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을

사랑시 3편 / 김소월,윤동주,김춘수

金 敬 峯 2009. 2. 21. 19:28

 

[현대시 100년-사랑의 ]

김소월/‘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세상의 모든 사랑은 영원성을 욕망한다. 어떤 가혹한 시간 속에서도 지금의 사랑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내 사랑의 편이 아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의 시는, 사랑의 불안한 미래를 견뎌내는 자기만의 내밀한 논리를 찾아 나선다.

당신이 지금 곁에 없다면, 무척 그리워하다가 결국 사랑의 미래를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이 그런 나를 나무라면 어떻게 변명할까? 이 시는 간절한 반어법으로 이 비극적 상황을 넘어선다.

미래에 먼저 가서 현재의 내 사랑을 잊게 되는 장면을 설정한다. 지금 당신의 부재 때문에 미래가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신호를 보낸다.

‘먼 훗날’ 당신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직설법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오늘도 어제도’ 나는 당신을 잊을 수 없다는 현재의 뜨거운 진실이다. 그것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당신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 지금 내 사랑의 절박함에 대한 비명이 된다.

그래서 ‘먼 후일’은 끝내 만나고 싶지 않은 어떤 시간의 이름이다. 저 무서운 시간 속에서도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어, 드디어 사랑의 영원한 현재성에 가 닿는다.

김소월은 한국 현대시 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시인이다. 그의 사랑의 시가 뛰어난 것은 사랑에 처한 개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깊은 진정성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을 둘러싼 섬세한 욕망에 대한 현대적 표현이었다.

내향적인 심성의 김소월의 생애는 생활고와 식민지의 억압적인 공기 속에서 불우했다. 생애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는 정신적 경제적 폐인으로 살았다. 죽음의 순간 아내의 입에도 아편을 넣어 주었다고 알려진 생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한 비극으로 전해지지만, 사랑의 시들은 그 개인적 비극조차 생에 대한 사랑의 반어법으로 읽게 한다.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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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지도(地圖)-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어떠한 고백체 예술이든지 그것은 끊임없는 고뇌와 자기 폭로의 열정이 동반될 때 가능하기 마련이다. 윤동주는 우리 시사(詩史)에서, 서정시가 고백체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임을 그 누구보다 진정성 있는 언어로 보여 준 시인이다.

물론 그런 그도 구체적 사랑의 흔적을 고백한 일은 좀처럼 없다. 오히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윤동주 시편에서도 ‘순이’라는 여인이 세 번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소년’)이라든가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사랑의 전당’) 등의 진술을 통해 그의 시편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 사랑의 전당에 들어왔던 그녀가 이제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시인을 떠나고 있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듯한 함박눈의 환각 속에서 그녀는 떠나고, 시인은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눈이 녹으면 그녀가 남긴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필 것이고, 시인은 그녀의 발자국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랑과 이별의 기억을 내내 간직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별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오랜 기억 속에 간직하려는 상상적 행위가 이 시의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싸늘하게 옥사한 후 나온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1948년)가 올해로 회갑을 맞았다. 하지만 연희전문 38학번 청년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사랑스런 추억’)라는 자신의 예언처럼 불멸의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사랑과 젊음의 마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는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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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네 모발

 

그녀의 모발은 그녀의 얼굴보다 비밀스럽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모발은 지극히 익명적인 뭉치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내밀한 사건이 없이는 세상의 모든 깜깜한 머리털 속에서 유일한 머리털, 고유한 이름을 가진 모발은 태어날 수 없다.

사랑의 대상을 향해 스미는 감각의 능력은 비슷비슷한 인상의 뭉치들 속에서 놀랍게도 미묘한 차이, 특별한 차이를, 그 유일한 고유성을 찾아내고 구원한다. 그녀가 떠나고, 여름이 가고,

그렇게 사라진 모발을 나는 내 빈 손끝에 남겨진 감각으로 피워 올린다.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너의 모발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만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모발은 그녀의 얼굴보다 가깝다.

시인 김춘수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문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를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네 모발을 그리워할 때, ‘이 세상의 분꽃 하나가 하늘에 묻히리라’.

이 시에서 우리는 좀 엉뚱하게도 ‘사랑은 모발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의 몸짓과 영혼은 그녀의 머리로부터 자라 나와 그녀를 떠날 듯 바람에 흩날리는 저 규정할 수 없는 머리카락을 닮았다. 모발은 ‘하늘 높이 눈을 뜨고 불리우며 흐르고 있다’.

‘지금 아내의 모발은 구름 위에 있다.’ ‘아내는 모발을 바다에 담그고 눈물은 아내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신다.’ 이러한 구절들을 우리는 김춘수가 쓴 ‘이중섭’ 연작시 중에서 읽을 수 있다.

화가 이중섭은 바다 건너 도쿄에 있는 아내와 떨어져 살았다. 가난했고 많이 외로웠을 이 화가의 붓은 그리움에 밀려 아내의 모발처럼 어느 구름 위에 떠 있고 어느 바다에 담겼을까. 지금, 이중섭의 터치는, 김춘수의 이 노래는 누구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시고 있을까.

김행숙 시인

 

출처 : 코스모스  |  글쓴이 : 그리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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