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창고

이 땅에서 태어나 외국어 공부하는 법

金 敬 峯 2009. 8. 1. 17:29

이 땅에서 태어나 외국어 공부하는 법 - 이창희 (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대학원 교수)

제 1 회 - 읽어야 한다

제 2 회 - 읽어야 한다, 무엇을 & 어떻게

제 3 회 -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말이다

제 4 회 - 통역사의 길

필자 소개

서울대 인문대 불문학과 졸업

Paris Sorbonne대 대학원 (통역학 석사) - 전공 외국어: 영어, 부전공 외국어: 불어

동 대학원에서 D.E.S.S. (Diplome d'Etude Superieure Specialisee: Superior Diploma of special Studies - 통역사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학위) 취득

前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보도본부 동시통역 담당관

前 전 국회 의전통역관

前 김종필 총재 통역 및 대외 업무 담당 비서관

前 한국 외국어대 통역대학원 강사

前 KBS 국제방송국 (Radio Korea International) 영문 뉴스해설 필자

現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대학원 교수

 

제 1 회 읽어야 한다

통역과 번역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항상 당하는 질문 두 가지가 생겼다.

하나는 "외국어를 잘하는 비결이 뭡니까?"이고 또 하나는 "통역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비결은 없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학문에 왕도는 없는 것과 똑같이 외국어에 능통해지는 데도 지름길은 없으니까. 그러나 "비결" 말고 "해볼만한 방법"은 많이 있다.

그리고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첫 번째 질문을 하는 사람들 중 "외국어만 잘하면 통역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달한다. 여기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첫 번째 질문에 초점을 맞춰보자.

 

우선 "외국어는 언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부터 출발하기로 한다. 인간은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인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가를 돌이켜보면 자연히 나온다.

"존칭보조어간", "청유형 종결어미" 등의 문법용어의 개념이나 용례부터 배우고 한국어를 배운 사람이 있을까? 그저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 (아니면 말을 할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반복해서 듣고 흉내를 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게 된 것뿐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을 사과의 실물을 보면서 여러 번 들으면 그 물건의 이름이 사과라는 것이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각인 되는 식이다. "직관을 추상화함으로써 개념은 발생한다"라는 말 그대로다. 그래서 어떤 언어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3,000시간 이상 듣기전에는 입을 떼지 말라."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한가로이 며칠 만에 단어 하나 배우며 우리가 원하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3,000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학교에 다니면서, 아니면 직장에서 이미 불완전한 외국어로나마 입을 떼버린 상태이다.

문제는 또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춘기 이전에 외국어를 배운 사람과 그 이후에 배운 사람은 외국어를 할 때 쓰는 뇌의 부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모국어를 처리하는 부분에서 모국어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처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논리적 과제를 해결할 때 쓰는 부분으로 언어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를 위시해서 사춘기 이후 (초등학교 졸업 후)에 외국어를 배운 압도적 다수의 한국인들은 후자의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후자의 방법은 결국 컴퓨터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컴퓨터의 메모리에는 "address"라는 것이 있어서 컴퓨터는 어떤 정보를 꺼낼 필요가 있을 때 이 address들을 재빨리 검색해서 요구되는 정보와 논리적으로 대조하고 가장 알맞는 것을 꺼낸다. 이 작업을 빨리 할수록 성능 좋은 컴퓨터인 것이다. 한국어로는 아무리 오래 얘기를 해도 피곤하지 않은데 외국어로 좀 오래 얘기를 하면 피곤해지는 것은 이 작업을 고속으로 반복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연구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이것이 100% 옳다고 증명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역시 증명된 생각은 결코 아니지만) 외국어라고 해서 다 컴퓨터 식으로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왜냐 하면 사춘기 이후에 외국어를 배우고도 모국어에 필적하는 구사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수련을 거듭함에 따라 논리의 부분은 줄어들고, 직관의 부분이 커지는 것은 아닐까? 즉 address를 일일이 뒤지던 차원에서 단번에 필요한 address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니면 일일이 뒤지는 것은 같지만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힘은 덜 들게 되는 것일까? 어쨌든 노력을 계속하면 달라지는 (좋은 방향으로) 것은 틀림없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적성에 따라 어디까지, 얼마나 빨리 되는가는 천차만별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인간이 직관을 통해 언어를 처리하는 능력은 아직 컴퓨터가 넘보지 못하는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address를 단순히 뒤지기만 하는 거라면 인간은 컴퓨터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빨리 제시할 능력이 있다는 게 아니라 외국어로 된 문장을 정확히, 그리고 적절한 속도로 (반드시 빨라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구사한다는 의미이고, 이 "구사"야말로 직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발달과정에서 언어분야는 가장 마지막에 도달하는 분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요즘 자주 언급되는 "기계가 하는 번역과 통역"도 단시일 내에 현실화될 가능성은 희박하다.여기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분들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에 관한 한 "저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컴퓨터야"라고 하는 것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직관-논리 비교는 이쯤 해두자. 이것은 어차피 생물학자들의 연구영역이니까.

 

우리는 3,000시간을 듣지도 않았고, 외국어(대부분의 경우 영어)도 사춘기 이후부터 배웠다. (서론이 너무 길어 답답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 물론 독자 중에는 사춘기 이전부터 외국어에 접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때 학원에 다니면서 알파벳을 배우고 쉬운 단어나 문장을 익히는 것이 무익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 정도로는 길고 어려운 문장을 구사해서 자신의 생각을 깊이 있게 피력하거나 통역, 번역을 하는 데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물론 조기교육이라고 해서 취학 전 아동의 머리에 영어 단어를 우겨 넣는 행위는 결단코 배격하지만 말이다. 언어란 결국 생각을 담는 그릇인데, 다섯 살도 안된 어린이의 머리에 생각이 들어 있으면 얼마나 들어 있어서 그걸 한국어로 된 그릇, 외국어로 된 그릇에 따로 따로 담아내라고 볶아댄단 말인가?

제발 어린이 스트레스좀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린이의 본분은 "노는 것"이다. 그 시간에 뛰노는 것이 어린이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나 좋은 일이다. 놀면서 어린이는 많은 것을 직관적으로 경험하고 이를 추상화하여 그 개념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먼저 개념이 있어야 언어가 있는 법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지만 그건 이미 창조주가 세상을 만든 뒤 아니었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위에서 분명해진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노출"의 문제가 된다. 카메라 셔터를 어느 정도로 얼마 동안이나 여느냐가 사진의 성패를 가르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생활이 외국어 환경에 얼마나 오래 드러나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언제 시작되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늦게 시작했고 너무 적게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은 딱 하나, 많이 읽는 것이다.

"읽기"야말로 우리를 노출부족으로부터 끌어내어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 겨우 이 얘기하려고 이제까지 그렇게 긴 서론을 늘어놨어? 별거 아니잖아?" 그렇다. 별거 아니다. 진리는 평범한 데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라. 우리가 아는 수준 높고 복잡한 개념은 어디를 통해 들어왔는가? 귀로 들어왔는가? 우리는 어려운 철학용어, 과학용어를 다 들어서 배웠는가?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은 다 책을 통해 배웠다.

오늘날 컴퓨터가 아무리 발달하고, 정보시대의 전도사들이 책이 없는 세상이 온다고 (마치 예수가 재림한다는 것처럼) 목이 쉬도록 떠들어대도 펄프와 종이 수요는 세계적으로 증가 일로에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아직도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우리가 귀에만 의존해서 수준 높은 언어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왜 나라마다 국민에게 글자를 읽히려고, 즉 문맹을 퇴치하려고 난리들인가? 문자는 반드시 흔적이나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언어가 발명된 것은 음성언어가 세련화의 길을 걷다가 다다른 자연스런 귀결인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하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밥 먹었니? 어디 가니?" 수준의 의사소통 때문인가? 그렇다면 힘들게 없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어려운 것이다.

 

 

제 2 회 읽어야 한다, 무엇을 & 어떻게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당장 향기 높은 문학작품 들을 떠올릴 것이다. 좋다. 그런 데 우리의 과제는 "노출"이라는 데 착안해보자.

무슨 말인가 하면 같은 시간에 많은 페이지를 소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린이가 이청준이나 셰익스피어 말투부터 배우는가? 쉬운 글, 내 수준에 맞는 글이어야 하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내 취향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애소설 좋아하는 사람에게 테크노 스릴러를 갖다주고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초식동물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앞서 문학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작품을 낸 밀란 쿤데라는 사람이 소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소설가는 자신의 생활이라는 집을 허물어 작품이라는 새 집을 짓는 사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학작품에는 따라서 접근방법이 달라야 한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공들여 조탁된 언어를 어떻게 추리소설 읽듯이 마구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가? 그것은 스테이크를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쉬운 글을 읽으라는 것이다. 대형서점 외국서적부에 가 보라. 다른 외국어는 모르지만 일어와 영어로 된 통속소설은 서가에서 넘쳐 복도에 쌓아놓을 지경이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이 얘기에 아직도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하는 얘기는 문학이 아니고 "언어습득"임을 상기하기 바란다.

 

통속소설이 갖는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쉽게 쓰여졌다는 것, 그리고 따옴표 안에 들어간 대화체가 매우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건 그대로 "회화교재"가 될 수 있다.

손에 땀을 쥐고 밤을 새우게 만들도록 재미있는 회화교재가 있다면 어떨까? 이런 책을 10,000 페이지 정도 읽어보라.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가? 대개 통속소설이400-500 페이지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20-25권 정도가 된다. 이게 그렇게 많은가?

물론 처음에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읽어 버릇하면 속도가 빨라진다. 필자는 통역사가 되기 전에 건설회사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일했다. 이 기간의 대부분을 중동 지역의 현장에서 보냈는데 잘 알려진 대로 중동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는 것이 전무한 지역이다. 현지인들에게 "무슨 재미로 사는가"라고 물으면 "알라의 품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 산다"는 대답이 돌아올 지경이니까.

여기서 향수와 무료함을 달래준 것이 통속 소설 이었다. 한번 맛을 들이니 가속이 붙어 한 권을 독파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래서 유럽에 출장을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설을 걸신들린 듯 사 모았다.

당시 필자는 통역과 번역을 업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였다. 물론 필자가 맡은 업무가 현지인과 선진국 기술감독을 상대하는 일이라 외국어를 항상 쓰기는 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중동에서 보낸 기간을 스스로도 모르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항상 과거의 사건이 현재나 미래를 지배하고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필자가 통역사라는 사실이 과거에 아무 생각없이 했던 독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이런 뜻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통역을 하러 갔는데 어떤 회사의 간부사원이 매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들었다. 단순히 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실력이기에 궁금증이 생겨 배경을 물었더니 필자처럼 건설회사에서 해외근무를 오래 하면서 소설 읽기로 여가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읽은 책의 분량을 비교해보니 필자의 중동 독서량은 정말 새발의 피였다. 또 한가지, 필자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그는 스페인 문학을 공부했다는 것도 비슷했다.

3,000시간을 듣는 것이 현실성이 없으므로 읽기로 언어자극을 대체한다는 것이 필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의 골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우선 읽을 때의 마음의 자세를 보자.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을 때도 외국어와 사생결단을 낼 각오로 모르는 단어도 열심히 찾고 중요한 표현은 밑줄까지 그으며 외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3,000시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언어자극, 또는 노출)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고 건성으로 책장만 넘기라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매달리다 보면 부지하세월이라는 얘기다. 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 모르는 단어를 수첩에 적어두면서 배우는가? 모르면 그냥 넘어갔다가 반복해서 접하면 기억에 새겨지는 것이다.

앞서 말한 10,000페이지는 최소한의 수치, 아니 상징적인 수치이다. 그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렇게 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즉, 무슨 이점이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입에서 조금씩 "말이 되는" 외국어 표현들이 나오고 귀도 트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400 페이지 짜리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외국어가 입에서 술술 나오고 안 들리던 CNN이 갑자기 들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CNN 얘기가 나왔으니 '안 들리는' 문제도 한번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리스닝이 안되는건 본토발음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그저 TV만 본다. 그런데 이것은 벽으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것과 같다.

물론 본토발음과 친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전반적인 노출의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리스닝을 해결해주는 것도 바로 읽기라는 얘기다. 읽기와 듣기는 별개라고 생각해왔다면 이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다.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CNN 뉴스가 귀에 안 들어오는 이유는 또 있다. 내용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에 관한 뉴스가 안 들어오는 것은 여기 관련된 개념과 용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도 교육수준이 낮으면 CNN 뉴스를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이해인 것이다. 이 문제도 독서가 해결해준다. 독자 여러분 대부분이 즐겨 읽는 타임, 뉴스위크가 그런 지식과 단어의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소설과 더불어 시시주간지나 전문 월간지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를 꼼꼼히 읽는 버릇도 함께 들여야 한다.

 

그러면 발음 극복은? 간단하다.

우선 들리지도 않는 CNN 뉴스는 꺼버리고 비디오 대여점으로 가서 맘에 드는 영화를 선택한다. 처음에는 자막에 의존해서, 가끔 "나 같으면 이렇게 번역했겠다"라고 자막을 비평하기도 하면서 본다.

두 번째는 "될수있는대로" 자막을 보지않고 본다. 이렇게 자막 의존도를 줄여가면서 대여섯 번씩 본다. 지루할 것이다. 그래도 극복해야한다. 요즘 캡션 VTR이라고 해서 영어 대사를 화면에 띄워주는 방식이 있다던데 이것은 필자가 써본 방법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권하지 못하겠다. 다만, 잘 안 들리는 발음을 글자로 보여주니까 "아하, 이게 그 발음이었구나"하는 식으로 이해시켜준다는 장점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소설 읽기, 시사지 읽기, 비디오 감상)를 얼마동안이나 해야 성과가 있을 것인가? 그건 정말 사람마다 다르다. 적성이 있는 사람이 부지런히 하면 금방 표가 날 것이고, 그 반대일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몇 달, 몇 년을 했는가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몇 시간을 장기간에 걸쳐 투자했느냐이다. 그래서 앞서 인용한 언어학자가 몇 달, 몇 년으로 말하지 않고 "3,000시간"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똑같은 100시간이라도 어쩌다 한번 10시간 X 10 보다는 매일 2시간 X 50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000시간에 집착하지 말자. 이건 그 사람의 학설일 뿐,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 다른 공부나 일은 안하고 여기에만 매달리면 몇 달, 또는 1년 만에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의 현 상황에 비추어 장기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3년, 4년, 10년도 좋다.

결코 서둘지 말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서둘러서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요즘 우리가 겪는 금융, 외환위기도 이 서두름으로 부터 비롯된 게 아닌가 한다.

결국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진리를 또 하나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끈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의 비유처럼 진부한 얘기를 되뇌이진 않겠다.

한 마디만 더 한다면, 캄캄한 굴 속에서 100일간 마늘을 씹으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결국 승리한 웅녀를 상기해보라.

 

 

 

제 3 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말이다.

지난 2회에 걸쳐 "영어 또는 외국어를 잘하려면"이라는 질문에 대답을 시도해보았다.

그 사이에 EBS의 고교생 대상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비슷한 질문에 대답할 기회가 있었다. 중복될 얘기는 생략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얘기만 뽑아보겠다.

대화도중 사회자가 "영어는 단순히 영국인이나 미국인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어"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천만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미식영어만 고집한다. 심지어 "존 케네디"는 틀리고 "쟌 케네디"가 맞는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해보자. 서울 토박이들은 "어"를 "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화"도 "즌화"처럼 발음한다. 그렇다고 "즌화"가 표준말인가? "즌화"를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즌화"가 표준말이라고 우기는 건 우스꽝스럽단 얘기다.

난 반미주의자도 아니고 미식영어에 특별히 반감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미식영어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미식영어만이 옳고 다른 식은 틀렸다"는 생각이 그르다는 말일 뿐이다. 왜 우리가 미국사람만 상대해야 하는가? 이제 세계어가 된 영어는 60억 인류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러니까 수백 수천 가지의 영어 억양이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가 다닌 소르본 대학교의 통역대학원에서는 오히려 미식영어를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Mr. Lee, that's American."이라는 지적은 "Mr. Lee, that's wrong."이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는 미국식 영어도 아닌, 그러나 특이한 영국식 억양도 아닌 "표준영어(standard English)"를 쓸 것을 권장한다. 이것이 세계 공통어인 것이다.

2억 5천만 미국인들을 조금 편하게 해주기 위해 "쟌"을 고집하는 것은 나머지 57억 5천만 인류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미식영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도 지구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쟌"파의 사람들은 "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미국 사람들이 못 알아 듣는다고 주장한다.

이건 한마디로 우스꽝스런 얘기다.

경상도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이 강한 사투리 억양으로 말한다고 그들의 말을 표준말 사용자가 못 알아듣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다. TV에 출연한 외국인이 한국어가 서툴다고 우리가 그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가? 외국인이 "즌화"라고 안 하면 그것이 telephone인지 모르는가? 마찬가지다.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은 웬만한 억양은 알아듣는다.

발음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엽적인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발음이 좀 나빠도 얘기가 논리정연하고 표현이 적절하면 그 편이 환영받는다.

발음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서 공부를 하는데 우선순위를 잘 매겨서 효율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물론 발음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집중적인 교정을 요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닌 것 같다.

 

필자가 자주 당하는 질문이 두 가지라는 얘기를 첫 회에서 한 것으로 기억된다.

첫 번째 질문인 "영어를 잘하려면"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해두자. 지난 회 마지막 부분에서 내 나름의 답을 말했으니까.

이제 두 번째 질문 "통역사가 되려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

이 의문에 대해서도 손쉬운 대답은 없지만, 답부터 말하라면 이것도 "웅녀를 상기하라"가 될 것이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영어)를 잘하면 통역사가 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외국어를"이 아니고 "외국어만" 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일 것이다. 심지어 "너는 어학이 잘되니까 통역사나 해보렴" 식의 얘기도 나온다.

이 세상에 "어학"이라는 학문은 없다.

언어학, 국어학, 영어학 등이 있을 뿐이고, 이들 학문은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문 과학일 뿐이다. 물론 외국어를 잘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고,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는 얘기를 지금부터 하려 한다.

 

통역사를 지향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우선 이것을 묻고 싶다. "여러분이 통역사로 데뷔하면 주로 어느 나라에서 일할 것 같은가?"  이것은 본인들의 희망을 묻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어디서 일할 것으로 판단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대답은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주 통용어는 무엇인가? 주 통용어가 아니라 유일한 공용어라고 해야 할 이 언어는 "한국어"이다.

한 가지를 더 묻겠다.

"여러분이 통역해야 할 연사들은 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가장 현명한 답은 "한국인을 제외한 세계 각국인"이다. 그러면 이들이 쓸 언어는?

압도적 다수가 "세계어로서의 영어"를 쓸 것이다. 그러면 우리 통역사들의 작업 중 80-90%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될 것이다.

반대 방향의 통역은 청중석에서 한국어로 질문이 나올 때 정도인데 그것도 요즘은 별로 많지 않다. 영어로 직접 질문하는 사람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영어로 질문하는 것을 한국인 통역사가 다른 한국인 청중들을 위해 한국어로 통역하는 광경은 더 이상 진풍경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영어-한국어 통역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중요한 언어는 무엇인가? 굳이 대답을 여기 쓰진 않겠다. 이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나는데, 가끔 사람들은 내게 "언어를 몇 가지나 하시나요?"라고 묻는다.

첫 회에 함께 나간 필자의 이력서에 나온 바와 같이 필자는 불문학, 불어의 배경을 갖고 있다.

영어 통역사가 된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 영어로 실무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영어가 불어를 추월해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고, 영어를 "능동언어", 불어를 "수동언어"로 하는 통역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필자가 하는 언어는 세 가지이다.

그런데 "세 가지"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그게 뭐 뭐죠?"라고 묻는다. "한국어, 영어, 불어"라고 대답하면 박장대소를 하는 사람도 있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보이는 반응은 "그럼, 두 가지 군요."이다.

 

한국어는 언어도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앞서 말한 "김치발음"을 뺨치는 사례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외국어-한국어 통역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순전히 양적인 이유로 한국어가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양적인이유도 있지만 여기는 한국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이다. 즉 우리가 봉사해야 할 청중은 한국인들이고, 따라서 통역사가 구사하는 한국어의 질이 뛰어나야 한다. 그냥 말이 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생각해보라. 어법이 계속해서 틀리는 사람의 말을 1시간, 2시간, 심지어 며칠씩 듣고싶은 사람이 있겠는가를.

"중요시하다"를 "중요시 여기다"라고 하거나, "클린턴 미국 대통령" 이라고 해야할 것을 "미국 대통령인 클린턴"이라고 한다거나 하는 일은 한 두 번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10번이 넘어가면 통역사로서의 기량 전체를 의심받게 된다.

필자가 소르본 통역 대학원을 다닐 때 두 명의 프랑스 여학생이 있었다. 필자가 1학년 때 이들은 2학년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가끔 보면 둘 중 A라는 아가씨는 사교적이고 말도 잘하고 (불어가 모국어였다) 용모도 출중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별로 시선도 끌지 못하고 말수도 적던 B라는 아가씨가 수석 졸업을 했고, A는 아예 졸업시험에 합격도 못했다.

필자가 의문을 가진 건 당연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A는 불어 어법에 문제가 있었던 반면, B는 모국어 구사가 거의 완벽했다는 것이다. 어느 언어권이든 통역사는 이처럼 완벽한 모국어 구사력을 요구받는다.

 

통역사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일이 한두 시간이 아니라 며칠, 몇 주씩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통역은 철두철미한 서비스업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객인 청중을 노동시켜서는 안된다. 즉 틀린 어법을 써서 청중으로 하여금 그게 뭔가를 생각하는 노동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실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이 남의 나라이다. 그래서 잔뜩 긴장해 있는데 말이 통하는 통역사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만으로 감지덕지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외국어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앞서 발음에서 말한 것처럼 한정된 시간을 여러 가지 공부에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제 4 회 통역사의 길

모국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외국어인데,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앞서 충분히 얘기했다고 생각되므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통역사가 되려는 사람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도 앞서 말한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언어에 대해 들여다보았으니 다른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른 요소"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다. 사실 언어란 의미를 담아내 는 그릇이기 때문에, 의미를 파악하면 언어는 저절로 따라오는 법이다. 예를 들어 보석의 연마에 관한 연설을 통역하거나 문헌을 번역한다고 하자. 그 연설, 문헌이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중요한 것은 보석의 연마라는 활동에 대해 아는 것이다.

상식을 동원해서 생각해보자. 보석 업자는 보석을 왜 연마하는가? 보석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어 높은 값을 받기 위해서 이다. 보석이 아름다워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빛을 가능한 한 많은 방향으로, 많은 양을 반사 시키면 된다. 여기서 굴절률, 반사율, 반사각, 전반사, 회절, 산란 등의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보석에 관한 용어가 아니라 광학에 관한 용어이다.

보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보석을 구성하는 광물도 알아야 하지만 현란한 색을 내며 보석의 표면에서, 혹은 내부를 통과한 후 반사되는 빛의 성질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위에 나열한 용어들의 개념을 이해하고 통역이나 번역에 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것이다.

 

파리에서 통역공부를 할 때 들은 얘긴데, 어떤 유럽 통역사가 통역을 하다가 "카드뮴"이라는 금속원소를 계속해서 "카드미늄"이라고 발음한 적이 있다고 한다. 50여 번을 이렇게 하고 나니 청중들이 질려서 더 이상 그의 통역을 듣지 않게 되었다. 통역의 내용은 아주 정확했다고 한다. 이 경우 청중은 "가장 중요한 원소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내용전달을 잘하고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싫다는 교포를 우격다짐으로 끌어다가 통역을 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회의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다. 교포는 영어를 잘하는 것이지 주제와 관련된 지식까지 풍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교포도 물론 나름의 전문분야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분야가 아니면 숙달된 통역사가 아닌 이상 제대로 의미 전달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희생자 교포도 잊어버리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까 혹시 주변에 교포가 있더라도 "영어 잘하고 국어도 어느 정도 하니까 통역공부를 해봐라"는 식의 권고를 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숙달된 통역사"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어와 외국어 구사력을 갖추고 있고, 다방면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짧은 기간 안에 집중적으로 특정 분야를 공부해서 "한시적 전문가"가 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한시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제한된 기간, 즉 필요한 기간 동안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단기적으로 전문가 내지는 준 전문가가 되려면 지적 호기심이 매우 왕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아는 과정이 고문일 테니까.

통역사의 모국어와 외국어 구사력이 양 팔이라면, 주제 지식은 두 다리에 해당한다.

야구선수를 보자. 팔 힘이 아무리 강해도 다리가 튼튼히 받쳐주지 못하면 좋은 타격은 절대 안 나온다.그러나 체격조건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만으로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비도 잘해야 하고 타격 감각도 있어야 한다. 즉 야구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질 얘기가 나온다. "아무개 선수는 야구선수로 타고 났어"라는 말은 그가 선천적으로 야구감각을 부여받은 행운아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어느 분야에나 있다. 통역이나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소질이고, 어디부터가 노력인가? 여기에 대해 가장 옳은 답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지능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대한 논쟁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는 교육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다 안다. 그리고 선천설을 뒷받침하는 증거와 후천설을 떠받치는 증거의 설득력과 분량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요즘 인간의 능력, 정신적 특성 등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속속 발견되어 선천설이 우세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증거들도 연이어 발견되고 있다.

사실 필자는 이 유전설을 별로 믿고 싶지 않다. 우리의 모든 것이 태어나면서, 아니면 그보다 앞서 수정의 순간에 이미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취를 향한, 개선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이런 예정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면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운명론이 개가를 올리기는 것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 뇌가 다 발달한 뒤에도 -- 요즘광고에 보면 인간의 뇌는 24개월 안에 거의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 훈련에 의해 뇌의 "성능"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회에서 컴퓨터의 address 찾기 얘기를 했는데, 뇌를 자꾸 훈련하면 새로운 연결조직이 생겨 이른바 머리 속에 "지름길"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지름길이 address를 빨리 찾게 해줄 것은 당연하다.

물론 어떤 한 가지 분야에만 뛰어난 적성을 타고나서 다른 분야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적성이 언어 서비스가 아닐 수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직업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적성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든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직업은 아니다. 보람도 있지만 그만큼 힘들고 긴장되기 때문이다.

힘든 것은 알지만 그래도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어능력, 다방면의 지식 같은 것을 갖추려면 얼마나 걸릴까 하는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도 사람마다 달라서 가장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제까지 독자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는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필자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놓고 "정답은 모두 '모르겠다'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아 정말 면구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다.

 

도전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말을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서두르지 말라"이다. 다시 웅녀를 상기하라. 그녀가 성공한 것은 호랑이처럼 성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 공부라는 것은 -- 지식의 축적도 마찬가지지만 -- 세월이 필요하다. 소나기 공부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분야이다.

그리고 공부에 쏟은 세월을 몇 달, 몇 년으로 세지 말고 시간으로 세는 편이 좋다. "10년 영어공부를 해도 맨날 그 자리야. 난 안돼." 그는 왜 안되는가? 1주일, 2주일에 한번씩, 아니면 한 달에 한 번씩 그저 영어 때문에 좌절을 겪은 날이나 그 다음날 책 좀 보다가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루에 2시간 X 365일 = 730시간. 이런 계산이 나와야 한다. 2시간 공부할 형편이 못되어 30분씩 한다고 치자. 0.5시간 X 1000일 = 500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상당한 시간이다.

 

이렇게 해서 준비가 되면 사람들은 통역대학원이라는 곳에 응시한다.

이 통역대학원이라는 곳은 비유하자면 야구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지 체력단련을 시켜주는 곳이 아니지만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볼 때 체력이 충분한 학생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후자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체력단련을 하고 들어가면 매우 유리할 것은 당연하다.

통역대학원 교수들은 대장장이에 비유할 수있다. 쇠가 충분히 달아 있으면 대장장이도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청룡도, 엑스칼리버 등의 명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쇠를 달구느라 한편에서는 풀무질을 하면서 한편에서는 덜 달구어진 쇠를 마구 두들겨대면 대장장이 힘은 힘대로 빠지고 칼을 칼대로 제 모습이 안 나온다. 그러니까 "내 친구는 이번에 응시한다는데 나도 가야지"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통역사가 되기 위한 긴 여정(많은 사람들이 2년이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졸업에 필요한 최소 기간이고, 제대로 프로로 인정 받으려면 졸업하고 나서도 2-3년간 실전에서 훈련을 쌓아야 한다)에서는 출발이 빠른 사람이 목표지점에 먼저 도착한다는 보장이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충분히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의 문은 더 널찍이 열려 있을 것이다.

출처 : 함께 영어를 배우자  |  글쓴이 : sm0102 원글보기


'자료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생을 가치있고 보람있게 사는 방법   (0) 2009.08.17
인간의 마음에 응답하는 물의 신비   (0) 2009.08.04
수주 변영로  (0) 2009.07.31
유관순의 유언  (0) 2009.07.21
어느 작은성당 벽에 적혀있는 글  (0) 200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