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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궁궐, 창덕궁. 여섯 가지 키워드로 되돌아보기

金 敬 峯 2008. 6. 15. 18:29
 

      19세기 조선의 궁궐, 창덕궁. 여섯 가지 키워드로 되돌아보기

 궁궐은 임금이 거주하면서 왕조를 다스리는 통치의 중심지인 동시에 왕조의 상징이었다. 그 속에는 당시의 가치관과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궁궐에 담겨있는 의미를 통해 궐을 둘러보다보면 복잡하기만 할 것 같은 궁궐의 특성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궁에 담긴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조선의 궁궐, 창덕궁(사적 제122호)을 제대로 이해하며 거닐어 보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창덕궁의 원래 모습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의 창덕궁 전각 중 인정전, 선정전, 낙선재 등과 후원의 정자들은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창덕궁 복원계획에 따라 1990년대 이후 복원된 것이다.

배산임수, 명당의 조건
‘배산임수背山臨水’는 풍수에서 나온 말로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이상적인 명당의 조건을 일컫는다. 창덕궁은 북악의 매봉을 뒤로 하고 있어 궁궐의 앞마당에 인위적으로 냇물을 유도하여 ‘배산임수’의 조건을 만들었다. 궁궐의 마당에 흐르는 냇물은 나쁜 기운이 이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궐을 보호하려는 주술적인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그 이름도 ‘금천禁川’이라 했다. 금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악귀를 물리친다고 여겨지는 상상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 금천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조후침, 공과 사의 확연한 공간구분
‘전조후침前朝後寢’은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둔다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래한 궁궐 배치의 기본원칙이다. 창덕궁의 궁궐 배치도 ‘전조후침’의 원칙에 충실했다. 지금의 정부청사에 해당하는 궐내각사闕內各司,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 궁궐의 으뜸 건물로 각종 행사를 하는 인정전仁政殿(국보 제225호) 등의 전각들이 궁궐의 앞부분에 위치했다. 이에 반해 궁궐의 뒤쪽에는 임금과 왕비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보물 제815호)과 대조전大造殿(보물 제816호)을 비롯하여 왕실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구중궁궐, 임금의 보호와 편의를 위한 의도
흔히 임금이 사는 궁궐을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했는데, 이는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궁궐의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여기서 ‘아홉 겹’은 실제의 숫자가 아닌 ‘여러 겹’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과 임금의 처소인 희정당은 여러 채의 건물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선정전 앞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에는 선전관宣傳官, 사관史官, 내시內侍 등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머물렀다. 선전관은 숙직을 하며 임금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임금이 긴급하게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했다. 사관은 후일 역사의 기록을 위해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은 ‘시종侍從’이라 하여 임금의 은총이 각별했다. 내시는 궐내 음식물에 대한 감독, 명령의 전달, 궁문의 수직,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임금의 집무실 앞에 많은 건물을 의식적으로 배치한 것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하는 동시에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이들의 역할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선정전이 바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왕세자의 공간, 동궁
궁궐의 동쪽은 예로부터 왕세자의 공간이었다. 세자는 임금의 후계자로 마치 떠오르기 전의 태양과 같은 존재이므로 그 상징성에 걸맞게 궁궐의 동쪽에 거주하고 그 명칭도 ‘동궁東宮’이라 했다. 창덕궁에는 임금의 공간인 선정전과 희정당 동쪽에 ‘중희당重熙堂’이란 이름의 세자궁이 있었다. 정조는 첫아들을 본 재위 6년(1782)에 이 집을 짓고 친히 현판을 써서 달게 했다. 그 후 세 살 된 아들의 세자 책봉식을 여기서 거행하고 문효세자文孝世子라 했다. 그러나 이 집은 고종 때 없어진 후 지금은 후원으로 넘어가는 큰 길로 변해버렸다. 다만 중희당의 오른편으로 붙어있던 ‘칠분서七分序’와 ‘이구와貳口窩’라 불리는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 남아 있어 이곳이 창덕궁의 동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중희당의 마당에는 시간을 재는 해시계,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 풍기대,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소간의 등의 과학기기가 즐비하였다. 이는 이념적으로는 하늘을 공경하는 당시의 가치관과 관계있으며, 실용적으로는 시간을 공유하고 일기를 측정하여 농사 등 실생활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이들 과학기기를 세자가 사는 동궁에 집중적으로 설치한 것일까? 이는 아마 임금이 되는 세자의 교육을 위한 배려 때문이리라.

대왕대비의 처소인 동조
동궁과 마찬가지로 대왕대비의 처소 역시 궁궐의 동쪽에 두는 것을 법도로 생각했다.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는 동쪽으로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가 연이어진 세 채의 영역으로 되어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재위 13년(1847)에 세자를 얻기 위해 후궁을 맞아들인 것과 관계가 있다. 헌종은 후궁 경빈 김씨를 맞아들인 후 곧바로 자신의 처소로 낙선재를 짓고, 낙선재 동쪽으로 경빈의 처소인 석복헌과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처소인 수강재를 그 이듬해에 차례로 지었다. 이때 수강재를 가장 동쪽에 지은 이유는 바로 대왕대비의 처소인 ‘동조’는 궁궐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천원지방,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즉위년(1776)에 세워졌다. 주합루는 그 앞에 위치한 연못과 정자와 잘 어우러져 창덕궁 후원의 비경을 연출하는 중심에 서 있다. 정조는 주합루의 일층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유능한 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할 수 있도록 했다. ‘주합’이란 이름은 정조가 직접 짓고 현판 글씨 또한 정조가 친히 쓴 어필이다. ‘주합’은 ‘육합六合’, 즉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을 가리키는데, 이는 곧 천지天地를 의미한다.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주합루의 뜻은 건물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주합루 앞의 연못으로 연장되었다. 주합루 앞 연못인 부용지芙蓉池는 그 모양이 네모나 있고, 안에는 둥근 섬이 있다. 동양사상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생각으로 부용지는 하늘과 땅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글·사진_ 최종덕 문화재청 국제교류과장

게시일 2008-03-28 08:57:00.0

출처 :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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