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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변영로

金 敬 峯 2009. 7. 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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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수주 변영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 주인공인 ‘민족시인’
[경기일보 2009-7-31]
변정상 씨? 수주(樹州)!
수주가 영어를 배우러 YMCA회관엘 다닐 때의 일화라 한다. 수주가 종로를 지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변정상 씨! 변정상 씨!” 하는 것이었다. 수주는 대로상에서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괘씸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었던 것이다. 수주는 “아니, 선생님. 노망이 나셨습니까? 아버지와 자식의 이름도 구별 못 하십니까?” 하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놈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느냐! 그래.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누구의 씨냐? 당장 그것을 밝혀라!”
앞서가는 수주를 보고 이상재 선생은 장난을 하였던 것이었다. ‘변정상씨!’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변정상(의) 씨’라고 불렀으니 수주 변영로를 부른 것이었다.

가계와 생애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7~1961)는 아버지 정상(鼎相)과 어머니 강재경(姜在卿) 사이에서 3남으로 1898년에 태어났다. 큰 형인 변영만(卞榮晩:1889~1954)은 법률가이자 학자였으며, 둘째형 변영태(卞榮泰:1892~1969)는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이렇게 쟁쟁한 형들 사이에서 수주 역시 우리나라 문학계의 큰 인물로 성장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수주는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1918년 모교인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이때 명예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0년에는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했다. 1933년 귀국해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주간, ‘신동아’편집장 등을 역임했으며, 문우회관(文友會館)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년 ‘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욕’(先聖侮辱)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수주는 1921년 ‘신천지’에 ‘소곡 5수’를 발표하였으며 ‘신생활’·‘동명’ 등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시집인 ‘조선의 마음’을 출판하면서 한국문단의 주목받는 시인으로 부상하였다. ‘조선의 마음’은 일제강점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조선의 마음을 어대가 차즐가?”라는 식의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여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였으며 민족의 팍팍한 현실을 대변하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그의 수필집 ‘명정 40년(酩酊40年):1953’은 당대의 현실을 풍자한 해학적 작품으로 지금도 세인들의 관심 속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형제간의 우애
앞서도 언급되었듯 수주는 쟁쟁한 형들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문학계의 큰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는 남다른 형제간의 우애가 그 한 몫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은 수주의 아들인 변천수씨의 회고록이다.

아버지 삼형제는 하나같이 강직하고 지조가 있는 애국자였다. 하나같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중 아버지가 가장 극열했다. 이광수 서정주 최남선 등 당대의 문인들이 친일(親日)에 앞장서서 부귀영화를 누릴 때도 변영로는 붓을 꺾어가면서 친일을 거부했다. 그 바람에 대학강단에서 쫒겨나야 했다. 또 일본 총독부의 방해로 그의 작품을 실어주는 잡지사가 한곳도 없게 됐다. 수입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처자식들은 가난에 시달려 지내야 했다. 아버지 삼형제인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는 하나같이 어학에 천재로 영어 독어 일어에 능통했다. 그런데 모두가 독학으로 배운 실력이였다. 세분은 한국의 명문대학 교수 학자이건만 만나기만하면 어린애들처럼 티격태격했다. 언제나 막내가 되는 아버지 변영로가 선제공격을 했다.
“영만 형님, 변호사이면 법학이나 똑바로 연구하실 일이지 웬 한문학에다 한글학을 더 보태어 국학(國學)입니까?” 그러면 둘째 큰 아버지 변영태도 협공에 가담하게 마련이다. “그렇구말구, 형님의 국학이 어디 제대로 된 학문인가요?”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큰 아버지 변영만이 아니다.
“너희들의 영문학 강의야 말로 구상 유치가 아니냐? 특히 변영로의 시 ‘논개’는 기생 황진이가 보면 이게 시냐고 코웃음을 칠 껄” 서로 물고 늘어지면서 깔아뭉개고 나면 무에 그리 시원한지 삼형제는 박장대소를 쳐댔다. 그리고 술판으로 들어가 말술을 들이키면서 형제애를 즐겼다.
새삼 형제간의 우애가 서로의 성장에 얼마나 큰 몫을 담당하는 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이 인물을 길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임을 깨닫게 한다.

펜으로 일본을 무찌르다.
수주가 동아일보사에 있을 때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손기정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걸려있었다. 조선의 사내가 일본의 국기를 가슴에 달았으니 그대로 신문의 화보로 사용한다면 민족의 자긍심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수주는 꾀를 내었다. 이른바 ‘일장기 말살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수주 변영로였다.
수주는 신문에 기사를 쓰면서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보여주었다. 우리민족에게는 자긍심을 불러일으킨 기사였으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여간 괘씸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일로 동아일보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수주는 제2탄을 준비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의 자매지였던 ‘신가정’에 ‘세계를 제압한 두 다리’라는 제목으로 손기정 선수가 양정학교의 운동복을 입고 달리는 사진을 권두화보로 대문짝만하게 게재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당신은 참으로 지능범이야. 일장기를 지워 버리는 것이 말썽이 되니까 그것을 아예 잘라버리고 다리만 낸 것이 아니요? 답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이에 수주는 “손기정 선수의 상반신을 잘라버리고 두 다리만을 확대하여 실은 이유를 설명하겠소이다. 손 선수가 마라톤에서 세계를 제패하였다니 그가 무엇을 가지고 세계를 제패했겠소? 머리를 가지고 했겠소? 팔로 했겠소? 눈으로 했겠소? 어깨로 했겠소? 어디 한번 말해보시요. 손기정 선수의 무쇠 같은 두 다리로 달리고 달려 세계를 제패한 게 아니겠소? 그러니 화보의 효과를 백퍼센트 내려고 그의 두 다리만을 확대하여 게재한 것이오”라 하였다. 이에 일경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고 한다.

술과 함께 한 생애
수주는 그의 수필집 ‘명정 40년’에서 “세상은 독립운동에 매진하라 ‘대성질호(大聲疾呼:큰 목소리로 꾸짓음)’하는 판에 자신은 ‘호리건곤(壺裏乾坤:술 항아리 속의 천지(天地)라는 뜻으로, 늘 술에 취한 상태(狀態)에 있음을)’을 부끄러워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박종화는 “세상 됨됨이가 옥 같은 수주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게 한 것이 우리 운명이었으며 난초 같은 자질이 그릇 시대를 만났으니 주정하는 난초가 되지 않고는 못 배겨내었던 때문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우리나라 역대 술꾼의 랭킹을 꼽는 자료에 보니 황진이에 이어 수주가 2위를 차지하였다. 박종화의 표현과 같이 수주가 일제강점기라는 암담한 현실을 술로써 달래고자 하였던 것이라 여긴다.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이 세계의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세상이 암담한 탓이리라.
여하튼 수주의 술친구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술친구인 공초 오상순과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술과 담배로 명성이 자자하던 오상순이 대오각성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수주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오상순이 설교를 하고 있던 교회를 찾았다. 수주도 술을 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주가 교회에 들어서자 “아니 저게 뭐야? 술독이 들어오고 있네!”하면서 설교도 마치지 않는 채 술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공초 오상순의 시 ‘한잔 한잔 한잔 석 잔이 한잔, 아홉 잔도 또 한잔. 한잔 술 따네’를 권주가로 읊조리며 술을 먹고는 다음날에는 이관구, 염상섭까지 불러내어 술통을 들러 메고 자하문 밖 동산으로 올라갔다. 변영로와 오상순, 염상섭, 이관구는 술을 퍼 마시다가, 시를 읊다가, 춤을 추다가, 옷을 벗어 던지다가, 발가벗은 홀라당 알몸으로 암소를 거꾸로 타고 개선장군처럼 종로 보신각으로 내려왔다. 몰려든 시민들은 아우성을 쳤고 말을 타고 달려온 일본순사는 기가 죽어 쩔쩔맸다고 한다.

수주(樹州) 변영로
변영로는 그의 고향인 부천시 원미구 고강동 청룡산에 영면의 터전을 잡았다. 물론 두 형 변영만, 변영태와 생전에 못 다한 우애를 다지면서 말이다. 변영로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고향을 사랑하였다. 자신의 호를 부천의 옛 지명인 수주(樹州)로 한 것은 이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주가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은 바로 자신의 고향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한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나라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자신의 고향을 사랑한다면 어찌 남의 고향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한 진정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는 이라면 어찌 다른 이들의 형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용국 문학박사·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