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grade For You

[율곡에게 배우는 명품 리더십 1] 입지(立志)

金 敬 峯 2009. 3. 1. 18:41

[율곡에게 배우는 명품 리더십 1] 입지(立志) / 원대한 뜻이 없는 곳은 리더의 무덤이다
  2009년 2월 16일 / 삼성

율곡 이이는 『성학집요』와 『동호문답』과 같은 군주의 리더십 교과서를 저술한 조선의 대표적인 개혁 성향 지식인이다. 그는 조선이라는 조직을 다스리는 리더로서 군주가 갖춰야 할 자질을 근본부터 말단의 기예(技藝)까지 매우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임금과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이것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타계해서 그가 바라던 조선의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저술과 그 속에 담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율곡 리더십의 가장 기본을 이루는 ‘입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율곡 리더십의 시작, ‘입지(立志)'


율곡 이이는 ‘학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짧지 않은 기간 선조를 파트너로 삼아 집중적인 국가 리모델링을 주도한 열정적인 개혁가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그를 ‘입지(立志)의 철학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하며,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를 작다고 생각하여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대개 평범한 사람과 성인은 그 근본 성품만은 똑같은 것이다. 비록 기질에 맑고 흐림과 순수하고 섞임이 서로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참을 알고 실제로 행하여, 그 옛날 물든 것을 제거하고 본래 성품을 되찾는다면 모든 착한 것이 다 넉넉히 갖춰지게 된다.”

율곡을 개혁적 리더로 만들어 준 것은 두 음절로 된 ‘입지(立志)'라는 단어다. 뜻을 세운다는 의미인 이 단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키워드이자 모든 행위의 뿌리로 얼마나 크게 기능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입지는 율곡 리더십의 시작이자 전부이다. 그는 뜻을 세우지 않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오늘날로 따지면 공약 없이 유세하는 정치인과 같은 것이다.

‘고상하게 뜻을 세워야만 일을 할 수 있나'라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대학입시라는 주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남들보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뛰는 동안, 이런저런 정형화된 성공 지표를 획득하는 동안 진정한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잊고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이 없는 곳에는 길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크고 작은 실패와 후회가 여기서 비롯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뜻을 세우지 않으면 성취도 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비슷하다. 사람은 어느 순간 남을 이끄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리더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만을 통제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리더가 된 후에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중요하다. 리더가 결정 내리는 일에 따라서 조직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뜻이 정해지지 않으면 기동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서로 상충되는 기획안이 내부에서 부딪히고 갈등을 조정해 줄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만약 리더가 전망도 없이 단기적인 이익에 따라 조직을 혹사시킨다면 그 조직은 미래가 없다. 파산을 거듭하는 경영자가 되기 전 반드시 율곡의 경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율곡은 배우는 이가 종신토록 공부해도 성취가 없는 것은 입지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뜻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세 가지 병통이 생긴다고 했다. 불신(不信), 부지(不智), 불용(不勇)이다.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게 되고 용기 있게 일을 추진하려는 마음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40세 때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성학집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살피건대 학문을 하는 데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뜻을 세우지 않고서 능히 공부를 이룬 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기(修己)의 조목에 입지를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선조와 율곡은 아주 기묘하고 독특한 애증관계였다. 선조에게 율곡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아끼는 신하였다. 율곡도 16살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큰 무리 없이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한 선조의 자질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점점 공부에 뜻을 잃고 신하들을 정치적으로 다루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몰두함으로써 율곡을 실망시킨다. 이런 모습에 율곡은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선조는 그때마다 자신의 과오와 불찰을 인정하며 다시 율곡을 불렀다.

율곡은 이런 선조의 부름에 몇 번이나 응했다. 그런 율곡의 모습에 친구인 우계 성혼은 “당신은 너무 우유부단하다”며 비판했다. 그러자 율곡은 “임금의 성정에 선함이 싹트는 여지가 보이는데 그 싹을 신하인 내가 외면해서야 되겠소”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율곡이 건의하는 안건마다 선조는 “때가 아니다”라면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선조는 다른 신하에게 율곡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성품은 훌륭하나 논설이 너무 강직하다”는 말로 평가함으로써 율곡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다. 율곡의 실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리더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

『동호문답』을 지을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이 책은 선조에게 올리는 청년 율곡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치개혁 보고서다. 논문처럼 쓰면 임금이 싫어할 것 같아 손님과 주인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대화체 형식으로 썼다. 여기서 율곡은 임금이 다시는 “때가 아니다”라는 소리를 못하게 원천적으로 봉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바로 『동호문답』의 「금일 시대 정세를 논하다(論當今之時勢)」라는 글이다. 대략적인 내용을 이렇다.

손님이 먼저 물었다.
“삼대 때의 정치를 과연 오늘에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구현될 수 있고말고요.”
주인의 자신만만한 말에 손님이 크게 웃더니 말을 잇는다.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선생은 왕도정치가 한나라 때부터 시행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훨씬 후대입니다. 요즈음 풍속을 보면 고려 왕조보다 못합니다. 만일 적당히 평화롭게 산다면야 모르겠지만 왕도정치를 이룬다는 것은 큰소리치는 걸로 보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안타깝네요. 당신의 말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따라갈 수 없는 말입니다. 왕도정치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은 단지 군주와 재상이 적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먼 후대의 세상이기 때문에 회복되지 못하는 것이겠소? 군주다운 군주가 있고 재상다운 재상이 있을 때 왕도정치는 회복될 수 있소. 정자(呈子)께서는 ‘사람이 없는 것이지 때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공이 있는 법이니 ‘일을 했는데도 공이 없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치세와 난세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때'와는 관계가 없소. 때라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자가 하는 바에 달린 것이어서, 만약 우리 성상께서 분연히 일어나 옛 도를 회복하고자 하신다면 가라앉았던 인심이 일어나고 꺾였던 사기(士氣)도 회복될 것이니 어찌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은 그에게 ‘핑계'일 뿐이었다.


지취(志趣)가 높지 못하면 잡패(雜覇)로 남아

자신을 대놓고 비판하는 『동호문답』을 본 선조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실록을 보면 선조가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보았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 있다.

 

어느 날 율곡이 임금과 마주하고 있었다. 업무가 끝나자 선조는 “『동호문답』을 보니 한나라 문제(文帝)를 ‘자신을 포기한 사람(自棄)'으로 묘사했던데 그건 좀 심한 것 아닌가”라며 말문을 연다. 그러자 율곡은 “문제가 훌륭한 황제였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선조의 말을 반박했다.

그는 성현들이 ‘제 1등의 일을 딴 사람에게 양보하고 제 2등의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자기(自棄)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들어, 한나라 문제는 자질이 훌륭하고 한나라가 전성기 때 왕이 되어 충분히 옛 시대의 훌륭한 법도와 문화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도 지취(志趣)가 높지 못해 잡패(雜覇)로 마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왕이 아니라 ‘잡스러운 취미나 즐기다 간 패권주의자'라는 뜻인데, 이것이 왕에게 할 소리일까? 선조가 발끈했다. “문제가 옛 시대를 회복하지 못했던 것은 경적(經籍)이 불타 없어져 훌륭한 유학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그의 허물이겠는가”라며 반박했다. 이런 볼멘소리는 율곡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 더 반박할 수 없게 한다.
“문제는 큰 뜻이 없어서 매양 비루한 의논을 좋아했습니다. 문헌이 있었다 한들 또한 어떻게 했겠습니까. 임금으로서 입지(立志)가 높지 않으면 대체로 자신을 포기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율곡은 선조에게 스스로 성왕이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게끔 끊임없이 유도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리더'인 선조는 결국 입지라는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이후 동서분당의 당쟁을 방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어리석은 군주(暗君)'가 되어 후세의 혹독한 질책을 받고 있다. 율곡이 지하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만한 일이다.


- 강성민 / <2천년의 강의> 저자. 교수신문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인물과 사상>에 우리 시대의 주목받는 저술가들의 책을 분석·비평하는 ‘탈(脫) 아카데미 저자열전'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