠진 중국인들을 매료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빨리빨리 습성에서 기인하는 부지런함과 과감한 투자도 거론하지 않으면 섭섭하다. 빨리빨리가 IT뿐 아니라 다른 비즈니스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초고속통신망이 한창 깔리던 2000년에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고속통신망을 이용하려고 이사했다는 한국 회사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잡지는 이를 미쳤다(crazy)고 평가했다. 두루넷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처음 실시한 게 1998년이다. 7년만인 2005년 3월말 현재 가입자는 1천2백8만6천8백36가구다. 전체 가구의 80%가 넘는다. 조심성 많은 일본인들은 전화선 모뎀에서 초고속인터넷으로 넘어가는 과정인 ISDN을 고집했다가 이제 초고속통신망으로 넘어가고 있다. 95년 등장한 PC방도 마찬가지다. PC방은 93년 영국과 인도에서 인터넷카페로 시작했다. 하지만 답답한 모뎀 속도를 견디다 못한 한국 사람들이 집의 컴퓨터를 놓아둔 채 속도가 빠른 PC방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고유 문화가 된 데 이어 중국, 일본으로 퍼졌다. 자동차 홍수 속을 달리는 오토바이 퀵서비스도 전성시대다. 누구나 빨리만 도착할 수 있다면 기꺼이 돈을 낸다. 제프리 존스는 그 근원을 한국인의 근면성에서 찾았다. 한국에서 게으름은 죄악처럼 여겨졌다. 자원이 많지 않아 늘 아귀다툼하듯 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농번기에는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 비빔밥을 만들었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은 비빔밥을 한국식 패스트푸드라고 썼다. 빨리빨리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산물이자 압축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늘 긍정적이지는 않다. 급행료가 왜 생겼는가. 10~20년전만 해도 공사장마다 안전제일만큼이나 공기단축이란 표어가 나붙었다. 그만큼 돈이 남기 때문이었다. 417.4㎞의 경부고속도로는 밤샘작업으로 세계 최단기록으로 뚫었다. 68년 착공한 뒤 2년5개월 만에 완공했다.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 뒤 공사비의 몇배에 이르는 보수비가 들었다. 횡단보도 정지선에서도 조금 빨리 가겠다고 자동차 머리를 서로 들이민다. 고속도로의 추월선이 주행선이 된 지는 오래다. 너나없이 추월하겠다고 달려드는 통에 주행선이나 별 차이가 없게 됐다. 무질서를 낳는다. 세계는 지금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기업들이 이 경쟁에서 앞서지 못하면 뒤처지는 게 아니라 아예 패배한다. 그러기에 세계가 다 두려워할 정도로 빠른 한국인의 속도감은 훌륭한 경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줄이려면 철저히 점검하고 다지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룰이 자리잡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뒤처지는 이들을 거두고 보살필 사회안전망도 물론 배려해야 한다

 

<출처 블로그 스위스 쮜리히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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