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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옛이야기-한국인의 민속

金 敬 峯 2010. 1. 3. 21:46

생활 속의 옛이야기-한국인의 민속                                      

 

계모임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며 결속력이 강한 협동조직이 계모임이다. 계는 시집장가 가는 잔치나 사람이 죽은 큰일, 마을길을 닦거나 다리를 놓을때, 혹은 같은 나이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모으고 유지되다. 그래서 계모임은 다른 어떤 협동조직보다도 그 활동이 활발하고 마을사람들의 참여도 높다.

평소에 몇몇이 모여서 쌀이나 돈을 조금씩 계기금을 내고 그것을 이자놓아 늘렸다가 계원들이 어려울때 목돈으로 도와준다. 계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공통된 욕구나 관심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지지만 그 구성원들은 서로 비숫한 나이와 신분, 형편이 비숫한 이웃끼리 모여 만든다.

상포계는 나이가 많이 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자녀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기 위해서 만들고, 동갑계는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친목과 오락을 도모하고 어려울때 돕기 위해서 조직한다. 혼인계는 결혼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식들 시집장가 갈때을 대비해서 모은다.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일은 많은 비용과 물자가 들어 혼자서 준비하는데는 벅차다. 그래서 평소에 혼인계를 만들어 자녀들의 결혼에 필요한 비용이나,  쌀 술 등의 음식을 부조 받아 혼인하는 계원의 부담을 줄여준다.

오늘날처럼 저축하는 은행이나 새마을금고 같은 금융기관이 없던 시절에는 이러한 계모임이 은행의 역활을 대신했다. 계금을 조금씩 내어 적립해 두었다가 혼인이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때에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이웃간의 협동조직인 계모임은 마을생활에서 그 효용성이 매우 크다.

요사이 도시사회에서 성행되는 돈계가 흔히 계모임의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잘못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나, 예전 대부분의 마을 계모임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이웃과 상부상조하려는 아름다운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고무신 자동차놀이

텔레비전과 전자오락, 겜보이가 오늘날의 아이들 놀이감이라면, 예전에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물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폐품 등을 이용한 사금파리(소꿉놀이), 깡통(깡통차기), 돌조각(고누,공기놀이, 비석차기), 굴렁쇠(굴렁쇠돌리기), 풀(호드기불기,풀싸움, 풀치기, 풀각시), 새끼줄, 나무막대기,고무신짝 등이 놀이감의 전부였다. 전통사회에서 아이들의 놀이는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도구를 필요로 하는 놀이들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 놀이감은 돈으로 구입하는 고급 장난감으로 아이들 스스로 구하거나 만들 수도 없으며, 고장이 나면 수리하기도 어렵다. 과거의 놀이감 가운데 발에 신고 다니는 고무신 자동차놀이를 이야기하면서 아이들 놀이의 공작성, 창조적 즐거움, 무한한 상상력의 일면을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라는 동요가 있다. 어린 시절 새 신을 새로 사서 신는 날의 기분은 정말 하늘에 닿을 것 같이 가볍고 신나는 일이었다.

낡은 고무신이나 검은 운동화가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다떨어져야 그제샤 아버지는 다음 장날에 새 신을 사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5일마다 열리는 시장에 가야만 신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손꼽아 다음 장날을 기다린다. 어린이는 장에 따라 갈 수가 없기에 신을 직접 신어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장에 가실 때 손 뼘이나 지푸라기로 발을 재어서 눈대중으로 사신다. 보통은 아이가 발이 클 것을 예상하고 더큰 것을 사는 것이 예사이다. 새 신을 기다리는 장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을앞산 언저리까지 장에 가신 아버지를 마중하러아이들은 들락날락한다.

고무신은 우리 어린 시절에는 훌륭한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요즘처럼 밀기만 하면 저절로 굴러가며 스스로 소리까지 내는 장난감 자동차는 아니었지만 고무신  한 켤레는 더나위 없는 좋은 장난감 자동차였다. 한짝 위에 다른 한 짝을 약간 구부려 끼우면 자동차가 되었고, 한 짝을 둥글게 말아 다른 한 짝 앞코에 끼우면 아주 훌륭한 짐차가 되었다. 또 고무신 두 짝을 앞코끼리 연결하면 기차가 된다. 개울가나 모래톱에서 고무신 한 켤레로 여러 가지 자동차의 모형을 두루 만들어 거기에 따른 자동차 소리를 음성으로 묘사해가며 하루종일 신나게 놀았다.

고무신 하면 하교길 뜀박질이 떠오른다. 시오리 학교 길에서 돌아올 때면 으례껏 뛴다. 도시락이 든 덜그럭거리는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두 손에 고무신 잡고는 학교 문에서 집까지 줄곧 뛰어서 온다. 고무신을 신고 뜀박질을 하면 양말을 신지 않던 그 시절에는 땀이 많이 나서 미끄러지기에 고무신을 아예 벗어 들었다.

고무신을 처음 사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고무신은 모양이 같고 단지 크기에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잔치나 모임에 가면 신발이 바뀔 경우가 허다하다.그래서 고무신을 처음 사는 날은 소죽솥 앞에 앉아서 철사줄을 달구어 고무신 안쪽에 *나 +표 등으로 자기 신발에 새긴다. 잔치집에 서 우리 할머니들은 봉지에 자기 신발을 꼭 싸서 직접 관리를 하는 이유도 아마 신발의 외형이 똑같은 고무신에서 나온 풍속일 것이다.

해방이후부터 애용되기 시작한 고무신은 검은 운동화세대를 거쳐 오늘날의 유명 메이커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어린이들은 고급 운동화를 반도 안 떨어졌는데도 새로 사달라고 조른다. 새 신 하나 신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과 기대 속에서 마음에서부터 새 신을 신었던 그 어린 시절의 고무신, 그 고무신은 또 훌륭한 놀이감이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의 놀이는 이렇게 주위에서 쉽게 구해지는 것을 놀이감으로 하여 자발적이고 생동감이 있으면서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북돋운다. 그래서 아이들 시대는 놀이의 시대라 부르는가 보다

잡귀의 출입을 막는 "금줄"

금줄은 아기를 낳았을때 대문에 내거는 것을 비롯하여, 장을 담글때,잡병을 쫒고자 할때, 마을 공동제사를 지낼때 효험을 거두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정초나 대보름에 마을을 지키는 동신에게 제사를 지낼때는 제관집을 비롯하여 마을입구,동제당 근처에 금줄을 치고 황토흙을 뿌려 잡귀들의 접근을 막는다.

금줄은 사용되는 목적에 따라서 왼새끼줄을 꼬아서 사이사이에 한지, 고추, 숯, 생솔가지 등을 끼워서 치게 된다.

왼새끼는 귀신들이 좌(왼쪽)를 싫어한다는 속신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부정을 배제하고 신성한 장소를 표시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왼새끼줄을 주위에 둘러친다.

아이를 낳았을때는 산모와 신생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금줄을 문전에 매는데, 아들인 경우에는 금줄 중간중간에 생솔가지와 숯 그리고 빨간고추를 끼워서 만든다. 딸인 경우에는 생솔가지와 숯, 종이를 끼워서 금줄을 만든다. 붉은 고추는 밝은색으로 귀신을 쫓는 효험이 있고, 그 맛이 또한 매워서 나쁜 기운을 쫓을 수 있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다.

금줄에 숯을 끼우는데 숯은 땅 속에서도 썩지않고 습기를 먹으며, 또 귀신에 가장 무서워 하는 불의 씨이기 때문에 금줄에 꼭 숯을 사용한다. 생솔가지는 솔잎이 침엽수이며 1년 내내 항상 푸른 상록이어서 그 힘을 인정하여 금줄에 단다. 흰종이는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화폐는 어떤 물건이라도 살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그 힘을 인정하여 금줄에 매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힘을 가진 금줄을 일단 치면 근방 사람들은 조심을 하고 출입을 삼가며, 특히 몸과 마음이 부정한 사람은 드나들어서는 않된다.

가뭄에 단비를 바라는 농심(農心)

인공적인 수리시설이 미비했던 예전에는 적당한 때에, 적절한 양의 비가 얼마나 오느냐에 따라서 배부름과 배고픔이 교차되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에 큰 피해가 예상될 때 임금은 물론 지방의 수령과 농민이 하나가 되어 비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옛부터 사람들이 많은 제언(堤堰)과 보(洑)를 만들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설들만으로 가뭄에 대응하기는 어려웠다. 가뭄이 든 해에는 농민들이 두레로 둠벙에 고인 물을 품어 올리고, 조그만한 샘의 물을 퍼나르는 일에 매달렸다. 특히 여는 작물보다 휠씬 물이 많이 필요한 수도작의 경우, 물을 확보하기가 여의치 않은 농민들은 벼 대신에 가뭄에 강한 다른 곡식을 심기도 했고, 호미로 논흙을 파내고, 흙 속 수분량에 맞을 정도로 모포기 수를 줄여 심기도 했다. 이렇게 하고 며칠 더 비를 기다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듯 농민들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하여 절박한 수단과 도구을 동원해야만 했다. 모내기가 한창 벌어지는 음력 5월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하천이나, 보에 저장된 물을 용두레, 두레, 맛두레, 무자위 등으로 온동네가 밤낮없이 물을 푼다.

용두레는 배(船)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두레로서, 통나무를 길게 파낸 것과 나무 판자로 바닥과 양옆면을 이어 붙인 것 등이 있다. 중간 부위에 줄을 매고, 이 줄을 길다란 자연목으로 만든 삼각지주에 연결시킨다. 작업을 할 때에는 삼각지주에 매달린 용두레의 손잡이를 잡고 앞뒤로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물을 퍼올려 논에 붓는다.

두레는 특히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에 대는 데 쓰는데 용두레로 퍼올리는 물에 비해 수면(水面)의 위치가 깊다. 장대 한 끝에 물을 퍼담을 통을 단 형태이다. 이 장대를, 한 쪽이 논의 둑에 얹혀지고 다른 한 쪽이 삼각받침대에 얹혀진 둥글고 긴 나무의 중간 부위에 울려 놓은 다음, 노를 젓듯이 장대를 밀었다 당겼다 하여 물을 퍼올려 논에 물을 대는 방식이다.

맞두레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에 대는데 유용하다. 바닥이 좁고 위가 넓은 사각의 나무통 네 귀퉁이에 줄을 갈아 놓은 형태이다. 두 사람이 각각 두 줄씩 잡고 마주 서서 물 속에 두레를 드리운 다음 줄을 당기며 물을 퍼담아 논에 댄다. 물을 퍼서 논에 부을때  매번 한사람이 선창으로 숫자를 세고 다른 사람들이 후렴을 부르는 관습이 있다.

무자위는 중심 축(軸) 주위에 수많은 나무판들을 바퀴모양으로  붙여 놓고 받침대를 설치한 형태이다. 받침대에 부착된 두 개의 긴 막대기를 의지하여 두 발을 번갈아 가며 나무판들을 밟아 돌리면 바퀴가 돌면서 나무판들이 물을 퍼올리게 되어 있다. 퍼올인 물은 주둥이 모양으로 된 홈통을 따라 흘러서 농경지로 들어 간다. 수량(水量)이 비교적 풍부한 수로(水路)의 물을 대는 데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농구로 물을 퍼도 오뉴월의 땡볕에서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에 물대는 데는 태부족이다. 가뭄은 논밭을 말라붙게 하고 작물을 고사(枯死)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빈번하게 가뭄이 찾아 들어 왔고, 그때마다  농사가 망쳐지고 사람들은 굶주렸으며 민심이 피폐해지곤 했다.

모를 심기 위해 혹은 심어 놓은 모가 타지 않도록 하려고 밤낮으로 물을 푸면서 온갖 노역을 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 부근에 있은 산정상이나 하천변에 제단을 마련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껏 온동리가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낸다.

엣날에는 큰 한발이 계속되면 나라에서 임금님이 제주(祭主)가 되어 기우제를 지냈다. 또한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느님이 벌을 받아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하여 임금님이 몸소 음식을 전폐하고 궁궐에서 초가로 옮겨 거처하였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민가에서는 명산의 산봉우리나 큰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그 일대를 신역(神域)으로 정하여 부정한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고,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제물로는 닭, 돼지머리, 술, 과실, 떡, 포 등을 올리는데, 어떤 지방은 무녀의 가무까지 곁들인다. 민간에서는 피를 뿌려 더럽혀 놓으면 그 못을 씻기 위해 비를 내린다고 하여, 개를 잡아 그 피를 산봉우리에 흘려 놓는 일도 있었다.

산천기우(山川祈雨)는 천신 또는 용신에게 비오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기우제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산정산이나 강,못,늪, 보 등에서 지낸다. 옛날부터 산꼭대기나, 못 등에서 마을 공동제를 지내는 곳이면 한발 때마다 기우제를 지낸다. 다만 기우제 지내는 곳으로 산제당, 서낭당은 피하여 선택했다.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는 천신인 산신이 내려오고, 용신과 수신이 거처는 신성한 곳이 된다. 그런데 이런 곳에 가장 불결한 짐승들의 피를 뿌리거나 시체를 던져서 천신,산신,수신,용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하고, 그 노여움이 비를 뿌리게 하는 형태의 기우제도 있다. 돼지 또는 개의 피를 깊은 못이나 강, 또는 늪에 뿌리거나 머리를 넣는 방법이다.

옛날부터 "가물 때 키를 씻으면 이에 응하여, 비가 온다"는 데서 비롯된 기우 방법이 있다. 농가에서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키는 부정한 것이 붙어 있으므로 이것을 내나 강물에 씻으면 용신이나 수신이 노하여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인들이 하는데, 냇가에 나가 키로 물을 떠올려 뿌리며 "비요! 비요!"한다.

사람들은 명산(名山), 명소(名所), 성소(聖所)로 알려진 곳에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만약 이곳에 묘가 자리하면 공간의 질서가 어지럽혀지며 부정이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비를 내리지 않는 것도 이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몰래 자리잡은 묘들을 파내는 일이 곧 가뭄을 멎게하는 해결책이었다. 이 일은 마을 부녀자들이  맡았으며, 부녀자들은 산을 뒤져 묘들을 찾아 내고 호미로 파헤쳐 관을 꺼낸 후에는 그 자리에 소변을 보기까지 했다. 소변을 보는 것은 비를 관장하는 신들로 하여금 더러워진 공간을 씻기 위해 비를 내리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한발이 계속되면 집집마다 병(甁)에 물을 넣고 버드나무 가지로 마개를 해서 꺼꾸로 매달아 놓으면 가지와 잎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렇게 물이 떨어지듯 비가 오도록 빈다. 또 냇가에 나가 모래를 긁어 모아 두둑하게 쌓고 거기에 버들가지를 꽂아 물을 뿌리고 버들가지에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비가 오도록 비는 것도 있다.

이외에 무당을 불러서 기우하고, 장터를 냇가로 옮겨 시장를 열어서 기우하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보다 무서운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물푸는 도구를 만들어 내어 단 한방울의 물이라고 논에 대고, 산천에 기우하는 등  처철한 생존의 싸움을 하였다. 댐이 건설되고 수리시설과 양수시설이 완비된 오늘에도 비가 오지않으면 가뭄으로 걱정과 고생을 하는데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그 옛날이야 말하지 않아도 가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래서 가뭄에 단비가 내리면 우산도 쓰지 못하게 하고 비를 그대로 맞았다.

지난 봄부터 가뭄이 심했다. 아마 올해도 어느 시골에서는 기우제를  지냈을 것이다.

옷감을 짜는 길쌈일

옛날에는 옷감을 주로 어머니들이 베를 집에서 짜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삼, 모시, 목화, 누에 등에서 실을 뽑아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의 옷감을 짰다. 이렇게 옷감을 짜내는 일을 길쌈이라고 한다.

아녀자들의 길쌈은 남정네들의 농사일과 함께 그 옛날부터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으로 중요시 여겼다. 신라에서는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7월 15일 부터 서울 안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길쌈내기"를 했다. 한 달 만인 8월 한가위에 승부를 가리고 한 판을 놀았다는 이 기록에서 볼 때, 우리 조상들은 길쌈의 보급과 기술향상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전통적인 우리의 옷감은 여름철에 주로 입는 삼베와 모시, 목화에서 만든 무명, 누에의 고치 실에서 뽑은 명주 등이 전부였다. 요사이는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서 옷을 직접 사서 입고 거의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봄에 직접 삼씨를 뿌리고, 그것을 수확하여 삼을 삼고(실을 만들고), 삼을 날고(실을 정리하고),베틀로 삼을 짜서 우리 조상들은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러한 길쌈은 무척 손이 많이가고 지루하고 고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길쌈을 하면서 길쌈노래를 부르거나 길쌈두레라고 해서 여럿이 모여 서로 도와 가면서 길쌈을 했다.

길쌈을 해서 옷감을 짜고, 자와 가위, 실로  재단을 하여 옷을 직접 만들고, 풀을 빠닥하게 멕여서 숯불 다림질을 해야만 한 벌의 옷이 되는 것이다.

요새는 먼저 어떤 상표인가를 보고 그 옷의 좋고 나쁨을 가름하는 척도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길쌈을 얼마나 곱게 짜서 풀을 멕이고 어떻게 솜씨 있게 다림질을 했느냐를 보고 옷입는 맵씨를 칭찬했다.

김장품앗이

겨울의 반양식은 김장김치다. 김장은 겨울 3-4개월 동안 채소 공급원을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이다. 10월 상달이면 농사일은 거의 마무리 되고 이제 농촌에서는 겨우내 쓸 땔감 준비와 소먹이 장만, 장담그기 위해 메주를 쑤는 일과 김장김치를 하면 된다.

김장김치는 배추, 무우를 주재료로 한다. 미나리, 갓, 파, 생강, 마늘과 같는 향신미가 있는 채소를 부재료로 사용하고 소금, 젓갈, 고춧가루로 간을 맞추어 겨우내 잘 시지 않도록 보관해 두고 먹는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김치는 어느 지역, 어느 가정에서나 필요한 음식이다.

우리 식생활에서 김치가 빠진 밥상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만큼 김치는 우리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식품이자, 필수 영양소의 주요 공급원이다. 김치의 맛은 각종 야채류의 신선항 향미, 소금의 짠맛, 젖산의 신맛, 향신료의 매운맛,젓갈의 김칠맛 등이 서로 어우러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의 걸작품이다.

김장을 담그는 가장 적당한 시기를 경기도에서는 입동(立冬) 전후 3일이라고 한다. 김장을 담그는 데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장철이 되면 대소가의 여러 동서간, 또는 가까운 친지간, 한마을 이웃간에 김장하는 날이 중복되지 않도록 날짜를 잡아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김장을 담근다.

일단 김장거리가 장만되면 배추의 겉잎과 고랑이를 떼고 소금물에 절인다. 배추를 절이는 동안에 양념거리를 다듬고,무우를 손질해 배추 속을 준비한다.  알맞게 절인 배추를 3-4명이 물가에 둘러앉아 차례로 건네가면서 헹구어 큼직한 체반에서 물기를 뺀다. 그런 다음 한사람은 배추를 갖다 나르고, 다른 한사람은 절인 배추와 양념을 자배기에서 머무린다. 또 다른 사람은 다 만들어진 김치를 김장독에 차곡차곡 가져다 놓는다.

이러한 김장 품앗이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네 어머니들은 잘 활용을 한다. 겨우내 두고두고 먹을, 그리고 혼자 담그기엔 벅찬 김장김치를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들끼리 모여 김장품앗이를 통해 넉넉히 해결해 가고 있다.

끝맺음을 중시하는 풍속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쯤이면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이 단골로 등장하게 된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은 섣달이 되고, 그 마지막 날은 그믐이 된다. 우리 풍속 가운데 섣달 그믐날이 마무리하는, 끝맺음하는 대표적인 날이다. 제석, 제야라고도 하는 섣달 그믐날은 옛날에는 궁중에서 연종방포(年終放砲)라 하여 대포를 쏘았으며, 지금은 보신각에서 33천에 울려퍼지는 재야의 종을 33번 친다. 이 날까지 연중의 거래 관계를 청산해야 하며, 밤 12시가 지나면 정월 보름까지 빚 독촉을 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 속담에 '설은 들와 새고, 보름은 나가 샌다'라는 말이 있어서 이 날은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은 집으로 귀향하고, 이웃에 빌려오거나 빌려준 농기구나 세간살이들은 새해들어서 다시 빌려야  할지라도 섣달 그믐날은 반드시 돌려 주어 자기집에서 새해를 맞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섣달그믐날의 풍속은 마루리만을 짓는 날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 새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 세찬이나 차례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여야 하고, 남자들은 집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특히 집 주변의 외양간과 거름을 퍼내어 설맞이 준비를 하는데, 이는 묵은 해의 잡귀와 액을 모두 물러가고 신성한 가운데 새해을 맞이하려는 마음의 준비이다. 그리고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난 쓰레기를 태우는데 이것은 잡귀를 불사른다는 신앙적 속신이기고 하다.

이날 또 1년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사히 지나게 되었다는 뜻에서 사당에 절하고 어른에게도 묵은 세배를 올린다. 이날 밤에는 곳간, 장독대, 축사 등 집안의 곳곳에 불을 밝혀 놓고 잡귀의 출입을 막고자하는 수세(守歲)를 한다. 이날 일찍 잠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 그렇게 안되기 위하여 재미있는 놀이나 고담 등을 읽고 들어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잠을 참지 못해서 잠에 들면 얼굴에 밀가루 칠을 하여 아침에 일어나 보고 서로 웃는다.

섣달 그믐날의 풍속은 한해를 마무리하면서도 새해을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날인 것이다.

호미씻이 나 서당의 책거리도 농사일과 공부를 마무리하는 풍속의 하나이다.  호미씻이는 여름농사가 거의 끝나 밭이나 논을 매는 호미가 필요없게 되어 씻어 둔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대개 음력 7월경 날을 잡아 하루를 즐기는 농가의 축제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시냇가나 산기슭의 나무그늘에 모여 징, 장구, 괭꽈리, 날날이, 북 등을 치면서 흥겹게 하루를 즐긴다. 또 마을에서 농사가 제일 잘 된 집 머습을 뽑아 우두머리로 삼고, 그 머슴에게 삿갓을 씌우고 황소에 태워 머슴들이 에워싸고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을 돌아 다닌다. 그 집의 주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주식을 한턱 내게된다. 이 날 주인들은 머슴에게  옷 한벌과 매기돈이라 하여 약간의 돈을 준다.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한 권 다 배우고 나면 학부모들이 훈장님께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이것을 "책거리"라고 한다.책거리는 훈장님의 노고에 보답하고 학동의 공부를 더욱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이때는 반드시 송편을 장만했다. 송편은 속이 비어 뚫려져 있다. 학동들의 지혜구멍이 송편처럼  펑 뚫리라는 바램에서 준비하는 것이다.

요사이도 한학기가 끝나면 방학이 되기전에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수박이나 떡을 준비해서 선생님께 감사하는 책거리를 한다. 이러한 풍속은 바로 서당의 책거리에서 연유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하여 시작을 중요여겼는 반면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니 용두사미(龍頭蛇尾)니 하여 끝을 흐지부지하게 끝내는 것을 경계한다. 책거리나 호미씻이는 둘다 끝맺음을 중시하며 그 마침을 감사하는 민속이다. 우리조상들은 시작을 중히 여겼지만 마무리도 철저하게 매듭을 지었다.

이제 "생활 속의 옛이야기"를 마무리 해보자. 삼년동안 줄곧 옛날의 일상생활 풍속을 가지고 이 난(欄)을 이끌어 왔다. 여기서 이야기된 것은 일상생활 속의 삶의 지혜와 방법이 숨겨져 있다.

날로 사라져가는 민속문화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재조명하는 일은 현대를 살아나가는 우리들의 책임인 동시에 사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민속문화를 통하여 조상들의 삶을 이해하고 거게에 담겨진 선조들의 생활슬기를 배워야 한다. 전통적인 것은 비과학적이요, 불합리한 것이라 단정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옛 것}이라면 모두가 보잘 것 없는 것, 쓸데 없는 것, 허무맹랑한 것, 하루 속히 떨쳐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승적인 것이라 하여 그것이 모두가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특히 민속문화는 우리 조상들이 오랜 생활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삶의 지혜요, 기술이다.

"옛 말 그른데 없다" 는 속담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옛 것 하나하나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와 오묘한 진리가 함축되어있다. 많은 민속문화에는 우리들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지혜와 방법이 숨겨져 있다.  그러한 삶의 지혜와 방법을 밝혀내고 그것을 메말라가는 현대생활에 조화시켜 현대인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일이 오늘의 우리들이다.

조상들의 날씨점과 첨단 일기예보

모처럼 새 옷을 입고 외출을 했거나, 중요한 큰 행사를 앞두었는데 비가 내려 하늘을 원망한 적이 종종 있을 것이다. 날씨만큼 우리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도 드물 것이다. 특히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날씨의 예측이 생존과 맞물려 있어 초미의 관심사였다.

요즘처럼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해서 비올 확률까지 그날의 날씨를 예보해주는 기상청이 있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다음날의 날씨를 알 수 있었을까?

근대에 와서 기압.기온.습도.바람.구름 등의 기상요소들을 측기(測器)로 재고, 그 자료를 분석하여 과학적인 일기예보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컴퓨터.팩시밀리.기상위성 등 첨단과학기재들을 활용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일기예측은 요사이처럼 정확하고 장기적인 예보일 수는 없었으나, 해와 달, 별, 바람, 구름의 상태나 그 변화, 또는 여러가지 생물의 특이한 행동 등을 보고 다가올 일기의 변화를 예측했다. 이러한 날씨점은 일상생활에서 관찰과 경험에 의한 예측이었고 어느 정도 과학성과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개구리가 처마 밑에 들어오면 장마진다.
개미가 자기 집 구멍을 막으면 비가 온다.
개미가 이사하면 비가 온다.
고양이가 얼굴 씻으면 비가 온다.
두꺼비가 나오면 장마가 진다.
소나무에 황새가 앉으면 비가 온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제비집에 제비새끼가 떨어지면 장마가 온다.
개가 풀을 뜯어 먹으면 그 해에 가뭄이 온다.

동물들의 감각은 사람보다 휠씬 더 예민하다. 특히 개미, 황새, 제비등은 다른 동물보다 기압의 변화에 예민해 사람보다 먼저 인지를 하고 특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 굴뚝의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깔리는 것이나 기압에 예민한 제비가 땅에 가까이 나는 것은 저기압때문이다. 저기압은 비를 오게 한다. 개구리와 두꺼비는 습지에서 수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생물이다. 그런 생물이 땅으로 나온다는 것은 비 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기록에도 이러한 동물의 일기예측의 사례를 적고 있다.

백제 기루왕 40년(116) 6월에 "큰비가 내려 한강의 물이 넘쳐 인가가 물에 떠서 허물어졌다. 이에 앞서  황새가 도성문에 보금자리를 만든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마땅히 수재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 을해왕 41년(350) 4월에 "큰비가 십여일 동안 내려 평지의 물깊이가 서너자나 되었고, 관가와 민가가 물에 떠서 허물어졌다. 이에 앞서 월성의 모퉁이에 황새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장차 큰물이 날 징조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들어 맞았다"고 기록하였다. 황새가 집을 지은 것이 3월이고 4월에 큰비가 내렸다 하였으니 4월의 큰비를 3월에 예측하였던 것이다.

굴뚝에 연기가 깔리면 비가 온다.
동남풍이 불면 비가 오고 서북풍이 불면 날이 맑다.
가뭄때 햇무리나 달무리가 생기면 비가 온다.
서쪽에 무지개가 뜨면 장마가 진다.
달이 몹시 묽으면 가뭄이 든다.
정월 보름날 달빚이 희면 큰 바람이 있고, 붉으면 큰비가 있을 징조다.
초복에 비가 내리면 삼복 중에 모두 내린다.
동지 섣달에 눈이 많이 오면 오뉴월에 비가 많이 온다.

농사를 짓는 농민이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어부들은 농사에 대한 궁금증, 물이나 바람 등 날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해와 달, 별, 바람, 구름의 상태나 그 변화가 옛날에 사용한 날씨예측의 잣대였다.

이러한 날씨점은 대부분 그날 또는 하루나 이틀정도의 단기예보이지만 상당히 긴 기간의 장기예보를 위한 것도 있었다. 특히 한해의 첫날인 설날, 첫 만월인 정월대보름,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2월에는 장기예보를 위한 농사점, 일기점 풍속이 많았다.

다음은 장기적인 일기예측의 풍속이다

정월초하루날 바람이 없이 날씨가 맑으면 풍년이 들고, 해가 붉으면 가뭄이 들고, 해가 푸른 빛이면 풍재가 들고,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면 홍수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정월 열나흘날 저녁에 콩 12개에 12달의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 속에 집어 넣는다. 이것을 달불이라고 한다. 이튿날인 대보름날 새벽에 그것을 꺼내어 점을 쳐본다. 그 콩알들이 붇고 안 붇는 것으로 그달의 수해, 한해를 점친다.

경남지방에서는 구름이 남쪽에 끼면 남쪽, 서쪽에 끼면 서쪽에 풍년이 든다든가 비가 오면 그 해 내내 물이 흔해서 풍년이 저절고 든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조그마한 자연현상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하여 실제 생활에 활용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과학적인 근거에 의하기 보다는 오랜 생활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지식이었다. 경험에 바탕을 둔 생활과학도 현대의 첨단과학에 못지 않게 예측성이 뛰어났다.  물론 우리 조상들의 일기점 날씨점은 오늘날 처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근거 없는 미신이 아니라 생활경험에서 얻어낸 생활과학이었다.

농악

깨갱 깨갱~~ 꽹과리를 치면 그 소리가 삼십리 밖에까지 들린다고 한다. 한민족이면 누구나 이 소리를 들으면 귀를 기울이고 가슴 설레인다. 김매기 논매기 모심기 등의 힘든 두레 일을 하면서 괭과리나 북 장구 징 등을 쳐서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나아가서는 협동심을 불러일으켰다. 설날 정월대보름 추석의 각종 명절때도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면서 풍물을 쳤다.또한 새로 집을 지을때, 줄다리기와 씨름판에서도,잔치집이나 사람이 죽은 상가에서도 깨갱깨갱쳤다. 꽹과리 북 장구 징 법고 나팔 등을 치는 긴 상모를 쓰고 돌리는 사람도 있고, 정자관에 도포를 입은 양반, 나무총을 멘 포수,예쁜 각시,고깔에 장삼을 입은 중으로 분장하고 간단한 몸짓과 춤으로 마을사람들을 웃기는 잡색도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일년 열두달 기쁠때나 슬플때나 농악과 더불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농부들은 여러가지 농악기를 치면서 흥겹게 춤을 춘다. 피아노나 첼로처럼 크고 무거워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는 서양음악과는 달리 농악의 악기는 무게가 무겁지 않고 비교적 작기때문에, 사람들이 몸에 지닌 채 자유롭게 연주하면서 무용도 할 수 있었다.

김매기 모내기 추수 등을 할 때는 일이 많아 여럿이 모여 함께 일을 했다.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농악을 치면서 힘든 농사일을 감내해 내었다.

농악을 치는 놀이판에서는 절로 어깨를 들석여지고 신명나게 만든다. 농악소리만 들으면 반복되는 고된 농사일에서 흥을 불어넣어 피로를 잊게 한다. 농악판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이 아무 꺼리낌없이 한데 어울린다. 즉,마을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신명나게 춤추는 축제판이었다.

농사일에 서로 협력하는 공동작업 '두레'

모심기와 논매기는 어린 모를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고, 작은 호미로 넓은 논을 빈틈없이 매어야 하는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일이다. 음력 5,6월에 비가 내려서 논에 물이 있을때 모심기와 논매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기가 극히 제한된다.

짧은 시기에 많은 양의 농사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한 집에서 개별적으로 작업하기는 벅차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두레'를 조직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온동네가 함께  힘든 일을 짧은 시간에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했다.

두레는 중남부지역 논농사지대에서 한 마을의 농군들이 협력하여 농사를 짓거나,부녀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두레길쌈을 하는 공동노동조직이다. 두레를 조직하여 하는 공동 농사일은 남정네들의 모내기, 물대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 등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추수할때까지 전과정에 걸친 일이다. 또 오늘날처럼 시장에서 옷을 쉽게 살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예전엔 어머니들이 직접 가정에서 삼을 심고 삼고 베를 짜서 온가족의 옷을 지어 입혔다. 이러한 길쌈은 많은 잔손질과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그래서 7월에서 8월에 걸쳐 마을의 부녀자들이 일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두레길쌈'을 했다.

두레는 일만하는 것이 아니다. 두레일을 하면서, 혹은 두레일이 끝나면 함께 모여서 농악을 치며 한바탕 논다. 두레일을 하러 갈때에 농기를 앞세우고 장구 꽹과리 북을 풍물잡이들이 치며 들로 간다. 김맬때는 장구잡이가 혼자서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를 하면서 풍물을 잡는다.그리고 대체로 김매기를 마친뒤 두레일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가지 춤과 소리를 부르며 일년의 노고을 잊고 풍년을 기원한다.

농사꾼들이 농사가 바쁠때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조직된 모임인 두레는 모두 함께 같이 일하고,같이 먹고 ,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우리조상들의 고유한 아름다운 전통이다

뒷간 여행기

일단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물체, 특히 배설물을 부정시 여기는 것은 전세계 공통의 문화현상이다. 똥, 오줌 등이 그것으로 먹는 것 이상 중요한 일이 배설하는 생리현상인데, 우리는 유독 "먹음새 문화"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뒷간 여행기'를 통해 우리의 이면문화의 일면을 살펴 보고자 한다.

"오뉴월의 변소간과 처가집은 멀어야 좋다" 는 속담처럼 전통적 가옥 구조에서 뒷간은 본채와 멀리 떨어져 헛간이나 축사와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속담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뒷간 아니, 화장실은 집안으로 들어와 그것도 안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고, 요사이 처가집을 시집 보다 더 자주 드나드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뒷간은 특히 부엌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재미 있게 가신 신앙과 처첩간의 갈등을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부엌과 뒷간이 떨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위생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나, 이렇게 해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도의 문전본풀이에는 문전신이 남편이고 부엌의 조왕이 본처, 일곱 아들은 올래(집 입구)지기 주목신들이며 변소 각시는 첩이다. 뒷간 신인 변소각시의 간계로 본처인 조왕을 죽였다가 아들들에게 살해된다. 그래서 부엌의 물건을 변소에 가져가거나, 변소의 물체를 부엌으로 가져가면 조왕과 변소각시가 서로 시기하여 집안통티난다고한다.

그런데, 어디서나 변소 각시는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럽고 젊고 화장을 즐긴다는 관념이 있어 조심한다. 뒷간신은 긴 머리카락을 발에 걸고 헤아리는 버릇이 있으며, 사람이 갑자기 뒷간에 나타나면 놀라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씌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때부터 앓다가 죽게 된다. 『삼림경제』'복거'조에 '측간에 갈 때 3-5보 떨어진 데에서 두서너번 기침소리를 내면 귀신이 자연히 피한다'라고 적고 있다. 또 '뒷간을 지을 때 좌향을 따로 잡아야'하고 새 뒷간을 짓고 나서 헌 것은 반드시 없애며 옛 뒷간의 똥도 치우는데 이때에는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똥을 친다."라고 하지 말고 "물을 퍼내다"고 말해야 좋다'고 적혔다. 그래서 시골에서 야간 변소 출입시에는 헛기침을 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뒷간신을 쫓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네는 뒷간을 될 수 있는대로 안채나 사랑채에서 떨어진 데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특히 상류가옥의 안뒷간은 부엌 옆마당의 디딜방아간 벽에 붙여 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지어 바깥 뒷간을 대문 밖에 두는 일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밤 늦게 이곳에 드나들 때에는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서움증이 뒷간신 관념을 낳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뒤를 보려고 힘을 쓰다가 쓰러지는 일도 있었을 터이므로 이러한 관념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뒷간이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그 무서운 뒷간신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요강이나 변기 등이 옛날부터 등장한다. 부여 군수리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변기는 그 역사를 대변해 준다.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모양의 남성용 변기와 오늘날 좌변기 같이 위부분이 벌어진 여성용 변기는 그 생김새나 선의 흐름이 청자나 백자에 비견해 쓰임새만 다를 뿐이지 하나도 손색이 없다.

서민들의 뒷간은 냄새와 무서움으로 가득 찼고, 양반가에서는 여자들의 안변소와 남자들의 바깥변소가 있는 것이 우리의 화장실문화의 전부였다.

여기에 비해 궁중의 뒷간은 사정이 달랐다. 창덕궁 임금님의 뒷간은 별채가 아니고 집구조 안에 위치하며 내용물은 변기로 받아내게 되어있다. 밑에는 문을 달아서 바깥에서 청소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임금님의 배설물은 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의(御醫)가 면밀한 검사를 한다. 변의 색깔, 냄새 등을 관찰하여 임금의 건강상태를 매일매일 체크하는 것이다.

뒷간은 깊이로는 단연 절간이 최고이다. 얼마나 깊은지 볼 일을 보고 나오면 비로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불교신자들이 많이 오고 수도하는 스님이 많기 때문에 자연히 일반 여염집 보다는 깊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뒷간이 서구형 주택과 핵가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처음 서울에 와우나 마포아파트가 들어 섰을 때는 화장실이 집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변소였다고 한다. 아파트 문화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뒷간만은 집 밖에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뒷간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국의 정서와는 맞지 않아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며느리가 앉았던 자리에 시아버지가 앉아야 했기에, 아파트의 모든 생활이 편했지만 화장실 이용만은 불편했다. 이제는 뒷간이 안방에 가장 가까이 자리잡고 가장 편안히 이용하는 공간이 되었다.바깥에 뒷간이 집안의 화장실로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한국적 정서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렇다! 하나의 외래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기존의 가치와 절충을 하면서 정착되는 것이다. 밀려드는 서구문화가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큰 흐름에 조화를 이루면서 서서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눔과 토론의 만남 '마실다니기'

농촌에서 농부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논둑에서 점심을 먹고 일하고 약간 쉬다가 일하고 저녁먹고 마실갔다와서 잔다. 이웃집과 마을내을 볼일로 출입하거나 놀러다니는 것 등을 '마실다닌다'  '마실간다' 라고한다.

마을이란 명사기 일상생활에서 --가다, --오다, --다니다, --다녀오다 등의 동사와 결합하여 사용될 때는 볼일로 마을를 다니는 일, 또는 이웃에 놀러다닌다는 뜻이 된다. 마을 다니는 사람, 마을 온사람를 마실꾼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마을사람들이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보통 다음과 같다. '어디갔다오니껴 ?'하면 '마실갔다 오니더'한다. '요새 그 할배건강이 어떠띠껴 ?'하면 '마실댕길정도로 좋아졌더구만'하는 식이다. 마실을 다닌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 뿐만아니라,마을사회(생활)에 참여한다는 뜻이 된다.

노인들은 저녁을 먹고나면 마을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당나무 밑이나 마을회관으로 마실간다. 청년들은 개천이나 뚝에서 마실나와서 목욕을 하거나 환담을 나눈다. 노인들이 모이는 당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걱정거리를 논의하고, 뚝에 모인 젊은이들은 내일은 누구 집에서 모심기를 하며 내알의 협조사항은 무엇인가 오해 신품종의 재배기술 농작물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마실가는 장소로 가장 두드러진 곳은 사랑방이다. 마을에서 나이차가 크면 말을 트지 못하고,맞담배를 할 수 없기때문에 자연히 같은 또래끼리 동네사랑방에 모이게 마련이다. 나이가 비슷하고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로 형성된 사랑방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고 화기에 찬 것이었다. 시국담(時局談)도 나누고 소설책도 읽고, 농사기술을 교환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고, 일꾼의 사랑방은 짚신도 삼고 소쿠리도 절이고 또 여러가지 음담패설을 하면서 노래하는 장으로서 사랑방의 생리는 천차만별이다.마을사람들은 저녁식사가 끝나면 누구나 일응 발걸음이 사랑방으로 향하게 되고, 여기서 세상돌아가는 것을 알고 담소하며 즐거운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마실다니기는 사회문화적교환의 통로구실을 한다.마실을 오고가는 마실다니기는 특정사항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의견이나 여론,정보 등이 전달되는 길이다.예를 들면 올해 마을제사를 지내는데 적합한 제관으로 누구를 뽑아야하고 제물은 어떠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등등을 마실다니면서 이야기된다. 현재 대중매체의 발달로 농촌에서도 전국 가처 세계 구석구석의 소식들을 안방에 앉아서 보고듣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실나가야만이 들을 수 있다. 마실다니는 것은 털레비젼이나 라다오, 신문 등으로 듣고 볼 수 없는 마을내의 소식을 전해듣는 길인 것이다. 오늘은 이양기로 누가 모내기를 하고 내일은 누구가 하느냐하는 소식,이웃집의 제사는 언지고 생일은 언제냐 하는 등의 이야기를 알 수 있다.

아이들은 골목의 놀이터에서 또래끼리 자기들 이야기를 나누고, 노인들은 당나무 밑이나 사랑방 마을회관 또는 마을가게에 마실가서 소식을나누고, 아낙네들은 우물가와 빨래터에서 얘기한다. 그래서 오늘 이웃집에서 어떤 별식을 해먹고, 어떤 손님이 오고, 그릇이 몇 개인가를 이웃사람들이 먼저 알게된다.

농촌에서는 평상시 오락이 별로 없다. 마을사람들이 마실가서 사랑방이나 마을회관 당나무 밑 또는 시원한 곳에 앉아서 담론를 나주고 가끔 장기나 화투를 치는 것이 오락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노인들은 마을회관으로 마실가서 오수(午睡)와 담론으로 휴식을 취하고 젊은이들은 같은 군정끼리 가게에 모여 술마시거나 농사이야기를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푼다. 여름철에 저녁을 먹고나면 의례껏 마을사람들이 많이 마실가는 곳으로 가서 끼리끼리 모여서 목욕을 하거나 환담을 한다. 마실다니기는 농부의 고된 하루의 노동에서 벗어나 농촌생활에서 최소한의 활력소가 되는 여름철의 휴식과 피서의 장소이다.

마을사람들 상호간의 품앗이, 한정된 농기계로 마을전체의 작업을 하기위한 작업일정이 조정, 공동작업의 계획수립, 공동시설의 관리 등 마을일의 원할한 수행을 위해 자주 모여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농번기에는 바뻐서 공식적인 회합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주로 마실을 오고가는 사이에 이야기되고 논의된다.

마실가서 모이는 사람들은 같은 나이 또래들이다.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질서원리(秩序原理)의 하나가 長幼의 序이다. 그래서 요즘도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서로 나이를 묻고, 같은 나이면 생일을 묻고 그것도 같은면 生時까지 물어서 형님 아우를 따지기를 좋아한다. 나이가 같은 사람을 '동갑내기'라 하여 특히 친한사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나이가 비슷하다는 것은 마실다니기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예전 삼(麻)을 많이 하던 때와 지붕개량하기 전에는 마실가서 여자들은 삼삼기 , 물레질을 모여서하고 남자들은 가마니치기,새끼꼬기 등 간단한 실내작업을 하는 공동작업장이였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작업교육장이기도 했다. 농한기에 남자들은 주로 1년 동안 사용할 새끼를 꼬고 가마니치며 멍석을 만들었다. 이때 혼자서 작업을 하면 심심하고 작업능률이 오르지 않기때문에 같은 또래가 모이는 초당방에 마실가서 작업했다.거기서 함께 어울러 장난도 치고 마을 소문을 주고 받으며 재미있게 함께 일했다.그래서 비료가 풍부하지않던 시절에는 일부러 사랑방을 만들어 사람들을 마실오게 해서 오줌을 모아 쓰기도 했다.

마을에 큰일이 일어나면 마실다니면서 우선 마을어른들이 의논을 한다.마을에 대표적인 자치기구로는 동계나 반상회가 있지만 바쁜생활에 자주 온동민을 다 모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장이 우선 밤마실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을 한다. 이렇게해서 마을의 중대한 사안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기 전에 마실을 다니면서 그 문제에 대한 모든 마을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어느 정도이 합의에 도달한다.

마실다니기는 마을생활에서 부담없는 개인과 개인, 집과 집 사이에 일상절인 접촉이며 교제관계이다. 마실다니기는 마을 성원들간에 마을 내의 소식을 전해듣는 통로이며 협동생활의 바탕이 되고 협동관행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마실을 다니면서 마을내이 갈등과 불화를 해소 시켜서 마을생활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마을사람들 중에 패륜행위를 저질렸을때는 따돌림을 받는다. 즉 마을사람들이 그집에 마실을 가지고 않고 마실을 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더불어 사는 마을사회에서 마실를 다니지 못하고 따돌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마을축제

인간의 삶은 일과 놀이로 구성되다. 생산이나 창작 혹은 실제적인 이득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쓰는 것은 일이라 하며, 여가나 휴식, 예술감상이나 종교적 기원, 혹은 오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쓰는 것은 놀이라고 한다. 인간을 호모루덴스(homo ludens)라고 한다. 이것은 "놀이하는 인간"이란 말로,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생업활동 이외에 놀이와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마을축제는 생활을 함께하는 마을사람들끼리, 혹은 생산과 노동의 농사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제사이자 잔치이며 놀이다. 마을축제는 정초나 단오 백중 등 명절에 많이 행한다. 경사나 제사를 위해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큰굿, 큰잔치,대동놀이라고 한다. 몇사람이나 가족들의 놀이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축제야말로 마을사회에서 살아있는 뜻있는 놀이요 창조적인 의식이요 민중들의 즐거운 몸짓이다.

마을축제 또는 마을굿은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무당이나 마을농악대 혹은 마을사람들이 뽑은 제관 등이 중심이 되어 거행한다. 마을축제는 제사의식-지신밟기-놀이-뒷풀이의 순으로 진행된다.

먼저 서낭신이나 산신 당산할아버지 등 마을을 지켜주는 마을수호신께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을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빈다. 그 다음은 제사를 통해 신의 강림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농악을 울리면서 공동우물이나 동사 집집을 돌면서 지신을 밟는다. 성주신(마루), 삼신(안방), 조왕신(부엌) 등에서 집안의 평안과 무병을 기원한다. 지신밟기가 끝나면 가종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농악대가 중심이 되는 판놀이도 하고 마을사람들이 대거 참여하는 줄당기기도 한다. 놀이가 끝나면 마을사람 모두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즐기는 뒷풀이를 한다. 뒷풀이를 통하여 쌓인 한이나 응어리진 감정 상호간의 불화와 반목은 해소되고 협동의 의식이 신장된다.

이러한 마을축제가 끝나면 그 마을은 정화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이 전개된다. 부정과 불합리한 묵은 삶은 사라지고 신성하고 밝은 생활이 열리게 된다. 농사는 풍년이 들고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마을사람들은 화목하게 된다.

韓國文化에 나타난 말(馬)의 象徵的 意味

말은 12支의 일곱번째 동물로서 時刻으로는 오전 11시에서 오후1시, 계절적으로는 5월 절기, 方向으로는 남쪽에 해당되는 時間神이자 防衛神이다. 즉 우리 조상들은 이 시간과 이 계절, 이 방향에서 오는 나쁜 기운과 액운은 말이 맡아서 물리친다고 생각했다.

말(馬)하면 박력과 생동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외모로 보아 탄력있는 근육, 미끈하고 탄탄한 체형, 기름진 모발, 각질의 말굽과 거친 숨소리, 스피드와 순발력을 가지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말은 옛부터 원시미술, 고분미술, 토기, 토우, 벽화, 옛그림 속에서 자주 등장하며, 구전되는 옛날 이야기, 민속신앙, 놀이 등 민속문화에서도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어, 말은 일찍부너 우리 민족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

<<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위만조선에도 말의 수가 상당했고, 騎馬의 습속과 말이 전투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三國志>>(東夷傳)의 기록으로 扶餘의 名馬와 果下馬라는 두 종류의 말이 있었고, 濊이나 扶餘 에서는 말(馬)을  재산으로 간주했고, 東沃沮는 말이 적었다는 사실, 三韓地域은 모두 牛馬가 있었으나, 馬韓은 말을 타지 못한 반면에 弁辰韓은 말을 탔다는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아주 오랜 청동기시대부터 靑銅으로 만든 말모양 符籍을 사용한 유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액막이와 행운을 부르는 상징으로 말모양 장식을 썼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민속에서 날개 달린 말그림이 그려있는 符籍을 退厄進福府(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부적)의 神馬府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말의 상징성을 읽을 수 있다.

신라.가야의 馬刻, 馬形, 騎馬形의 土器와 土偶, 고구려 古墳壁畵 등에 보이는 말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靈媒體로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타고 저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가라는 供羲的 副葬의  동물로 이해될 수 있다.

신화나 구전설화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 하늘의 使者, 帝王의 위대한 탄생을 알리는 靈物 또는 神母이며,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특히 <<三國遺事>>, <<三國史記>>에서 말은 금와왕, 박혁거세, 고주몽 등 國祖가 태어날때 그 瑞相을 미리 알려주었고, 백제가 멸망할 때 말이 나타나 그 凶兆를 미리 豫示하여 준 신성한 동물로 이야기 되고 있다. 삼국의 건국신화나 천마총의 천마도에서처럼 말 가운데 특히 白馬는 최고지위의 조상신이 타는 말로 인식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백마는 고난시대에 희망을 가져다 주는 선구자나 민족영웅, 장수가 타고 오는 동물로서   백마란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희망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되어있다.

세시풍속에서도 말은 六畜의 하나로 중요한 가축으로 인식하고 정월 上午日과 10월 첫말날에 특별히 말을 위해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것의 상징"으로 수렴되는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일부 지역의 동제당에 馬像이나 말그림 속의 말이 마을을 수호하는 洞神으로, 혹은 동신이 타고 다니는 乘用動物로서 모셔지고 있다.  경남 고성의 석마리 입구에는 돌로 만든 말이 마을 입구에 나란히 놓여 마을 지킨다. 옛날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이 마을에 호환이 심해서 마을사람들이 절치부심을 하던 중에 웬 스님이 지나가던 길에 비책을 아려 주었다. 그것은 바로 石馬를 한쌍 만들어 마을 입구에 세우라는 것이었다. 석마를 세운 후에 호환이 사라졌고,  마을에서 이 석마를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왔다.  또다른 경우를 보면 어느 마을에 虎患이 있었는데 어느날 마을 노인의 꿈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현몽하여 '나는 이 마을 지키는 산신인데 말을 만들어 동제당에 바치면  그것을 타고 호랑이를 물리치겠다'고 가르쳐 준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의논하여 말을 깎아 동제당 안에 바쳤다. 그 날 저녁 다시 마을사람에 산신이 현몽하여 '어제밤에 내가 그 말을 타고 호랑이를 물리치다가 그만 다리 하나가 뿌려지고, 현재 마을 어대에 있으니 고이 모셔다 당안에 봉안하라' 일러 주었다. 그 후에 호환이 없어지고 마을사람들은 매년 계속 말을 만들어 동제당에 바쳤다. 이러한 설화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말의 이용은 단순히 실용 혹은 수렵 및 간단한 경제적 단계에서 정복과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 정치적, 군사적 이용단계로 발달하였다. 부족구가, 삼국,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는 말이 농경, 수공업의 원료, 군마, 교통통신의 역마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말띠타령"으로 좋지 않게 비쳤다. 우리 조상들은 띠짐승의 습성을 그 띠해에 태어난 아이의 운명과 결부시키는 습속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말띠에 대해 별나게 띠타령이 심하다. 그래서 "말띠 여자 팔자 세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헌이나 수집된 자료에는 이런 속신을 뒷받침할 자료를 찾아 볼 수 없다. 조선시대에만해도 말띠 왕비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왕실에서 사주팔자를 따질 줄 몰라서 '말띠'를 왕비로 간택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말띠의 고약한 속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식민지시대부터였다. 일본에서는 말해에 태어난 사람은 기질이 세어 말띠의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을 깔아 앉아 남편의 기세를 꺾기 때문에 말띠 태생의 부인을 경원시하는 풍속이 수천여 년 전부터 있어왔다. 이러한 일본의 속신이 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확산된 것이다.

요즘에 제주도 일부와 관광지와 경마장을 제하면 실제 말의 모습은 보기가 힘든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말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졌지만, 대신에 말의 이미지가 투영된 예는 많이 볼 수 있다. 1000미터를 60초에 주파하는 말의 엄청난 속도는 스피드를 상징하는 자동차의 심볼마크로 등장하고, 튼튼한 네 다리를 갖고 있는 말의 모습은 양말과 신발의 상표에, 말의박력과 정력, 생동감은 남성화장품에서 , 교통통신의 수단이었던 말은 관광회사의 심볼마크에서 실제 모습이 아닌  말의 이미지만 투영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말에 대한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헌, 유물, 구전설화, 신앙, 놀이, 현대적 상품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말에 대해서 느끼는 관념은 어느 정도 변화없이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수렴되고, 하늘의 사신, 제왕의 출현을 알리는 영물, 예언자의 구실, 영혼과 마을 수호신이 타는 동울, 장수.선구자.영웅.새신랑이 타는 귀한 동물, 박력과 정력 스피드의 대표적인 상징동물이었다.

"자연환경론적인 모기퇴치법"

더위와 모기는 여름날에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다. 여름날 멍석을 펴놓고 저녁을 먹을 때면 으레 단오날 뜯어 놓은 쑥과 짚검불로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았다. 된장에 찍어 먹은 풋고추의 매운 맛에, 모기불의 매운 연기까지 겹치면 콧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매운 저녁이 된다. 저녁상을 물리고 모깃불이 다 사그러질 때까지 마당에서 부채로 모기를 쫓아가며 할머니의 무릎베개에 누워서 밤하늘에 별을 세며,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모기장이니 모기향이니,에프킬러니 하는 요새의 모기 쫓는 기구가 없던 그 시절에는 모깃불과 부채, 삼베 홑이불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더운 여름밤이면 극성스러운 모기를 쫓다가 보면 "코찌래기(길이)만한 여름밤"이 금새 지나가 버린다.

시골 여름철 생활에서 모기의 성화는 심히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성가신 모기를 쫓기 위해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여름도 아닌 겨울인 정초부터 모기를 몰아내기 위한 여러 가지 양밥(예방)을 했다. 특히 여름 내의 모기 피해를 미리 쫓아 둔다고 정월 대보름날 모깃불놓기, 모기날리기나 모기팔기 라는 주술적 관습이 만들었고 지금껏 여러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다.

경남에서는 정월 보름날 새벽에 일어나서 마당에 짚불을 놓으며 이것을 목개불(모깃불)이라 한다. 새해 들어 첫 둥근 달이 뜨는 보름날에 여름 내의 모기를 미리 쫓는다는 것인데 아이들이 그 위를 세 번 뛰어넘으면 몸에 좋다고 한다.

또 이 모깃불에 참대나 아주까릿대를 넣어서 마디가 튀는 소리를 내게 하는 풍속도 있다. 정월 초하루부터 열나흘날까지 방이나 마당을 쓴 먼지, 쓰레기 등을 버리면 복이 나간다고 하여 모아 두었다가 열나흘날 저녁에 마당에서 불을 놓는다. 이때 청죽(靑竹)을 불 속에 넣어 두면 마디가 탈 때에 "탕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이 소리에 모기가 달아나고 또 집안에 있는 잡귀들이 놀라 도망간다고 믿었다.

전남에서는 정월 14일 저녁에 모깃불을 피우고 [모기야, 깔다구야, 다물러 가라]고 외친다고 한다. 깔다구는 여름 해안 지방에 하지 때부터 나타나는데, 곳에 따라서는 눈 앞을 가릴 정도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사람의 피를 뜯는다고 한다.

특히 도서 지방에서는 부인들이 14일 저녁에 보름밥을 해 놓고,낮부터 방의 먼지를 쓸어 담아 갯가에 가서 모기, 깔다구, 벼룩, 먼지 등이 다 경치 좋은 데로 날아가라고 바람에 날려보낸다. 이것을 '모기 날리기'라 한다. 그리고 또 14일 저녁 이웃 마을과의 경계에 가서 이웃 동네 이름이나 이장 이름을 부르며 [우리 모기 다 가져가라]고 외친다. 그리고 [자네 동네 모기 잘 받았네] 하고 스스로 자답(自答)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모기를 이웃 마을에 팔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을에서는 여름에 모기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충남에서는 이때 실제로 모기를 바가지나 되로 되어서 보내고 받는 시늉까지 한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을 '모기쫓기' 또는 '모기팔기'라고 한다.

안동 지방에서는 곡식을 되는 말을 가지고 밤에 뒷동산에 올라가 이웃 마을을 향하여 "한 말, 두 말" 하고 마치 곡식을 되듯이 모기를 되어서 넘기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건너 마을에서는 이 광경을 보고 역시 말을 가지고 산 위에 올라가 곡식을 되듯이 "한 말, 두 말"하면서 되넘긴다. 이것을 '모기 되넘기기'라고 한다.

호남 도서 지방에서 대보름날 밤에 많이 노는 방실놀이를 할 때도 모기쫓기를 한다. 나로도(羅老島)에서는 보름날 방실놀이를 할 때 집집마다 매생이배를 만들고, 마을 전체의 것도 만든다. 매생이란 마상이의 사투리로서, 지금은 다 없어진 통나무의 작은 고기잡이 배였다. 지금 여기 마을 매생이배는 길이가 1척 내지 2척 정도로 되는데 그 안에 촛불, 횃불, 종지기 참기름 불들을 켜서 바다에 띄운다. 수십 척의 매생이배가 바다에 뜨면 수면에 비쳐서 장관을 이루고, 여러 섬마을의 매생이배들이 그렇게 떠나간다. 이때 사람들은 [매생아, 매생아, 금년 내 액운을 다 가져가고 명과 복을 갖다 주라]고 외친다. 도 바다 건너 이웃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 마을 모기를 다실어보내니 잘 모셔라]하고 외치기도 한다.

시골 여름철 모기의 극심한 성화가 견디기 어려워서 정월 대보름에는 모기가 있을 까닭 이이야 없지만 이렇게 모깃불을 피우고 잇달아서 다양한 주술적인 관습을 동원하여 모기를 쫓았다.

모기 쫓기는 것은 정월 대보름에서 끝나지 않고 단오에도 이어진다.남쪽에서는 이맘때에 가을보리 수확과 모심기 등으로 '발등에 오줌 눌 정도 바쁘다.' 그러나 북쪽 지방에서는 단오 때쯤이 되면 가을보리나 봄보리를 재배하지 않기 때문에 모심기가 끝나고 논매기까지 마치게 되어 단오는 설 다음으로 큰 명절이다. 단오날 그네는 흔히 큰 나무 가지에 매달거나, 넓은 터에 통나무 두 개를 세우고 위로 가로질러서 엮은 통나무에 매단다. 이 날 그네를 뛰어야만 여름에 모기의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모기를 날리려고 모두들 한번씩 그네를 뛴다. 큰 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뛰어 보면 앞산과 뒷산이 다가왔다 물러서면서 시원한 것은 물론이고 모기가 있어도 달려들 겨를이 없다. 요사이 여름이 시작되는 5월이 되면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선풍기를 내어놓고 에어컨을 손질하면서 여름의 더위를 대비한다. 예전에는 바로 단오가 여름이 시작되는 문턱이며 시작점이다. 그래서 이날 여름의 가장 견디기 힘든 더위를 쫓고, 모기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서 그네를 뛰어 미리 모기와 더위를 예방하고자 했다. 그네를 높이 뛰어 모기를 날리는데, 그네를 높이 뛰기 위해서는 온 몸의 탄력을 이용해야 한다. 특히 다리와 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네는 여성 놀이로서 널뛰기와 함께 오늘날 에어로빅이나 수영 이상으로 운동량, 각선미의 발달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단오날 이른 아침에 쑥을 베어다가 말려 두었다가 여름철 모깃불 쓴다.

모깃불의 재료로는 말린 쑥 이외에 생솔 가지나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연기를 내는 것으로 준비한다. 쑥은 그 중에서도 연기의 냄새가 좋고 살균 작용까지 하기 때문에 으뜸으로 친다. 쑥 이외 평상시 한약을 따려 먹고 약찌꺼기를 말려 두었다가 화로에 서서히 태우면 약 냄새가 펴져 모기를 몰아내게 된다.

의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의 모기에는 치료의 방법이 없던 상피병이라는 무서운 병의 세균인 사상충을 가지고 옮기는 모기도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병이 모기에 의해서 옮겨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어떻든 모기 피해는 아주 극심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기가 없는 정초부터 여름의 시작 날인 단오에 이르기까지 모기를 쫓기 위한 다양한 풍속을 만들어 내고 전승했다.

이제 더위와 모기들은 한층더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오늘날 더위와 모기를 쫓기 위한 다양한 기술과 도구가 발달되어서 큰 걱정이 없다. 그러나 그 도구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공장의 공해가 모기가 보다 더 무섭게 우리 곁에 다가왔다. 오늘날의 더위와 모기의 퇴치는 예전보다 손쉬워졌으나 환경론적으로 볼 때 오히려 공해의 문제가 대두된다.  모기를 잡는 모기약이나, 에프킬라를 생산하려고 공장의 매연을 만들기보다는 모깃불을 피우고 정월부터 단오까지 모기를 쫓기 위해 다양하게 풍속이 휠씬더 자연적이고 환경론적인 삶이었던 것 같다

부정을 씻는 물과 목욕민속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는 뜻에서 물은 단순한 맹물이 아니라 민속신앙적인 정화(淨化)의 의미를 갖는다. 굿이 시작되는 첫거리에서 부정을 가시게 하는 의례가 있다.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가지고 사방에 뿌려서 부정을 물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굿당은  속된 부정이 가시고 성스러운 성역이 된다.

물에 대한 숭배 내지 신앙은 민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강이나 하천에 제사하는 산천신앙, 바람과 물을 지리적으로 다루는 풍수신앙, 약효가 있는 것으로 믿는 약수(약물)신앙, 물을 신체(神體)로 삼거나 재물로 드리는 가정신앙, 물로 부정을 씻기는 씻김굿, 물의 상징성으로 성화(聖化)하는 洗禮 등이 그것이다.

한국인의 맑은물,좋은물에 대한 특수한 감정은 그저 생명의 보전을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에 대한 신령스러운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칠성신이나 조상신에게 맑은 정수 한 종발을 떠놓고 빌거나, 산천에 자식을 빌고, 하늘에 비를 비는 의례 등은 모두 물을 신성시하는 종교심리에 의한 것이다.

물은 바다나 강처럼 자연적인 상태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땅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은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풍수지리에 의하면 물은 살아 있는 사람 뿐만아니라 땅을 살리고 죽이기도 하고, 특정한  땅기운(지맥)을 형성하여 인간에거 복을 주는 땅, 명당을 제공하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물 맑은물의 약수터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인기가 있다. 약수는 인체에 생화학적 효과를 일으켜 장수와 건강, 질병에 대단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지만 기본적으로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주술적 종교적 효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죄나 부정한 것을 물로 깨끗이 씻어낸다는 생각에서 찬물로 몸을 씻었다. 정초에 마을 동제를 지내거나 집안에 조상제사를 모실 때면 으례 찬물로 몸을 딱고 정성을 드린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마을 동제를 지낼때는 동네우물에 가서 찬물로 목욕제계를 한다. 또 해가 바뀌는 섣달 그믐날에는 온가족이 돌아가면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몸을 씻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강물이나 냇물 또는 우물물에서 몸의 땀이나 먼지를 씻어내는 간단한 목욕을 목물이라고 한다. 한동네에 공공목욕탕이 몇개가 되고 집집마다 목욕탕이 마련된 요즘이야 매일같이 목욕을 할 수 있지만 옛 우리조상들은 목욕문화를 발달시키지 못했다.

찜통같은 더위 속에서도 목욕탕이 없으니 남정네들은 동네 우물가에 엎드려 등에 물을 끼얹고 머리를 감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녀자들은 아무데서나 벗어 던지고 엎드릴 수 없기때문에 어둑어둑해지면 저녁상을 치우고 뒷곁에서 목물을 해야 하고, 그나마 뒤곁도 없는 초가삼간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니들은 부엌에서  물을 등에 끼얹는 정도였다.

우리조상들이 이처럼 목욕문화를 발달시키지못한 이유는 예의를 숭상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알몸을 드러내고 씻는 행위을 꺼렸다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기후가 건조하고 겨울에는 온돌이 있었기때문이다.

임금이 사시는 궁중에도 목욕탕이 없었다. 왕의 목욕은 큰나무 함지를 침전 뒷방에 갖다놓고 더운 물을 길어다 부어 유모나 보모상궁이 씻겨드리는 것이다. 수건은 고운 명주나 무명을 썻고 비누는 팥가루 앙금을 말린 팥비누였다고 한다.

그런 반면에 세시풍속에 보면 씻는 풍속이 많이 있다. 오월단오 유월유두 칠월백중 팔월추석 등 명절에 개천이나 폭포에서 물을 맞거나 목욕을 한다. 오월단오때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속에 좋다고 하여 창포 삶은 물을 먹는다. 유월유두에는 부인네들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

민속에 보이는 동물들

짐승들의 출몰과 울음소리, 우는 시기, 동작 등을 통해서 미래에 있을 길흉화복이나 농사의 풍흉을 점치려는 풍속이 있어 왔다. 예를 들면 꿈에 돼지를 보면 부자가 되거나 좋은 일이 생길 징조이고, 아침에 동쪽에서 들리는 까치소리는 좋은 소식이 온다는 징조로 해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침 까치소리와 거미는 복을 불러오는 것으로 환영을 했다. 또한 농악놀이에서 잡색들이 소, 말, 곰, 호랑이, 개, 닭, 거북이 등을 가장하여 춤을 추는 동물가장춤이 있다.

이처럼 민속에서는 다양한 동물들이 제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면서 나타난다.

집안에서 오래 기러던 집짐승이 죽은 뒤에 귀신으로 화하는 예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조상들은 개는 가정에서 10년 이상을 기르지 않았으며, 닭은 3년이상을 기르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 이상 기르면 동물들이 죽은 뒤에 귀신이 된다고 믿고 있어서 연한이 되면 팔거나 잡는 일이 많았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맞지 않는 생각이지만는...

옛날 이야기에 보면 동물은 나이가 들면 사람이나 다른 짐승으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여우가 백년을 묵으면 백발 노인이나, 미녀, 노승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여우가 사람이 되고자 여러가지 노력을 하나 결국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호랑이는 천년을 살면 자유 자재로 변화 할 수 있다고 하며 특히 산신된다. 뱀이나 물고기가 천년이 되면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전한다.

동물이 사람의 은혜에 감동하여 주인니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 나타나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다. 사람도 때로는 은혜를 잊고 몰인정하는 수가 있는데, 특히 동물 중에서 개는 주인에게 죽음으로서 은혜를 갚는다는 의로운 개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주위에서 보이는 미미한 동물들의 모습이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도 세심히 관찰하여, 그 특성들을 우리 생활에 활용하여 교훈을 얻었고,미래의 일을 짐작하려 했다

안방과 사랑방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한옥의 구조는 지역마다 독특한 형태를 갖는다. 안방, 사랑방, 웃방, 마루, 광, 부옄, 마당, 헛간 등이 대체적인 우리네 집의 구조이다. 방의 종류도 다양하여 안방, 건너방, 웃방, 사랑방, 다락방 등이 있다.  안방은 부부와 어린 아이들이 자고, 웃방은  결혼한 아들 부부의 방이라 말할 수 있으며, 건너방은 다 큰 딸이나 조부모가 기거한다.  사랑방은 장성한 아들이 기거하는 방이라 할 수 있고, 할아버지나 머슴등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이다.

여기서는 집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안방과 사랑방의 의미와 기능을 알아본다.

우선 안방은 안채의 부엌이 딸린 방으로 규방 내방 내칙 등으로 불린다. 안방은 주부의 거처이고, 잠을 자는 침실이며, 식사을 하는 방이다. 가정생활에서 종주가 되며 각종 광의 열쇠나 귀중품들이 안방에 보관된다. 또 외인 남자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는 곳이며 남자로서는 남편과 직계 가족들만이 안방의 출입이 허용된다. 안방에는 장롱이 놓이며, 장롱 위에는 반짇고리 실함 등 아녀자들이 쓰는 물건들이 있다.

사랑방은 조선시대의 주택에서 남자주인에 거쳐하는 방으로 안채와는 별도로 사랑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방의 가구는 안방보다 종류가 많고 복잡하다. 사랑방 가구로서 크게 비중을 치지하는 것은 문갑이나 서안 등 문구류이다.

남자손님이 오면 사랑방에 모시고, 안손님이 오면 으례 안방에 모신다.  사랑방은 집의 바깥에 위치하며, 안방은 바깥에서 보이지 않은  집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또 내외벽을 만들어 안채의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것을 막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문을 만드는 등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안방과 사랑방 사이에도 엄격한 내외가 있었다.

요사이의 집안구조는 아파트나 연립주택 등과 같이 획일화되고 집단화되어 집집마다 큰 차이는 없다. 여러 식구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고, 안방과 사랑방의 내외가 없어진 오늘날의 집안형태는 안방, 건너방, 거실, 주방, 화장실 등이 대체적인 모양이다. 또 거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 옛날 손님맞이를  안방과 사랑방에서 하던 것을 남자 여자 손님 구분없이 거실에 모신다.

보리고개를 넘긴 新꽁보리밥타령

보리고개, 송구죽, 보리개떡, 꽁보리밥, 보리방귀, 아이의 볼록한 개구리배, 냉수로 배 채우고 힘든 봄날의 논밭일......

이런한 것들이 꽃피고 새우는 봄을 한타령으로 변하게 했던 춘궁기 우리네 조상들의 빈한한 생활모습이었다. 춘궁기에 아침밥을 먹지 못한 아이가 동네 부잣집의 술막지를 얻어먹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학교에 나온 기억들이 중년이면 한번쯤 생각날 것이다. 가을농사에서 거두어들인 곡식들이 겨우내 다없어지고 봄에는 식량이 거의 다떨어진다.

해동이 되어 가장 먼저 거두어들이는 곡식이 바로 보리이다. 삼월이 되면 그동안  성장이 중지되었던 보리가 자란다. 그러면 보리밭 골을 타주고 풀을 매어준다. 간혹 이때 보리 골타기와 함께 웃거름을 주기도 한다. 보리밭매기는 아시매기, 두벌매기, 세벌매기를 삼월 초순에 시작하여 5,6일 간격으로 맨다.

5월 중순이면 보리가 익어서 수확을 하게 된다. 그런데 5월에 보리가 익을 때까지 양식이 남아있지 않으면 소나무 껍질로 송구죽을 쑤어먹고 쑥을 캐어다가 쑥떡을 해먹거나, 설익은 보리를 베어서 보리개떡을 해먹는다.  물난리나 가뭄이 심한 해의 봄은 그야말로 배고픈 나날들이었다. 그 봄에 아이들의 배는 올챙이배처럼 되고 어른들은 허기진 배를 우물가에서 물 한사발로 채워야 했다.

양식이 떨어진 때라 처음 수확한 보리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많았다. 어린 보리 싹으로 보리국을 끓여 먹는다. 이른 봄에 된장을 푼 물에다 홍어의 서덜(살을 뗀 나머지)과 어린 보리싹을 넣어 끓이는 전라도 지방의 보리 음식이다. 보리개떡은 보릿겨나 보리싸래기로 만든 떡으로 손바닥만하게 반대기를 만들어 밥 위에 얹어 찌거나 큰 솥에 정그레를 놓고 채반에 베보자기를 깔고 찐다. 보리를 수확해여 그제샤 허기진 배를 꽉채울 수가 있다.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인 할아버지 진지에만 띄엄띄엄 쌀이 섞이고 그 외의 식구는 꽁보리밥이다. 요즘은 꽁보리밥이 건강식이다, 별미다 하여 일부러 음식점에서 꽁보리밥에 된장 상추쌈을 해서 팔지만 보리밥 이외에는 다른 음식이 따로 없었던 시절에는 마지 못해서 먹어야하는 음식이었다.

꽁보리밥을 해서 먹다가 남으면 찬밥으로 보리밥술을 해먹는다. 남은 찬밥에 누룩을 넣어 따뜻한 부뚜막에 놓아 익힌다. 이 보리밥술은 봄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알코올에서 나오는 칼로리로 힘든 일도 거뜬히 할 수 있게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막지를 거르지 않은 보리술에 약간의 물을 타서 마시고 소를 몰고 곧장 논밭으로 나가 논갈이와 밭갈이를 한다. 알코올이 들어있는 술이라 쟁기질이나 가래질 같은 힘든 일도 거든히 해낼 수 있고, 술막지를 거르지 않은 보리술이라  요기가 든든하다. 그래서  아침 나절에 큰 허기를 못 느끼면서 아침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보리국, 보리개떡, 꽁보리밥, 보리술 등 보리로 만든 음식들을 먹고 나면 왜그리 방귀가 많이 나오는지 "빵구타령"이 나올 정도였다.

시아버지 빵구는 호령빵구
시어머니 빵구는 잔소리빵구
빵구타령에 춤나온다
동서의 빵구는 욕심빵구
시누이 빵구는 알랑빵구
신랑의 빵구는 찹쌀빵구
시동생 빵구는 사탕빵구
얼씨구나 얼씨구나 얼씨구나
태평성대로 놀아보자

그 고달픔과 인고 속에서도 우리네들은 빵구타령으로 보리고개를 넘었고  밀짚으로 멋들어지게 밀짚모자를 만들어 여름의 뙤약볕을 가렸다. 첫 수확물인 보리를 타작할 때는 보리 이삭을 마당에 널어놓고 한 사람은 메기고 여럿이 옹헤야 소리로 힘차게 받아넘기면서 도리깨질를 한다. 보리를 깔아놓고 보리이삭을 터는데 소리없이 도리깨를 내려치면 일손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료하기 짝이 없다.  이때  여러 명의 타작꾼 중에서 힘이 좋고 도리깨질을 잘하는 목도리깨꾼이 보리이삭을 두드리고 삐쳐서 엎으면서 타작소리를 메기고, 종도리깨군이 엎어진 보리이삭을 두드리면서 받는 소리를 한다. 그러면 일손이 맞아떨어지고 노래가 흥겨워 일의 고달픔을 잊는다.

"어절시고 옹헤야,
잘도 한다 옹헤야,
단둘이만 옹헤야,
 하드래도 옹헤야.......

팔구월에 옹헤야,
파종해서 옹헤야,
그해삼동 옹헤야,
다지나고 옹헤야,
명년 이월 옹헤야,
제초하고 옹헤야,......"

그러나 이러한 보리고개의 한타령들은 아리랑의 흥타령으로 변했다. 경운기를 비롯하여 농기구의 기계화, 종자개량 등으로 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서 보리고개는 아리랑고개로 변해갔다. 그래서 십수년이 지난 오늘 어제의 보리고개가  버리는 음식이 수 조원이 이르는 오늘의 처지에서 생각할 때 격세지감이 난다

일찍이 옛 선인은 말하기를 "하루 세 끼의 밥을 먹더라도 매번 농부의 고달픔을 되새기고, 몸에 한 오라기의 옷을 입었을지라도 항상 길쌈하는 여인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라" 고 했는데 배고픔과 헐벗음을 모르는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 고달픔과 수고로움을 상상이나 할까!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후기부터이고, 청동기 및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농경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삼국시대부터는 농자정본(農者政本)이라 하여 국가적으로도 농사를 정치의 근본과제로 삼았었다.  이후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천년 동안을 줄곧 農者는 天下之大本이었고 농업중심사회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도 우리에게는 넘기 힘든 보리고개가 매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보리고개를 아리랑 흥타령 노래 부르면서 넘게 한 계기가 바로 경운기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쟁기로 땅을 갈고 곰방매로 덩어리를 깨뜨리고, 번지로 삶아서 씨앗을 뿌리고 모를 심었다. 가뭄이 들면 맛두레 용두레 물자위로 밤낮으로 사람의 힘으로 물을 퍼야만 했다. 가을곡식이 여물면 허리가 꺾어지도록 하루종일 낫으로 베어 지게나 소달구지, 길마에 실어 마당으로 가져와 그네나 족답식탈곡기나 풍구를 이용해 타작을 했다. 순전히 사람의 힘, 소의 힘으로 하던 농사일이 경운기 하나로 해결이 났다.

경운기로 땅을 갈고 로터리를 치면서, 가뭄이 들면 경운기를 이용한 양수기로 물을 푸면서, 무거운 짐도 거뜬히 옮기고, 탈곡기로 타작까지 모두 할 수 있다. 쟁기 곰방매 번지 맛두레 무자위 지게 달구지 풍구 등의 많은 농기구가 경운기 하나의 기계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농사일에서 경운기가 바로 해결사 노릇을 한다.

지게에 똥장군지고 그 길고 지리했던 보리고개,  언덕을 배고픔과 고됨으로 넘던 것이 이제는 경운기에 라디오를 달고 대중가수의 봄노래를 들으면서 널찍한 고갯길을 힘차게 넘어간다, 보리 고개 대신에 아리랑 고개를.

보이지 않는 힘, 부적의 신비

정초에 삼재(三災;수재, 화재, 풍재)를 당한 사람은 세 마리의 매를 그려서 문설주에 붙인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뱀이 집안에 못들어오게 [巳(뱀사)]자를 거꾸로 붙인다. 2월 초하룻날은 심한 악취를 풍기는 노래기[벌레]가 물러가라고 [정랑각시속거천리(香娘閣氏速去千里)]의 부적을 붙인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황색바탕에 붉은 색깔로 그린 부적을 한번쯤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한 장쯤 가지고 있거나, 집 안에 붙여 놓았을 것이다..

부적을 만들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한수를 올리고 향을 피운다. 그런 다음 이[齒]를 세 번 '딱딱딱' 마주치고 주문을 외운다. 부적을 쓸 때는 정신이 흩어져서는 안되고 단숨에 내리써야 한다. 붉은색의 경면주사(鏡面朱砂)나 영사(靈砂)를 곱게 갈아서 기름이나 설탕물에 잘 개서 누런 빛이 도는 종이에 쓴다.

부적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부적 통해 좋은 것을 증가시켜 이를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나쁜 기운이나 액, 동물을 물리치고자 하는, 재앙을 예방하려는 부적이 있다.  전자의 경우, 장수·재물·자손을 얻기 위한 것, 관직을 얻고자하는 목적, 입학을 성취하는 부적, 가족의 안녕을 위한 부적,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되도록 하는 부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후자 중에 가장 흔한 부적은 병을 물리치는 병부(病符)이다.

부적은 종이에 글씨, 그림, 기호 등을 그려서 악귀를 쫓거나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주술적인 도구이다. 부적의 모양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한자를 파자(破字)하여 추상화한 것, 아예 그 의도를 모르도록 일부러 꾸민 것 등이 있다.

그림으로 만든 부적은 동물·천체(태양)·귀면(鬼面) 등 구체적인 그림과 물결무늬·탑모양·계단문양 등 추상적인 것이 있다. 글자로 된 부적은 일월(日月)·천(天)·광(光)·왕(王)·금(金)·신(神)·화(火)·수(水)·용(龍) 등이 많이 눈에 뛴다. 부적 전체가 한자로 된 것도 있지만 한자를 파자(破字)를 써서 여러 가지로 결합하고 여기에 줄을 긋는 형태가 많다. 이런 경우는 [칙령(勅令)]이라는 글자가 부적 꼭대기에 쓰는 것이 보통이다. 강력한 신에 의하여 귀신이 꼼짝 못하고 도망가거나 완전히 포박되어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모양을 표시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부적은 아푼 곳에 붙이거나 이를 불살라서 마시기고 하고, 벽이나 문 위에 붙이든가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런데 과연 부적은 효험이 있을까! 부적에 대한 실제적인 효능을 모방송사에서 실험하는 프로가 있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그리도 잘 먹던 닭고기에 [야수불침부(野獸不侵符)]'의 부적을 붙였더니만 실제로 슬금슬금 피했다. 투명한 통에 칸막이를 하고 벌레들을 집어넣었는데, 처음에는 그 분포가 양쪽 엇비슷했다. 그런데 한 쪽 칸막이에 [비수불침부(飛獸不侵符)] 부적을 집어넣었더니만 칸막이 밑에 뚫어놓은 틈을 통해 다른 한쪽으로 벌레들이 다 모였다.

약한 이와 힘센 이가 팔씨름을 시켰는데, 힘없이 넘어가는 약한 이에게 부적을 쥐어주었더니만 처음처럼 맥없이 넘어가지 않고 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동물실험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부적을 제작할 때 쓰는 경면주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사(朱砂)는 한방에서 약재의 하나로 쓴다. 그런데 사람보다 신경계통이 더 발달된 동물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바로 경면주사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벌레들도 부적의 냄새가 싫어서 멀리한다는 것이다. 산 속에 많이 드나드는 사람이 이 부적 하나쯤 몸에 지닌다면 호랑이나 벌레들을 피할 수 있는 실제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귀중한 서적과 의류 등을 보관할 때 천연약재를 함께 넣어 유물의 보존과 손상을 방지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십여 종의 전통약재 자체에 대한 방충 방균력을 확인하고 문화재 보존용 방충방균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약재 2종으로부터 살충살균 효과가 존재하는 휘발성 향기성분을 추출·정제했다. 그 향기가 지류·섬유질 문화재의 재질에 영향을 주지 않고 인체에 무해하고 환경오염이 없으며 해충과 균에 대해 강한 살충살균 효과까지 있다는 것이다. 전통약재를 사용한 조상들의 비법을 현대의 과학기술로 확인하였다는 등 선조의 지혜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어쩌면 주사(朱砂)의 향기를 통해 동물과 액을 쫓는 부적과 그 효능면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에게 부적은 어떤 효능이 있을까? 부적이 심리(心理) 강화작용을 한다.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 무서운 생각이 들면 일반인들은 몸에 지닌 쇠[鐵]소리를 내며, 군인들은 군화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면서 그 두려움을 이겨낸다고 한다. 스님들은 목탁을 두둘기거나, 신부는 묵주를 돌리고, 목사는 기도를 할 지 모르겠다. 부적은 바로 이러한 무서움을 이기게 하는 것들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무서울 때, 병이 났을 때, 힘이 필요할 때 부적은 그것을 지닌 사람에게 심리적 강화작용을 통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게 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부적은 단순한 주술적 도구나 미신이 아니라, 실제적인 효용과 효능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부적에 대한 지나친 찬양일까!

재물을 기원하는 초재부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관직부

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선사부


재액을 막는 기문신장부

 

삼재부와 부적판

 

등잔불과 전기불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래 먼 옛날부터 인간은 이 불에서 열과 빛을 이용하여 왔다.선사 시대의 주거지에서 볼 수 있는 화덕 자리도 취사 및 난방의 기능과 함께 어둠을 밝혀 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어둠을 밝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는 모닥불, 횃불 등을 들 수 있는데,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토제등잔이나 소박한 목제등화구 등이 고안되고, 이러한 등화구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아름답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편 등화는 어둠을 밝히는 기능 외에도 의식용으로 사용되거나 봉화처럼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밤을 대낮같이 밝힐 수 있는 전기불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전기가 없던 불과 몇 십년 전만 하여도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움직이는 것을 거의 삼가며 집에 머물렀고, 어두워지면 조명 시설이 없어 곧 자리에 누워서 자고 해가 뜨면 곧바로 일어나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래도 전기불이 없던 시절에도 불을 붙여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기구인 "등기"가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야간 생활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기름을 담아서 불을 켜는 등잔, 등잔을 얹어서 사용하는 등경, 초를 꽂는 촛대, 들고 다니는 제등, 걸어 놓는 괘등, 실내에 놓는 좌등으로 이들의 명칭과 형태는 다를지라도 기름불이나 촛불을 이용하도록 만든 구조는 공통된다.

그 가운데 제등은 밤에 다닐 때나 의.예식에 사용하는 휴대용으로서 내부에 초를 넣은 것은 초롱, 등잔을 넣은 것은 등롱, 청사 홍사로 깁은 것은 청사초롱 홍사초롱 등 다양하다. 특히 조족등은 발 아래만 밝힐 수 있게 만든 등으로 내부에 회전식 초꽂이를 설치하여 등을 어느 방향으로 하던지 바로 설 수 있게 하였다.

그 외 화전민촌의 대표적인 등화구로서 코클이 있었는데 방 한쪽에 높이  1m 정도로 단을 설치하고 위로는 굴뚝을 만들어 관솔불을 피어 방을 밝히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그 열로 부분적인 난방을 겸한 조명 시설이자 난방시설이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등기들은 기름이나 초를 이용하여 불을 켰다. 솜이나 삼실, 한지 등을 꼬아서 심지를 만들고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피마자 기름, 고기 기름, 고래기름 등을 연료로 사용하여 등잔에 불을 켰다. 초는 밀초, 소기름초, 돼지기름초 등을 사용했는데 궁중에서는 용이 조각된 용초와 모란꽃이 장식된 화초를 사용했다.

등화구는 밤에 불을 밝히는 기구일 뿐만 아니라 낮에도 각종 의식이나 혼례 때에도 분위기를 엄숙하게 하기 위해서 불을 켰다. 석가탄신일의 연등행사와 같은 종교의식이나, 사람이 죽은 상가에서 대문에 "기중(忌中)"이라는 글을 써서 다는 발등거리 등은 아직까지 이어오는 전통 등화구이다.

현존 유물로서 가장 오래된 등잔의 예는 고신라의 다등식 등잔과 백제 무녕왕릉의 등감에 놓였던 등잔이 있다. 다등식 등잔은 고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4-6개의 등잔이 하나의 원통관에 연결되어, 한곳에 기름을 넣으면 여러개의 등잔에 일정한 유량을 유리하면서 불을 밝힐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또 무능왕릉의 등감에 놓였던 다섯개의 종지형 등잔이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말 석유가 수입되기 전까지 쓰인 등잔의 기본형이었다.

1876년(고종 13년)경에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수입되면서, 심지꽂이가 따로 붙인 사기등잔이 대량으로 수입, 보급되었다.우리의 전통적인 등잔은 심지가 그저 그릇가에 대어서 불을 켜거나 발심지를 하여 그릇의 중간에 오게하여 불을 켜지만 석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바로 기름에 불을 닿으면 연소가 되기때문에 뚜껑을 겸한 심지꽂이가 따로 붙어야만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가스를 연료로 하는 간데라도 있었다. 1890년경에 처음으로 서울에 전기불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석유나 가스, 전기에 의한 조명이 있었지만, 최근까지도 제사나 고사 등에는 식용기름에 발심지를 해서 불을 켰다.  조도를 높이려면 심지를 두개 또는 그 이상으로 하여 불을 켜면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쌍심지라 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어렴풋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전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지금은 모두 사라져 그 자취를 박물관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생활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지금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지 모르지만 전기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등잔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첨단조명기구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어두운 등잔 아래서 새끼꼬고, 짚신삼던 아버지와 그 옆에서 눈을 비벼가며 글을 읽는 아이, 그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 이 모두가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등잔에 대한 추억이 될 것이다

산가지와 전자계산기

우리 선조들은 셈하는데는 그리 밝지 못했는 것 같다. 특히 인정을 나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처럼  이웃간이나 친척사이에  손해와 이익의 계산은 크게 따지지 않았고 단지 인정으로 주고받았다.

숫자를 셈하는데 사용되었던 전래되는 민속유물은 막대기를 사용해서 숫자를 계산하는 산가지, 격자산법에 의해 곱셈이 가능한 주산반, 서로 기준이 다른 단위들을 쉽게 비교하고 환산할 수 있도록 위 아래로 움직이게 만든 환산반, 주판인 산반, 작은 막대는 1단위, 큰 막대는 5단위로 하여 볏단 등을 세는데 사용하는 계산대, 지게 짐을 세는데 사용하는 만보, 서산 등 여러 가지 계산법과 계산 기구가 있었다. 요사이 같으면 전자계산기나 컴퓨터가 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수백 억의 숫자를 눈 깜짝할 사이에 계산해내는 것에 비교를 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 계산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조들이 가졌던 절약정신과 거래질서에 따른 도덕관을 함께 배여 있어 촌치의 자기 이익만을 추고하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산가지(산목, 산대, 산책)'라는 댓개비가 있다. 가는 대나무나 뼈로 젓가락과 같이 만들어 그것을 세로나 가로로 배열하여 셈을 했다.

이 산가지로 셈하는 방법은 일.백.만의 단위는 세로로 늘어놓고, 십.천.억(지금의 십만)의 단위는 가로로 늘어놓아 수를 나타낸다. 단 6이상의 수일 경우 5를 기준으로 5는 가로로 놓고 나머지 수는 세로로 놓되, 위 또는 아래 쪽에 놓는다. 즉,l(1),ll(2),lll(3),llll(4),lllll(5),T(6),ㅠ(7),Tll(8),Tlll(9) 등을 기본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621은 T=1로 놓고,2622는  =T=ll로 놓아서 수를 셈하게 된다.

동네사람들에게 외상 술을 많이 파는 주막에서도 이런 산가지의 셈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글을 깨치지 못한 주막의 주모에게는 이 산가지의 방식이 안성맞춤이었다. 주막의 기둥에 외상꾼의 특징을 숯껑으로 그리고 그 밑에 산가지 방식의 금을 그어 표시했다.술꾼의 얼굴에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검은 점을 하나 그리고, 스무일곱량이 외상이면 그 점 밑에 =ㅠ로 표시한다. 말하자면 점박이가 수무일곱량 외상술값을 먹었다는 뜻이다. 이 주막의 기둥이 외상장부였던 셈이다.

산가지는 단순하고 만들기도 쉬워서 계산하는데 만 쓰였는 것이 아니라 계모임이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점, 놀이에도 이용되었다.

목돈을 모을 목적으로 산통계를 많이 조직했다. 계원이 한 달에 한 두번 날을 정하여 일정한 곗돈을 낸 다음에 산통 속에 계알을 넣고 흔들어 추첨하여 뽑힌 계원에게 곗돈을 타게 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산통계는 계원 전원이 한번씩 곗돈을 타야 하야 끝이 나는데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튼다는 뜻의 '산통 깬다'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산통점은 산통에 산목 또는 산가지를 여덟개 넣어두고 뽑아서 괘를 만들어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것이다. 나무 속을 깎아 만들거나 조롱박의 속을 파내어 산통을 만들고 여기에 산목을 넣는다. 산목에는 1에서 8까지 눈금을 새기고 장님이 손으로 만져서 숫자를 헤아릴 수 있도록 한다. 상위에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운 뒤에 점치러 온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산통을 흔들어 산목이 섞이도록 한 뒤에 산통에서 산목을 하나씩 꺼내서 새겨져 있는 눈금을 읽고 여섯 번 되풀이하여 괘를 만들어 점을 쳤다.

산가지놀이는 셈할 때 쓰던 젓가락 모양의 짧은 댓개비를 가지고 노는데, 근래에는 산가지 대신에 성냥개비를 가지고 이 놀이를 함으로 '성냥개비놀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즐긴다. 놀이방법은 산가지떼어내기, 산가지따기, 형태바꾸기, 산가지들기, 삼각형없애기, 쌍만들기 등이 있다. 이러한 산가지놀이는 어린이가 사물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도형감각이나 역학적 기초관념을 심어주는데 큰 도움이 되는 놀이이다.

이처럼 산가지는 셈하는데 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계, 점, 놀이 등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산가지와 전자계산기의 계산능력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러나 그 차이는 삶의 질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다.전자계산기를 사용해도 계산을 다  못하고 바삐 허우적대는 현대인에 비해, 우리조상들은 산가지의 셈으로도 일상생활에서 셈을 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단순한 인정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시월상달의 귀신 달구기(逐鬼)와 위하기(告祀.安宅)

우리네 생활에는 별나게 귀신들이 많았다.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귀신의 종류가 273 종이나 된다. 일상생활 주위에서 그것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더 있으면 신으로 섬겼다. 그러다보니 신들도 다양하고 각양각색이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귀신들을 우리조상들은 선한 신(善神)과 악한 신(惡神)을 크게 구분하여 인식하였다.

선신은 집안에 있는 조상신이나 가신(家神)들로 가족과 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 악신은 귀신, 망령 등으로 주로 집밖에 존재하며 이들 신이 집으로 들어오면 해꿋이을 하는 부정적인 잡귀들이다. 이들 귀신들을 다루는 방법도 다양한데, 나쁜 잡귀는 쫓아내고 집 근처에는 을씬도 못하게 하는 귀신 달구는 방법과, 간단한 음식을 장만하고  무당을 불러 춤과 노래로 달래고 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귀신달구기는 주로 정초에 많이 행하나 객귀가 집안에 들어오거나 집안에 탈이 생기면 수시로도 행하고, 귀신을 달래고 위하는 의례는 정월과 시월 상달에 많이 이루어진다.

귀신이나 망령은 악신적이고 부정적이어서 집안에 들어오면 탈이 난다고 생각하여 주로 귀신달구기방법을 통해 물리친다. 정초에 머리카락이나 명씨(목화씨), 고추씨를 화로불에  태워 심한 악취을 내거나, 대나무를 태워 요란한 소리을 내거나, 혹은 대문에 구멍이 가는 체를 걸어두어 이들 귀신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멀리 도망가게 한다. 삼재(三災)가 들었거나, 나쁜 귀신이 몸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고,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간에 부적을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

상가집의 음식을 얻어 먹었거나 남의 음식을 먹고 난 뒤에 몸살난 것처럼 아프면 객귀가 몸에 붙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객귀물림을 한다. 객귀가 들렸는지를 콩을 씹어 먹거나, 숟가락을 좁쌀이나, 보리쌀 종지에 세우는 방법을 통해 객귀가 들렸는지를 확인하고 개귀가 들렸으면 바가지에 된장을 풀어 식칼로 환자의 머리를 세 번 뜯어 넣고 진언을 한 후 된장국을 대문 밖에 뿌리면서 식칼을 던지며 바가지를 엎어 놓는다. 이때 칼끝이 밖을 항해여 객귀가 나가고 아픈 것이 낫는다고 믿었다. 굿을 할때도 물과 불로 부정굿을 하여 굿장을 깨끗이 한다. 또한 금줄이나, 황토흙으로 집귀들의 접근을 막는다.

물론 이처럼 잡귀를 달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달래고 위하기도 한다. 굿의 뒤전거리가 그것인데, 굿이 끝날 무렵에 바깥마당에서 뒤전이라는 거리를 행한다. 뒷전이란 주로 굿에 몰려든 잡귀, 잡신을 풀어 먹이는 거리이다. 굿은 신들을 위한 일종의 잔치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거지와 같은 잡신들이 몰려들게 마련이다. 이들 잡신을 풀어먹이지 않으면 언제 탈이 날지 모른다.그래서 잡귀들을 위해 굿거리를 한다.

선신(善神)인 조상신(祖上神)이나 가신들(家神)에 대해서는 달구기보다는 달래고 위하는 고사와 안택의례를 한다. 이들 의례는 정월과 시월에 많이 나타난다. 정월보름전에 행사는 일년의 운수와 액막이를 위해서하는 경우라면, 시월에는 주로 주부가 추수감사와 가내 평안을 감사하고 비는 추수감사성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전부터 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일년중 가장 높은 달로 치고, 고사.조상단지모시기.말날(午日).시제 등 선신을 위하는 의례를  많이 행했다. 10월의 첫 午자가 들은 말날이나, 주인의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에  각 가정에서는 붉은 팥시루떡이나 무시루떡들을 만들어서 손을 비비고 축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삼신, 성주, 조상, 터주, 조왕 등 일련의 가신들에게 햇곡식을 갈아 넣어 주었다.

시월상달에 귀신 위하는 일은 말날(午日)에 많이 행했다. 음력으로 시월 첫 오일에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외양간에 놓고 신에게 기도하여 말의 건강을 건강을 빈다. 같은 말날이라도 병오일(丙午日)의 피하고 무오일(戊午日)은 좋다. 병오일의 丙자가 病과 음이 같으므로 꺼리고, 무오일의 戊자는 무성하다는 茂와 음이 같기 때문에 무성하게 잘 되라고 이날 조상단지 쌀 갈기나, 고사까지도 말날이 많이 선택되었다.

전북지방에서는 농사를 다 지은 상달이라고 해서, 이때 집집마다 시루떡을 하고, 안방의 삼신제왕을 모시고, 음식을 외양간, 사랑, 머슴방, 나락가리, 쌀뒤주, 장광 등 곳곳에 조금씩 차려 놓는다. 이래서 "조왕에 놓고, 터주에 놓고 나면, 나 먹을 것이 없어진다"는 속담이 생겨났는데, 이때 집안에 놓았던 음식은 온식구들이, 나락가리나 사랑에 놓았던 음식들은 머슴들이 각각 먹는다.

보리고개가 있던 시절에 떡은 제삿날, 어른생일날, 설.추석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나고 별난 음식이었다. 그러나 시월만큼은 곡간이 넉넉하니 무싯날에도 떡을 해먹을 수가 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내고, 떡 본 김에 굿한다"고 평소에는 먹을 수 없던 떡이 있기에, 먼저 신에게 바치고 손을 비벼 풍년과 집안의 안녕에 감사하고 물려서 신덕(神德)을 받고 나서야 식구들이 먹는다. 귀신과 사람이 함께 즐기고 함께 먹는 것이다.(神人共樂共食)

고사떡은 될 수 있는대로 여러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이 좋다는 속설이 있다. 집집마다 고사떡을 나눔으로서 인정을 나누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고사떡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서로의 인정을 확인하고 이웃끼리 서로 돕고 협력하는 한 동아리의 모둠살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즉 고사떡은 나누어지고 인정은 모아지는 것이다. 정(情)의 흐름이 단절된 삭막한 도시생활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여기서 고사 자체가 지니는 종교적 주술성(宗敎的 呪術性)보다는 '안정나눔'이라는 사회적 의미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民草들의 소리판 속의 신. 흥. 한. 멋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 의논하고 함께 노는 그 공동의 자리를 `판`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참 멋있는 분들이라 소리 잘하고 춤 잘 추고 짓거리 잘해 굿판 춤판 소리판 난장판 등을 잘벌렀다. 그래서 마을제나 걸립 그리고 설, 단오, 추석 등에 수시로 놀이판을 벌렸다. 이러한 판은 처음에 소리판에서 춤판으로, 난장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운데 강요나 억지도 없고 부조리나 배리, 그리고 차별도 없는 우리(WE-ness)가 되는 것이다.

판이 식거나 깨어지면 불쾌해 하고 판이 잘 이루어지면 살판났다고 기뻐한다. 놀이판과 관련되어 거론해야 할 것이 굿판 놀이판 탈판 춤판이 있다. 새해의 시작, 계절의 전환, 생명의 탄생과 죽음, 새로운 삶의 출발 등과 밀접한 관련 아래서 이러한 판이 벌어진다. 우리 조상들은 일상생활 속의 `한`과 `슬픔`을 판에서 특히 소리판에서 `신명`과 `흥`으로 풀어 가는 `멋`을 가졌다. 놀이판에는 웃음이 있고 흥이 있고 신명이 있고 풍자와 해학이 있는 마당이다. 즉 놀이판에는 신 흥 한 멋이 어울려진 한 마당이다. 생활 속의 `한`은 恨으로 怨恨으로 가지 않고, 한스런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고 누구도 허물 하지 않으며 타령조로 마음속으로 삭이는 바로 그런 `한`이며 `신`은 한스런 삶을 잠시 잊고 생산하고 재창조하는 원동력이 깃들여 있는 놀이의 신명, 신바람, 신풀이가 그것이다.

`흥`은 풍성한 탕진 속에 풍요로운 내일을 기약하고 흥청거려 보려는 흥타령의 줄거움이다. 풍자와 해학 풍류가 어우러진, 저항과 인고, 질타와 용서가 융합된, 불협화음이 리듬으로 되는 곳에 놀이판의 `멋`이 자리한다. 이러한 신 흥 한 멋의 소리판에서 무질서 속에 질서를 발견하고 난장판 속에서 우리는 한동아리임을 느낀다.

민속 놀이판은 질펀한 흥겨움, 신명 풀이가 그 본질이다. 그것은 난장판으로 절정을 이룬다. 건강한 놀이판은 놀이꾼과 구경꾼의 특별한 구분 없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가운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생활 공동체로서의 유대를 다지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놀이판에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들러리 노릇만 하고 시간과 돈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오늘날의 소리 문화도 지금까지 이야기한 민요와 비교할 때 과연 건강한가를 반문하면서 끝맺는다.

모, 벼, 나락, 쌀, 밥의 일대기

우리가 매일 하루 세 끼로 먹는 밥은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농부의 일손과 땀의 결실이다. 우리가 먹는 밥, 특히 쌀밥은 먹거리 이상의 어떤 신성성을 가진다. 요즘처럼 하루 삼시 세끼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예전에는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몇 일 않되었다. 설날 추석날 등의 큰 명절날, 조상님 제사날, 생일날이어야지만이 겨우 흰쌀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평소에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집안의 가장 큰 어른, 돌아가신 조상님, 집을 지키주는 가신(家神), 동네를 수호하는 동신(洞神) 만이다.

초봄에 체나 키를 사용하거나, 소금물을 이용하여 볍씨(씨나락)를 골라 소독한다. 골라진 볍씨는 싹이 쉽게 나도록 연못이나 물에 담겨서 수분을 흡수하게 한다. 그런 다음 못자리가 될 논바닥을 쟁기로 갈아 엎어서 물을 대고 바닥을 고른 다음 볍씨를 뿌려 파종한다.

못자리에서 모가 적당하게 자라서 모를 뽑는 것을 "모찐다"고 한다. 모를 뽑아 뿌리의 흙을 물에 흔들어 떨어지게 한 다음, 한움큼씩 짚으로 묶어 모심기를 위해 장만한 논으로 운반한다. 모심기할 논은 쟁기로 물갈이를 하고 써레질과 번지질을 하여 논바닥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모를 심는다.모심기는 줄을 대어서 심는 줄모와 마구잡이로 심는 벌모심기가 있다. 모심기는 일정한 짧은 시간에 온동네 전체가 해야 하므로 두레나 품앗이를 조직하여 협동으로 한다. 하루 종일 허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엎드려 하는 모심기는 그나마 "모심기소리"나 "두레 풍물"이 없었다면 정말로 허리는 꺽쇠처럼 되어버렸을 것이다.

모심기꾼 가운데 목청 좋은 사람이 "세마지지 이 논맴비, 모를 심어 정자일세, 모야 모야 노랑모야 니 언제 커서 열매맬래, 이달크고 훗달크면 내달이면 열매맺지"라고 흥겹게 한 곡조 뽑아 올린다.

모심기가 끝난지 약 보름이 지나면 이때부터 호미로 논매기를 한다. 보통 7일 간격으로 세번 맨다. 최초의 논매기를 '아이 논매기'라고 하고, 두번째 논매기를 '두벌 논매기'라 하며, 세번째 논매기를 '세벌 논매기'라고 한다. 세벌논매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이제 힘든 고된 일이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신명 많은 우리네 농부들 그냥 맹송하게 올 수 만을 없었다. 그 해 가장 일 잘한 상머슴을 뽑아 삿갓을 거꾸로 씌우고 소등에 태워 풍물을 울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 집에서는 술과 국수로서 일꾼을 대접하며 한 해농사의 노고를 위로 한다.

논을 매고 난 뒤에는 수시로 피를 뽑아주고, '이삭거름'을 주어 이삭이나오는 데 해가 없도록 한다. 최근에는 추수기에 자주 오는 병충해가 많기 때문에 농약를 뿌려주기도 한다.

음력 8월이면 벼는 이싹이 나와서 수확기를 맞는다. 9월에 접어들어 벼베기가 시작되는데, 낫으로 벼를 베어 볏단을 만들다. 볏단은 지게나 발채 또는 달구지로 운반하여 마당에서 타작을 한다. 타작을 한 후에 섬이나 가마니에 넣어서 보관하여 두었다가  필요할 때 방아에 나락을 찧어서 쌀을 만든다.

밥은 쌀 보리 좁쌀 따위의 곡류에 물을 넣고 끓여서 죽보다 되게 지은 것이다. 밥을 짓는 곡류 중에서 쌀이 수위를 차지하므로 좁은 뜻으로는 쌀밥만을 가리킨다. 밥에는 쌀밥,찰밥,보리밥,조밥,차조밥,팥밥,콩밥 등이 있어 일상생활에 이용되고 있으며 잡곡이 섞인 것을 잡곡밥이라 한다. 쌀에다가 다른 곡을 섞을 때에는 혼합하는 곡식의 종류에 따라 보리밥, 콩밥, 팥밥 등으로 부른다. 중부 이남지방에서는 보리를, 중부 이북지방에서는 조를 많이 섞은 잡곡밥을 상식했다. 일부 상층의 부유한 가정을 빼놓고는 보통 쌀밥보다는 잡곡이 주식이었고, 명절이나,제사,생일 같은 때에만 흰쌀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그밖에 식성이나 형편에 따라 특별하게 지어 먹는 밥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약밥이나 밤밥 등 매우 독특한 향미를 가진 것도 있고 밀밥, 감자밥,고구마밥 등과 무우밥,콩나물밥,김치밥 등도 있으며, 육수로 밥을 짓고 나물류와 고추장으로 간편하게 비벼 먹는 비빔밥도 있다. 생굴이나 조개살, 채소 등을 섞어 짓는 밥도 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쌀밥은 봄의 씨나락에서 모, 벼, 나락, 쌀 등의 단계를 거쳐서 생산된 것이다.  쌀 한톨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농민의 손이 수없이 가고 땀이 속속히 베인 귀중한 것임므로 우리는 낭비하지말고 이끼고 소중히 여겨야 하겠다.

밥과 관련된 속담을 찾아보면 밥은 단순한 먹거리로서의 밥이 아니라 식사를 뛰어넘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밥은 사람의 목숨, 생활상태, 재산의 정도, 복, 사람의 심리상태 등을 나타낸다. "진지잡수셨읍니까?"라는 인사법은 세계를 통츨어 오로지 한민족에게만 통용될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밥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밥숟갈 놓는다.(밥은 사람의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한다:죽음의 의미)
*밥줄 떨어진다.(밥줄은 일자리로 직장에서 쫒겨난다는 의미)
*밥이나 먹지요.(생활상태, 재산의 정도를 가름)
*밥술뜨기도 어렵다. (가난한 집을 일컫음)
*밥술이나 뜬다고 거들먹거린다.(돈 많은 졸부에 대한 비아냥)
*밥이 덕지덕지 붙었다.(복이 많은 사람을 일컬음)
*밥이 보약이다.(살아가는데 필수품이 밥이다라는 뜻)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밥의 위력, 주술성 강조)
*밥 맛 떨어진다.(아니꼬운 상대를 만날을 때의 심리상태)
*밥 일이 곤두선다.(화가 치밀었을때)
*밥 한 톨을 흘리면 천벌을 받는다.(밥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
*밥 값도 못한다.(제몫을 다못할 때)
*식은 밥을 먹었나.(헛소리 할 때)

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풍속 가운데 "밥 아홉 그릇먹기"가 있다. 정월대보름날에는 아홉 집의 밥을 먹으면 좋다는 속신이 있어서 서로 밥을 얻어 먹는다. 여러 집을 돌아 다니며 밥을 얻어 먹어야 그 해의 액운이 사라지고 복을 받는다 하여 적어도 세 집 이상의 다른 성받이 집을 다니며 식사대접을 받는 풍속이다. 그리고 남원이나 군산지방에서는 밥 뿐만아니라 나물도 아홉 그릇을 먹으면 좋다고 하여 나물을 얻으러 돌아 다니기도 한다.

사는일 가운데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던 시절에는 밥에 얽힌 옛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부유한 집으로 시집간 누나집에 가난한 친정동생이 찾아왔을때, 그 누나는 동생을 위해 찰밥을 해준다. 원래 찰밥이란 것을 적게 먹어도 뱃 속에 들어가면 점점더 밥알이 커져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모르는 동생은 배고픈 김에 너무 많이 먹어 그만 돌아오는 길에 배터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배고픔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이 이야기를 텔레비젼 화면에 비친 멀리 아프리카의 일쯤으로 생각하고, 보리고개를 미아리고개쯤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맛과 멋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것이 입맛이다. 한번 입에 벤 입맛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어느 뜸엔가 밥자리를 미국에서 수입한 밀가루와 라면이 대신하게 되었다. 밥이 밥값도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소금과 오줌싸개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시절에 키를 덮어쓰고 이른 아침에 소금얻으러 가서 이웃집 아주머니께 혼이 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똥 오줌을 가릴 만큼 자란 어린 아이가 잠자리에서 이부자리에 오줌을 쌌을때,그 날 아침 어머니는 아이에게 키를 씌우고 쪽박을 들려서 이웃에 소금을 얻으로 보낸다. 키가 작아서 머리에 쓴 키를 질질 끌고 소금을 얻으로 오면 그 이유를 미리 알기 때문에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부엌일을 멈추고 소금을 주고 난뒤 빗자루나 부지깽이로 혼을 내어준다. 그러면 아이는 울면서 집에 돌아와 아침을 얻어온 소금으로 반찬을 하여 밥을 먹게 된다. 오줌싸개 아이는 이렇게 호되게 놀라고 창피를 주면 스스로 조심을 하여 오줌을 가리게 된다고 믿었다.

여름이야 홑이불을 덮고 자니까 오줌을 싸도 쉽게 빨래를 할 수 있지만 한겨울에 두꺼운 솜이불에 오줌을 싸면 큰 일이다. 추운 겨울에는 잘 마르지로 않고 애를 먹는다. 그래서 여름보다는 특히 겨울철 이른 아침에 키를 덮어쓴 오줌싸개꾼들을 동네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소금을 다량 생산해 왔으며,시품을 저장하기 위하여 염장저장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젓갈, 절인 생선, 장아치, 김치 등 소금을 많이 사용하는 식품들을 섭취해왔다.

성경에도 "너희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는 구절이 있다. 소금은 물질이 썩는 것을 막는 방부제 역활을 한다. 소금이 이처럼 부패를 방지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 도덕의 타락을 막고 순화향상시키는 참사람이 되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풍속에 보면 장사하는 집에 첫 맛수 손님이 흥정을 하다가 그냥 가면 소금을 뿌린다. 소금으로 부정을 물리는 것이다. 음한 나쁜 기운(-)을 썩는 것을 방지하는 양의 기운(+)으로 물리치려는 의도이다.

음식의 간을 맞추는데 쓰일 뿐만아니라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에서도 필수품인 소금은 물물교환시대에는 화폐의 역활도 했고 지배자나 사원에 바치는 공물이 되기도 하였다

옹기와 장독대

우리 일상생활에서 옹기 만큼 다양하고 유용하게 쓰이는 생활도구는 드물 것이다.옹기는 단지, 독, 항아리 등으로 불리는데, 술을 담으면 술독, 물을 담으면 물독, 간장독, 김치독, 쌀독, 소금단지, 된장항아리, 꿀단지, 양념단지 등 무엇이든지 담으면 되는 다용도 용기이다. 어디 이뿐인가, 풍년을 기원하고 집을 지키는 가신(家神)인 조상단지의 신체도 옹기로 만든 단지에 햇곡식을 넣어 만든다.

옹기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은 집안에서는 장독대이다.  집안의 뒤안이나 안마당 양지 바른쪽에 한 단 높여 만든 장독대에는 간장단지, 김치독, 소금항아리, 된장독, 떡시루, 약탕기 등등 옹기로 만든 것이 다모여있다.

특히 이곳은 그 집안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장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장은 그 집안의 음식 맛을 좌우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기본 식품이다. 장맛이 좋아야 그해 집안이 편안하다고 믿어 온 우리 어머니들은 장독대 간수에 몹시 마음을 썼다. 누가 보아도 보기 좋도록 장독들의 키 맞추어 가지런히 옹기종기 을어 놓고, 어느 것이나 모두 반들반들하게 윤이 흐르도록 매일 질 손질하여 뚜껑을 덮어 놓는다.

늦가을에 콩으로 메주를 쑤어 겨우내 안방에서 띄운다.  정월 말경에서 3월 초 사이에 메주와 소금, 물을 넣고 장을 담근다. 장을 담글 때는 고추와 대추, 빨갛게 달군 참숯을 항아리 제일 아래에 넣는다. 고추는 남아의 상징으로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고, 장을 붉은색으로 색내기 위한 것이다. 참숯은 항아리 안에 있는 냄새를 빨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모든 것은 오랜 생활경험에서 나온 지혜이다.

이처럼 장독대를 소중히 간수하고 장담그는데 주의하는 것은 장이 변질되지 않고 맛있게 숙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일을 게을리 하면 장맛이 변질되기 쉽다. 만일  장맛이 변질되면  그 한 해의 음식은 제맛을 잃게 된다. 그러면 맛이 맞지 않는 음식을 먹게 되면 가족의 건강이 상하고 집안이 평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우리 어머니들은 정성껏 장을 담그고  장독대를 간수했다.

원두막과 서리

참외나 수박을 심은 밭에는 으레껏 밭을 지키기 위하여 밭머리나 밭 한가운데에  원두막을 짓는다. 원두막은 기둥 4개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보릿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들고, 그 밑에 판자나 통나무로 높게 바닥을 만든다. 사방은 보릿짚이나 밀짚을 엮어 상하로 개폐식으로 더우면 막대기로 버티어 열도록 되었으며 땅에서는 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보리나 밀을 베고 그 밭에 주로 참외 수박을 심기 때문에 원두막을 지을 때는 보릿짚과 밀짚이 흔하다.

원두(園頭)라는 말은 원래 참외,오이,수박,호박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이중에서도 수박이나 참외 딸기 등은 현장에서 따먹기 쉽웠고,또 옛날에는 짓궂은 마을 청년들의 '서리'하는 버릇을 막기 위하여 원두막을 짓고 지켰다.

여름철의 참외서리와 수박서리는 고향, 친구와 함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즐거운 추억거리다. 오후에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참외밭이 곁에 있는 개천가에서 멱을 감으면서 원두막의 동향을 살핀다. 배가 실쭉해지면 또래 아이들은 근처 참외밭을 살살 잠입해 들어간다. 두서너 명은 원두막에서 낮잠 자는 주인의 동향을 살피고 한두 명은 살금살금 기어서 밭 가장자리에 가서 얼른 한두 개를 따서 줄행랑을 친다. 그리고는 헉헉거리며 익지도 않은 새파란 참외를 이빨로 아삭아삭 거리며 '마파람에 개눈감추듯이' 먹어 치운다.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참외 꼭지까지 다먹어 치운다. 그래서 참외서리의 뒷맛은 쓴맛이 된다. 참외 꼭지는 왜 그렇게도 쓴지 지금껏 먹었던 그 맛있던 참외 맛은 금세 사라지고 모두들 퇘퇘하면서 우거지상이 된다.

참외서리는 번번히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구쟁이들이 참외밭 근처에서 멱을 감고 있으면 주인 할아버지는 끝까지 개천가에 서서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핀다. 그러면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아예 일찍 집으로 돌아간다.

밤은 개구쟁이들에게는 좋은 참외서리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더위와 모기를 피해 동구밖 버드나무 아래로 대여섯 명의 꾼(?)들이 마실 나온다. 저녁으로 먹은 보리밥은 금세 소화가 다되고 밤이 으슥해지면 마음은 참외밭으로 향한다. 우선 그 꾼들 가운데 뜀박질을 잘하는 돌격대가 옷을 홀랑 다벗고 알몸의 용사가 된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개천가의 진흙으로 온몸을 검게 위장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참외밭 근처까지 기어간다. 또다른 한 명은 원두막 근처에서 주인이 잠자는지 어떤지를 뻐꾸기 소리로 알려준다. 뻐꾹뻐꾹하고 울면 돌격대는 행동을 개시한다. 주인도 뻐꾸기 소리가 나면 아예 큰소리 "다른 참외 상하지 않게 조심해라"하고서는 그냥 내버려둔다.

이러한 참외서리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서리를 하되 주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 서리한 참외는 두고 두고 먹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먹어 치운다. 그것으로 배를 채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그저 요기나 할 정도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집에 계속해서 서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골고루 한다.

서리는 장난꾸러기 마을 악동들이 주로 떼를 지어서 농사지어 놓은 농산물을 훔쳐먹는 일종의 장난이다.여름철의 참외서리와 수박서리 뿐만 아니라 봄에는 밀 서리, 가을에는 콩서리와 사과서리, 겨울에는 닭서리까지 한다.

밀서리는 밀이 누릇누릇 익어 갈 무렵 마을의 꾼들이 떼를 지어 오후에 소먹이와 소꼴을 하러 간다. 소꼴을 다베어 놓고는 들판의 밀밭으로 가서 한아름의 밀대를 베어와 불을 붙이면 밀이삭이 뚝뚝 떨어지게 된다.이렇게  잘 구워진 밀을 손바닥에 놓고 후후 입김을 불어 가며 비비면 탄 껍데기는 날아가고 익은 밀알만 남는다. 가을의 콩서리도 밀서리와 비슷하다. 나무꾼들 아이들이 나무를 한 짐 지고 내려다가 모여서 쉬는 참에 콩을 꺾어 모닥불을 지피고 그 위에 콩가지를 얹어 놓고 이리저리 뒤적이면 콩꼬투리 안에서 콩이 적당히 익게 된다. 이렇게 익은 콩을 주위에 둘러앉아 까먹는다. 밀서리와 콩서리는 주로 오후에 하는데 반하여, 곶감서리나 닭서리는 밤에 행해진다.

긴긴 겨울 저녁에 어느 사랑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거나 혹은 놀음을 하다가 자정이 넘어 속이 출출해진다. 그 중 한두 사람이 허술한 집 닭장에 들어가 소리 없이 닭을 잡아다가 볶아 먹는다. 그런데 이때 닭주인도 함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인  자기집  닭인 줄도 모르고 같이  끼워 먹는다..

이처럼 서리는 도둑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은 범위 안에서 단지 약간의 허기를 채우는 장난인 것이다.

원두막과 참외서리는 오늘날의 삭막한 인정 속에 오아시스 같은 마음의 여유를 주는 풍속이었다. 원두막은 예로부터 참외밭을 지킨다는 구실 이외에도 동네 사람들의 좋은 피서지가 되었고 밤이면 젊은이들의 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 길손들에게는 땀을 식히고 가는 좋은 휴식 장소가 되었다.

傳統藝術에 표현된 원숭이의 象徵的 意味

十二支의 열두가지 띠는 12년을 週期로 매년 바뀐다. 매년 정초가 되면 누구나 올해는 무슨 띠의 해이며, 그 해의 守護動物이라 할 수 있는 띠동물이 지니고 있는 象徵的 意味가 무엇인가를 찾아서 새해의 運數를 미리 알 아 보려고 했고 , 또한 그 해에 새로 태어난 아이의 운명과 성격(이른바 팔자)을 띠동물의 외형이나 성질, 행태 등과 묶어서 이야기하려는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 예컨데, 양의 성격이 순박하고 부드러운 것처럼 양띠(未)도 온화하고 순하여 이 해에는 며느리가 딸을 낳아도 구박을 받지 않고, 잔나비띠는 원숭이처럼 재주가 많다느니 하는 식의 俗說이 전해오고 있다.

원숭이는 동물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재주있는 동물로 꼽히지만, 너무 사람을 많이 닮은 모습, 간사스러운 흉내 등으로 오히려 '재수없는 동물'로 기피한다. 띠를 말할때 '원숭이띠'라고 말하기 보다는 '잔나비띠'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통일신라시대 부터 등장하는 12支神像의 원숭이는 무덤의 護石이나 塔像, 浮稻, 佛具 등에서, 頭狀은 원숭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몸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무기를 손에 잡고 있는 형상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원숭이(申)는 시각으로는 오후 2시에서 5시, 방향으로는 서남서를 담당하는 時間神이며 方向神으로, 이 시간과 이 방향으로 들어오는 邪氣를 막는 역활을 하고 있다.

靑磁와 白磁에서도 원숭이의 생생한 모습이 보인다. 印章의 꼭지, 硯滴, 水滴, 緖締, 작은 항아리, 걸상 등에서 그릇의 모양이 원숭이의 형상을 띠고 있거나 장식문양으로 원숭이가 나온다.

靑磁나 靑銅으로 만든 원숭이꼭지도장(猿形印章)은 쭈그리고 앉거나, 긴 손으로 얼굴을 만지고, 혹은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를 하고 있다.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동물로 갖가지 만능의 재주꾼이기도 하지만, 부모 자식 간의 극진한 사랑이나 부부지간의 애정은 사람을 빰칠정도로 셈세한 동물이라고 한다. 원숭이의 이러한 母子 간의 지극한 유대의 정을 표현한 靑磁猿形母子像은 硯滴이나 緖締, 裝飾品 등에서 어미가 새끼를 고이 품 안에 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백자 항아리에서는 원숭이가 富貴多産을 의미하는 탐스런 포도알을 따먹거나 포도가지 사이로 다니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부귀다산의 의미를 지닌 포도알을 따먹은 원숭이는 바로 부귀다산의 상징이요 그 祈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는  그 주제를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十長生들과 등장하면서 천도를 들고 있는 長壽의 象徵인 원숭이, 불교설화나 서유기와 관련되어 스님을 보좌하는 원숭이, 숲 속에서 사는  자연상태의 원숭이 등이 그것이다.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거나 먹고 있는 원숭이는 그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천도복숭아는 열매를 한 번 맺는데 3000년이 걸리고, 그 열매가 익는데 다시 300년이 걸리는 나무로 장수의 상징이다. 이런 천도를 먹거나 손에 잡고 있는 원숭이도 바로 長壽의 象徵이며 祈願으로써 그려진 것이다.

口碑傳承에서는 꾀많은 , 재주있는, 흉내 잘내는 장난꾸러기로 자기의 잔재주와 잔꾀를 너무 믿어 제발등 찍는 이야기가 많다.  원숭이는 실제로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이지만, 十二支神像이나 靑磁 白磁 繪畵 등에 나타난 원숭이는 우리나라에 실존하는 어느 동물보다도 그 형태나 행태가 잘 묘사되어 있고 그것을 통하여 원숭이가 지닌 여러가지 象徵性 暗示性 등을 나타내려고 했다.

책거리 풍속

요즘처럼 국민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 없던 시절에는 일종의 사설 교육시설로 서당이 있었다. 서당에는 훈장과 생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명한 훈장님을 문중이나 마을에서 초대하여 서당을 세웠다. 훈장은 선생님이고 접장은 학생의 대표 통솔자를 말하며 생도는 일반학생이다. 서당에서는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명심보감 통감 등을 비롯하여 경서를 배우고,글을 짓고,글자를 쓰는 것 등을 배웠다.

선비들(요즘은 학생)은 대개 서당(국민학교)를 거쳐, 향교 또는 4학(중고등학)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하면서 공부를 했다.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한 권 다 배우고 나면 학부모들이 훈장님께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이것을 "책거리"라고 한다.책거리는 훈장님의 노고에 보답하고 학동의 공부를 더욱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이때는 반드시 송편을 장만했다. 송편은 속이 비어  뚫려져 있다. 학동들의 지혜구멍이 송편처럼  펑 뚫리라는 바램에서 준비하는 것이다.

요사이도 한학기가 끝나면 방학이 되기전에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수박이나 떡을 준비해서 선생님께 감사하는 책거리를 한다. 이러한 풍속은 바로 서당의 책거리에서 연유한 것이다.

우리 농사일에서도 책거리와 비숫한 끝맺음을 하는 호미씻이라는 풍속이 있다.호미씻이는 여름농사가 거의 끝나 밭이나 논을 매는 호미을 다쓴 후에 호미를 씻어 둔다는, 농사를 일단락 짓는다는 뜻에서 각가정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흥겹게 하루를 즐기는 행사이다.

우리생활에서 작심삼일이니 용두사미니 하여 끝을 흐지부지하게 끝내는 것을 경계한다. 책거리나 호미씻이는 둘다 끝맺음을 중시하며 그 마침을 감사하는 민속이다. 우리조상들은 '시작이 반이다'하여 시작을 중히 여겼지만 마무리도 철저하게 매듭을 지었다.

무병장수, 부귀영화을 축원하는 첫돌잔치

우리는 보통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날을 흔히 "귀빠진 날"이라고 한다. 생일 가운데도 태어나서 처음 맞는 첫돐과 60년 만인 환갑을 중하게 여겼다. 생일이라는 말은 손아랫사람에게 쓰여왔고, 손윗사람에게는 생신 선성, 나라임금에게는 탄일 탄신이라고 상하로 나누어 불렀다. 이러한 관행은 조선말기에 생긴 것이고 생일에 대한 존비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생일은 돐이나 환갑처럼 대규모로 잔치를 베풀지 않고 그저 가족끼리 초촐하게 평상시 보다 음식을 조금 더 준비한다. 음식도 미역국이나 고기국 정도 끓여 먹는게 고작이고 부유한 집에서는 떡을 만들어 먹을 정도이다. 요사이는 어린이 생일에도 친구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치르는데 이것은 우리고유의 민속이 아니다.

보통 아기의 생일을  첫돐,두돐, 세돐 등으로 말하는데,아이가 출생하여 처음 맞이하는 생일을 첫돐이라 한다. 원래 돌이란 말은 주(週).회(回) 등과 같은 뜻을 지닌 말로서 일년의 기간을 단위로 하여 반복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다. 옛날에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유아의 사망률이 매우 높고 질병이 많기 때문에 아기가 돌을 맟이한다고 하는 것은 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는 계기가 되므로 이를 축하하는 날이 첫돌이다. 그래서 첫돌날에는 행하는 여러가지 풍속은 아기가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고, 높은 벼슬과 많은 복이  평생 충만하도록 비는 행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돌날에 할머니나 어머니는 우선 삼신상을 차리고 아이의 장수복록(長壽福綠)을 축원하는 삼신을 빈다. 우리 속담에 아이의 성질이 괴팍하거나 말을 잘듣지 않으면 "삼신을 누가 빌었는지 대게 못빌었다"고 질책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첫이레, 두이레, 세이레, 백일, 첫돌날에 주로 삼신상를 차리고  아이의 장래를 축원한다. 이때 잘못 빌면 앞날이 밝지 않다고 해고 돌날 삼신비는 일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온갖 정성과 마음을 다하며 축원한다. 이 날 주인공 아기는 돌복으로 치장을 하고 돌주머니를 달아준다. 요즘 돌복으로 사내아이는 머리에 복건을 쓰고 한복에 오방장두루마기나 전복을 입히고, 계집아이는 굴레에 치마저고리나 당의를 입힌다. 그리고 허리에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길게 만들어 아기의 허리에 한 바퀴를 돌린다.

돌복을 입히고 돌상을 차린 다음 돌잡이를 한다. 무시무종(無時無終)과 길상(吉祥)의 무늬로  다리를 투각 장식한 돌상에 갖가지 돌음식을 준비한다. 돌상에 차려진 음식을 그냥 차려진 것이 아니라 모두 상징적 의미와 축원이 깃들여져 있다.

떡과 과일이 주가 되는데, 떡의 종류만 하더라도 12가지가 넘게 마련한다. 떡은 주로 백설기(흰무리), 붉은 팥고물을 묻힌 수수경단, 찹쌀떡, 송편, 무지개떡, 인절미, 계피떡 등이다. 이 가운데 백설기와 수수경단은  꼭 해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백설기는 아기의 신성함과 정결하기를 축원하는 뜻에서 뿐만 아니라 "백"이라는 숫자가 들어가기에 장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수수경단(수수팥단지)은 귀신이 싫어하는 붉은색으로,  이 떡을 해주면 귀신의 출입을 막고 퇴치하여 병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무병하게 잘 자라는 축원이 담겼다. 백설기와 수수경단을 아기가 열살이 될 때까지 생일마다 해주면 아기가 잘 넘어지지도 않고 좋다고 한다.

인절미와 찰떡은 찰기운이 있는 음식이므로 끈기있고 마음이 단단하라는 뜻에서 해주는 음식이다. 송편은 속이 빈 것과 속을 넣은 것의 두 종류를 만드는데 속을 넣어 만든 것은 아기의 속이 차라는 의미이며, 속이 빈 것은 의견이 넓으라는 기원으로, 깊고 깊은 마음과 넓은 아량을 베풀 수 있는 뜻깊은 마음씨를 가져라는 뜻이다.

무지개떡은 아기의 무궁무진한 꿈이  무지개처럼 오색찬란하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떡이다. 이렇듯 떡 하나하나에 까지 무병장수와 부귀영화의 기원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색깔의 과일을 안배하여 돌상을 차린다.

돌상은 떡과 과일이 주류를 이루고 이 밖에 돌잡이를 위한 쌀.붓.책.활.돈 등의 여러가지 물건을 진열한다. 남아의경우에는 쌀.활.책(千字文).붓.먹,종이.실.대추.미나리.돈 등을 떡과  함께 놓는다. 여아의 경우는 쌀.반절필(反切筆).먹.종이.실.대추.면류.돈.자.부젓가락.인두.바늘.실 등을 올려놓고 돌잡히기를 한다.

돌잡히기는 아이로 하여금 돌상에 차려진 물건을 마음대로 골라 잡게 하여 그 아이의 장래를 점히는 것으로 돌잔치의 가장 흥미있는 행사이다. 돌상 앞에 무명피륙 한 필을 접어서 깔아 놓거나 포대기를 접어서 깔고 그 위에 아이를 앉혀 놓고 아버지가 돌잡이가 되어 아이로 하여금 골상 주위를 돌면서 물건을 집게한는데, 제일 먼저 집는 것과 두번째로 집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그 집는 것으로 보아 그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미리 점쳐보는 면과 아이의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을 알아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아기가 집는 물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속신이 있다.

활.화살 : 무인이 된다

국수.실 : 수명이 길다

대추 : 자손이 번창한다.

문방구 : 문장으로 크게된다

쌀 :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다

자.바늘 : 재봉을 잘하거나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 된다

칼 : 음식 솜씨가 뛰어나게 된

떡 : 미련하다

이렇게 차린 돌상 앞에 돌맞이 어린이가 재롱을 부리고, 어른들은 이것을 지켜보면서 아이가 잡는 물건으로 장수를 빌고 문무(文武)의 활달과 부귀를 기원한다.

돌상에 차린 돌음식은 친척과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 좋다. 돌음식을 받으면 그 아기의 복록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의 인사와 선물을 답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돌음식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들음식을 담아온 그릇을 씻지 아니하고 그 그릇에다 적으나마 물품이나 돈을 답례로 보내준다. 답례의 물건은 실.의복.돈.반지.수저.밥그릇.완구 등이다. 이러한 담례품은 아기의 장례를 위한 부귀장수를 빌고 함께 경하하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리라고 본다.

이처럼 우리의 돌이나 생일잔치는 오늘의 어린이들처럼 친구들을 불러서 단순히 잘먹고 노는 것이 아니고 건강과 복을 기원하고 바래는 엄숙한 날이기도 하다.

첫돌날의 모든 음식과 풍속은  무병장수와 장래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내용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사람은 임신, 출생, 백일, 돌, 성인식, 결혼, 회갑, 장례, 제례 등등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때 그때 적절한 시기에  그 당사자를 위한 의례를 행한다. 이것을 우리들은 인생의례, 평생의례, 또는 통과의례라고 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평생의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로 대표된다.

첫돌 다음으로 큰 인생의례는 관례, 혼례, 회갑, 장례, 제례 등이 있다.관례(冠禮)는 옛날 어린이가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기 위하여 남자에게는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고, 여자는 쪽을 찌게하는 성년의식이다. 혼례(婚禮)는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서약을 하는 의식으로 관혼상제의 사례 가운데 가장 경사스럽게 여겨 혼례 당일 만은 일반 서민들도 궁중예복을 입을 수 있게 허용했다. 상례(喪禮)는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는 예법으로 예를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은 그 의례절차를 중시여꼈고 그만큼 복잡하고 까다롭게 했다. 제례(祭禮)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선조의 신주을 모시고 명절날이나 돌아가신 날, 혹은 시월에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여기서 볼때 한국의 관혼상제는 서양의 통과의례와 다른점이 있다. 서양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중시여겨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출생의례에서 죽을때까지만 의례를 행하는데 반해, 우리는 어른을 중요시 여겨, 조상을 중요시 여겨 돌아가신 후까지도 마치 살아계시는 것같이 모신다.  이것은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조상을 숭배해온 우리네의 좋은 풍속이다.

체를 통해서 본 부엌세간은 변화

민속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 가운데서 食生活用具 만큼 빨리 변화하는 것도 아마 드물 것이다. 가전제품의 발달과 새로운 素材의 발견으로 매일매일 부엌의 모습은 바뀌어 간다. 냉장고, 전자렌지, 전기밥솥 등등은 아궁이에 불을 짚어가며 음식을 장만했던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릇의 재료는 또한 얼마나 변했는가! 질그릇,사기그릇,유기그릇,木器에서 양은그릇(알루미늄)으로, 플라스틱으로 변하고 다시 스테인레스로, 요즘은 신소재라는 살아 숨쉰다는 바이오 세라믹그릇 까지 나오게 되었다.

막사기로 구웠던 그릇은 거칠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깨어지고, 유기그릇은 때가 잘 끼어 몇 달마다 한번씩 딱아 주어야 한다. 주부들은 제사나 새해를 맞이할 때는 몇 일씩 유기그릇을 딱아야 했다. 그러다가 잘깨어지지도 않고 가볍고 때가 잘 끼지 않은 양은이 부엌용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금에 약해서 쉽게 부식되는 단점은 가지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에 이제까지의 모든 결점을 보완한 녹슬지않고 깨어지지않는 스테인레스가 부엌을 장식했고, 가볍고 부식되지 않은 플라스틱이 그 다음을 이어 받았다. 다음은 거르는 용구였던 체를 통해서  그 옛날은 부엌세간은 한단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 속담에 "체로 물 긷는다" "체에 물 붓기다" 라는 말이 있다. 쳇불의 구멍이 아무리 작아도 물만큼은 다 걸러낸다.  체로 물을 아무리 길어 보아야 금새 물이 빠지고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 체에  물을  아무리 많이 부어 봐야 밑빠진 독보다 빨리 물이 빠진다. 이 속담은 어떤 일을 열심히 하여도 성과가 없고 일한 보람이 없을때 쓰는 말이다.

"체장수 오자 술익는다"라는 속담은 일이 순조롭게 척척 잘 이루어질 때 사용한다. 우리 전통 막걸리는 술이 익은 후에 술막지를 체로 걸러낸 후에야 먹을 수 있다. 술 담근 후에 체가 다헤어져 술을 거를 수가 없었는데  술 익자 마침  술을 거를 체 매는 장수가 왔으니 일의 앞뒤가 잘 맞은 것이다. 체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다헤어진 쳇불을 갈아 끼워 주거나 새로 체를 만들어 주는 체장수가 있었다. 그만큼 체의 사용이 많았다는 말이다.

아낙네가 방앗간에서 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하고, 무엇인가 맛있는 별식(別食)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을타작을 한 후 조, 참깨 등을 알곡과 싸라기 쭉정이 검불로 골라내거나, 시루떡, 송편 등 떡감을 마련하기 위하여 떡가루를 마련할 때, 혹은 손님이 오셔서 막걸리를 거를때 주로 사용되는 체의 쓰임새 때문에 체를 치는 그 모습에서 수확의 푸근함과 별미(別味)의 정감이 떠오르는 것 같다.

디딜방아간이나 물레방아간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부엌세간이 바로 체이다. 체는 방아나 절구 맷돌에서 빻아낸 밀이나 쌀 콩가루를 일정한 곱기로 쳐내거나, 막걸리나 간장을 거를 때, 참깨를 씻어 말릴때에 주로 사용한다.

체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쳇바퀴, 아들바퀴, 쳇불이 그것이다. 쳇바퀴는 소나무나 버드나무를 둥글게 휘어서 한쪽에서 실로 꿰매 만든다. 가루나 액체를 거르는 그물인 쳇불은 말총, 삼 명주 등의 포백(布帛)이나, 대나무 등나무 등을 사용한다. 아들바퀴는 쳇바퀴에 쳇불을 팽팽히 붙이고 고정하는 역활을 한다. 또다시 칡넝쿨로 쳇바퀴와 쳇불, 아들바퀴를 얽어 매어서  단단하게 고정한다. 체를 만드는 재료는 이처럼 일상생활 주위에서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것들이다.

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쳇불구멍의 크고 작음에 따라 얼레미, 도디미, 생주체, 고운체 등으로 구분된다. 철사 대나무 등나무 껍질 등으로 체불을 만든 바닥의 구멍이 성근 체은 떡고물이나 메밀가루 등을 내리며, 좁쌀이나 뉘를 고를때 쓴다. 생주체 고운체는 쳇불을 말총, 혹은 천으로 떡가루나 술, 간장을 거를때 쓰는 아주 미세한 것이다.

체질을 하는 방법은 두가지로 곡식의 알맹이나 가루를 칠때는 두 손으로 체바퀴 상하를 잡고 체를 좌우로 흔들어 사용하고, 또다른 한 방법은 술막지에서 막걸리를 거르거나 된장에서 간장을 거를 때처럼 쳇다리를 이용한다.쳇다리을 자배기나 그릇 위에 걸쳐놓고 그 위에 체를 놓고 체질을 한다.

알곡이나 가루내는 연장으로서 체는 여러가지 관련된 재미있는 풍속를 함께 가지고 있다.

정월 초하루 저녁에 야광귀를 쫒는 풍속이 있다. 속설에 야광이라는 이름의 귀신이 있다. 이것이 설날 밤에 인가에 내려와서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보다가 발에 맞으면 문득 신고 가 버린다. 그러면 신발 임자는 불길하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은 이것을 두려워하고 다 신발을 감추고 일찍 불을 끄고 잠들어 버린다. 그리고 체를 대청 마루 벽이나 또는 마당 가운데 걸어둔다.

그러면 야광귀신은 체 구멍이 많은 것을 보고 세어나가다가 마치지를 못하고 아이들의 신발을 훔칠 것을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어서 닭이 울면 도망치고 만다.

또 쳇밥 풍속은 정월 대보름날 성씨가 각기 다른 세 집의 밥을 체에 한 숟가락씩 얻어와, 절구통에 앉아서 개에게 한 숟가락 주고 자기도 한 숟가락 먹는 것이다.  이렇게 쳇밥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민속문화는 그 시대의 여건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하지만, 민속의 전체적인 틀은 큰 변함없이 지속된다. 쳇바퀴가 소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쳇불이 말총이나 천에서 나이론 줄로 변하고, 가정용 뿐만 아니라 기계화된 공업용 회전체나 진동체  등으로 체가 변화했다. 아궁이 부엌이 입식 주방으로 바뀌고, 디딜방아가 전기식 방앗간으로 변화했지만 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여전히 부엌 한 쪽에 매달려 주부들이 자주 애용하는 중요한 부엌세간이다.

축원과 애환을 신명의 춤으로 푸는 우리 풍속

역사문헌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그 옛날부터 한해의 농사를 시작할 때 나 추수를 마칠 무렵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요사이도 정초가 되면 마을사람들은 귀천을 떠나 한자리에 모여 춤판을 벌리면서 집집마다 농악을 치며 방문하여 지신을 눌러주고 잡귀를 몰아내고 마을의 무사와 그 해의 풍년을 바라며 신명나게 춤춘다.

우리나라의 전통무용은 크게 궁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큰 경사가 있을 때 추는 궁중무용과 탈춤,무당춤, 살풀이, 농악춤,나비춤, 허튼춤 등의 민속무용으로 분류할 수 있다.여기서는 민속무용 가운데 무당춤 탈춤 농악춤에 대해서 알아본다.

무당은 굿을 하면서 노래부르고 춤을 춘다. 무당은 춤을 통해 신의 뜻을 실제로 나타내며 무당 스스로가 신의 뜻을 창조하기로 한다.무당춤의 역활은 신을 불러들이고 신을 즐겁게 하고 신을 보내는 등 굿에서 그 기능은 다양하다.

탈춤은 탈을 쓰고 인간본래의 심성으로 돌아가 서민적인 삶의 모습을 서리낌없이 표현한다. 탈춤 장단에 맞추어 탈을 쓰고 재담과 춤을 추면서 타락한 중을 등장시켜 형식적인 도덕의 추악함을 폭로하고, 몰락한 양반을 등장시며 양반들의 비리를 마구 공격해 댄다.

우리 민족의 마음씨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농악에서의 춤은 단순히 즐기는 오락으로서가 아니라 들판에서 농사의 고됨과 피로을 잊고 즐겁게 일하도록 도와주는 노동의 춤이다. 농악판에 어울린 할아버지 아저씨들은 어깨춤을 등실거리며 하루의 힘든 일에서 벗어난다. 이때는 그저 팔만 벌리고 어깨만 들석거려고 그 몸짓이 바로 흥겨운 춤이 된다.

한여름날 무더위를 씻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동구나무 그늘이나 개천에 모여들면 의례껏 노래와 춤이 나온다. '얼씨구' '좋다' '좋지' '그렇구 말구' '허허 좋아' 등의 추임새를 읊으면서 흥겹게 논다. 이때 즉흥적으로 어깨춤 보릿대춤 몽둥이춤 등의 몸짓춤이 나온다.

우리의 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향락적인 춤이 아니라 일상에서이 바램과 매듭,애환을 발짓 손짓의 진솔한 모습으로 추워지는 그런 것이다.

웃음판, 흥판, 신명판인 탈판 속의 한국인의 얼굴

`탈`은 사람의 본디 얼굴을 덮어 가리면서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본디 얼굴로서는 나타낼 수 없는 현실적인 삶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민중적인 삶과 意識의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한국탈의 특징은 괴상 망측스럽게 생겼다고 한다.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렇게나 만든 것 같으면서도 韓民族의 여러 계층의 얼굴들을 개성 있고 재미있게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살아있는 韓國人의 얼굴인 탈은 그 뒤에 있는 人間의 얼굴을 가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탈 뒤의 人間이 지닌 心性의 原形을 象徵的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탈놀이에서 그 배역에 따라 다양하게 그 성격이 함축되면서 `喜怒哀樂`을 안으로 머금고 있어 탈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삶의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가면으로서 탈이 아니라, 민중적인 삶과 의식의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덧뵈기로서의 탈이다.즉 신명의 춤과 몸짓 속에 살아 숨쉬는 의식의 얼굴(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탈의 실제적인 기능은 본디 얼굴로서는 나타낼 수 없는 현실적인 삶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있다.

탈에 대한 우리말로는 광대.초란이.탈.탈박. 탈바가지 등으로 불러왔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탈이란 말이 쓰이며 漢字表記로는 面 面具 假面 代面 大面 假頭 假首 등이 있다. 假面을 우리말로 탈 또는 탈바가지라고 하고, 假面舞를 탈춤, 假面劇은 탈놀이, 假面劇舞臺는 탈판, 假面劇演戱者를 탈꾼이라고 부른다.

해서지방의 탈이나 중부지방 또는 영남지방의 탈 등이 모두 바가지와 종이 털가죽 등의 재료로 덧붙여 나가는 기법을 주로 활용한다. 즉 바가지에다가 코나 돌출부분을 노끈 종이 나무껍질 등을 덧붙여서  얼굴의 형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진흙에 짚을 섞어 문둥그린 흙으로 토담을 쌓은 것같이 탈에는 민중의 生活感情을 그대로 거칠고 털털하며 거침없으면서도 솔직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하회탈은 순전히 나무를 깍아내어서 얼굴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조각품이다.이러한 제작기법은 오히려 나무기둥을 깎아서 만든 장승의 기법과 상통하는 것이다.   한국의 탈놀이는 크게 서낭제祭탈놀이와 산대도감계통극으로 나누어 볼 수있다. 하회별신굿놀이, 강릉단오제의 관노탈놀이, 동해안별신굿의 탈놀음굿 등이 전자에 속한다.경 경기지역의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해서지방의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 춤,영남지방의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가산오광대 수영야류 동래야류,함북 북청의 사자놀음 등은 후자에 속한다. 또 광의의 탈 범주에 드는 꼭두각시놀이도 탈놀이의 일종이다.

탈춤은 상호 관련성이 느슨한 여러 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어있다. 특정장치가 없이 그 저 넓은 마당 곳곳에 횃불을 밝히고 마을사람들이 빙둘러 앉거나 서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탈놀이와 뒷풀이로 진행된다. 탈춤꾼은 말과 노래를 섞어서 관중과 악사에게 말을 걸며 무언극처럼 몸짓과 춤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탈판에는 웃음이 있고 흥이 있고 신명이 있고 풍자와 해학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상생활 속의 `한`과 `슬픔`을 탈판에서 `신명`과 `흥`으로 풀어 가는  `멋`을 가졌다. 생활 속에 `한`은 恨으로 怨恨으로 가지 않고, 한스런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고 누구도 허물하지 않으며 마음 속으로 삭이는 바로 그런 `한`이며 `신`은 한스런 삶을 잠시 잊고 생산하고 재창조하는 원동력이 깃들여 있는 신명 신바람 신풀이다. `흥`은 풍성한 탕진 속에 풍요로운 내일을 기약하고 흥겹게 흥청거려 보려는 즐거움이다. 풍자와 해학 풍류가 어우려진, 저항과 인고, 질타와 용서가 융합된,

불협화음이 리듬으로 되는 곳에 탈판의 `멋`이 자리한다. 이러한 신 흥 한 멋의 탈판에서 무질서 속에 질서를 발견하고 난장판 속에서 우리는 한동아리임을 느낀다.

한국의 탈은 그 전승담당자였던 민중들의 소박한 생활감정과 꿈을 아주 꾸임없이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무서워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무섭지 않고 무서워도 웃음을 자아내는 표정을 하고 있다.

탈 가운데 청자 백자에 비견되는 하회탈에서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보자. 탈이 제구실을 하려면 얼굴에 쓰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눈의 위치가 맞아야 하고 대사를 순조롭게 주고 받기 위해서는 입이 트여져 있어야 하며 탈을 쓰고도 호흡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콧구멍도 트여 있어야 한다. 하회탈은 크기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써도 쓰는 이의 얼굴에 눈과 코 입이 맞도록 되어 있어 한국인의 표준 얼굴이 하고 있는 셈이다.  눈매와 입매는 물론 눈두덩과 광대뼈, 볼, 이마와 콧대, 주름살 등을 모두 동원해서 그 높이와 깊이, 선의 방향 및 면의 양감 등을 독특하게 살려서 각 탈의 얼굴은 개성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띄게 된다. 특히 눈썹, 눈두덩, 눈 밑의 광대뼈를 두드러지게 하고 곡선을 살려서 만들었으며 실제로 턱을 고정시키지 않고 따로 놀게 하여 탈의 움직임에 따라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양반탈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을 쓰고 뒤로 젖히면 실로 연결된 턱이 벌어지게 되고 눈썹이나 눈매. 광대뼈의 갈매기 모양의 곡선이 부드럽게 살아나서 웃는 모습을 하게 되고 깊게 파낸 아래쪽 부분의 그늘도 빛을 받아 전체적인 표정이 밝아지게 된다. 반대로 탈을 앞으로  숙이면 턱이 닫혀지고 눈매나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겉으로 돌출된 부분에 인하여 탈의 표정이 화난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얼굴에 그늘이 많이 져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표정이 된다. 이처럼 탈의 움직임에 따라 웃는 표정, 화난 표정 또는 밝은 표정과 어두운 표정을 짓게 되어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의 일상적인 몸짓과 표정에 일치한다.

민속놀이판은 질펀한 흥겨움, 신명풀이가 그 본질이다. 그것은 난장판으로 절정을 이룬다. 건강한 놀이판은 놀이꾼과 구경꾼의 특별한 구분없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가운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생활공동체로서의 유대를 다지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놀이판에 스스로 주체가 되지못하고 들러리 노릇만 하고 시간과 돈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민중이 놀이의 주체자가 되어 스스로 놀이를 창조하고 향유하며 전승하는 노릇을 직접 담당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질 때 놀이문화의 건강성이 회복될 것이다.

얼씨구 !   절씨구 !  지화자 좋다!!

상부상조의 품앗이

'품앗이'는 알반적으로 '품'(일 노동)을 주고 받는 형식의 협동작업이라고 이해된다. '품'은 일,노동이란 뜻으로 하루품이라할 때 그 뜻은 하루의 일 또는 하루의 노동이란 말이다.

농사일이 한참 바쁠때나 일이 벅찰때면 의례껏 품앗이를 했다.옆집의 순돌이 엄마와 웅이 엄마가 우리집에 와서 품앗이를 하면 우리끼리 삼 일 해야 할 일을 하루만에 그 일을 마칠 수 있다. 그리고 차례로 우리집에서 순돌이네집과 웅이네집에 가서 하루씩 협동으로 일을 해주면 품앗이는 끝이난다.

겨울철 김장할때도 품앗이를 한다. 엄마 혼자서 김장을 다할려면 벅찬 일이다. 그래서 품앗이를 해서 웅이네와 순돌이네 엄마가 오셔서 힘을 합쳐 김장을 한다. 그 다음에는 순서대로 웅이네  순돌네집에서 서로 도와 가면서 김장을 담근다. 혼자서 하면 힘드는 일이라도 품앗이를 하면 쉽게 빨리 할 수 있는 것이다.

품앗이는 서로 가까운 친척이나 이읏끼리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업의 능률도 상당히 높으며, 일도 자신이 직접하기 때문에 섬세하고 충실하게 할 수 있다. 품앗이는 사람끼리만하는 것은 아니다. 소가 없는 집에서는 소가 있는 집에서 소를 하루 품앗이로 빌려쓰고 사람이 이틀정도 그 집에 가서 일해준다. 즉 사람과 사람의 품앗이는 1:1로 교환이 되고 사람과 소는 1:2로 교환된다.

이러한 품앗이는 일년내내 거의 전 생활에 거쳐서 이루어진다. 품앗이 는 모심기 피뽑기 벼타작과 같은 논농사의 일부 작업과 보리타작 밭매기 감자심기 고구마씨 틔우기 수수,깨, 고추의 파종같은 밭농사 작업에서 많이 이루어진다.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사이일 경우, 또는 밭이 서로 인접헤 있는 경우,부인들끼리 자주 품앗이를 한다. 이러한 농사일 뿐만아니라 품앗이는 이읏의 '큰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협동으로 도와 주었다.

옛날부터 우리조상들은  이읏집의 큰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었으며 동시에 '나의 일'로 여기고 서로 돕고 협동하며 살아왔다.

한국인의 전통적 색감(色感) -오방색의 민속의미론을 중심으로-

Ⅰ. 색의 상징기호

두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꼭 같이 보지 못한다. 똑같은 색을 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눈이 온전하고, 그 눈으로 본 사물의 이미지와 색이 눈동자에 재생산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지난날의 경험 등의 복잡한 연상의 제작용에 따라 색과 이미지를 두뇌가 달리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같은 색을 달리 인식하고 이미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빨강, 파랑, 노랑은 교통신호체계의 틀 안에서 정지, 진행 또는 주의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중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색깔은 붉은 색이다. 길조와 행운을 나타낸다는 이 색은 옛적부터 중국인이 선호해온 대표적인 색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모든 선전 광고에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색은 상징의 기능과 기호 구실을 한다. 그것은 논리의 틀을 가지고 문화의 커뮤니케이션(comunication)을 실현한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난 홍색 청색 황색 녹색 등 각 색상의 옷을 입은 생활풍속도, 백제에서 16품위의 관위를 색대로 표시한 제도, 신라에서도 품계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의 옷을 입게 했던 제도로 보아 염색 기술의 발달과 색문화(色文化)의 다양함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Ⅱ 오방색의 민속의미체계

우리 민족의 색채관념은 음향오행의 우주관과 방위관념에서 나왔다. 오방색(五方正色)은 좌청룡의 청색, 우백호인 백색, 남주작인 붉은색, 북현무인 검은색, 중간의 황색이다. 이 오방정색을 기본으로 사이색인 홍(紅) 벽(碧) 녹(綠)·주황(朱黃)·자색(紫色)을 기본으로 발달하였다.

우리 민속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이 오방색을 방위적(方位的) 색채로 이야기 하면 다음과 같다

청(靑)은 사신도의 청룡이며, 오행 중에는 목(木)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봄, 방위로는 동쪽이다. 파랑은 하늘의 빛, 바다의 빛, 그리고 물의 빛이 대치됨으로써 우리 나라 신화의 우주론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파랑은 동쪽임으로, 해돋이, 밝음, 맑음 등과 연관된 상징성을 갖춘다. 신생(新生)과 약동하는 힘을 파랑이 상징하는 것도 천지 개벽, 천지창조의 첫 순간의 빛을 상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광대 가면극 놀이에 나오는 청제장군은 오행설에서 봄을 맡은 신이다. 파랑은 소생, 기쁨, 인(仁)를 의미한다. 한국인이 태어날 때 엉덩이의 푸른 반점에서처럼 파랑은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초록, 남색, 곤색 등의 총칭으로 청색(파랑)이라는 말을 써 왔다. 우리말에 '푸르다'는 말은 green과 blue를 지칭되지만 그 언어 맥락 속에서 녹색과 청색 등으로 변별된다.

빨간색은 사신도의 주작이며, 오행 중에는 화(火)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계절로는 여름, 방위로는 남쪽이다. 붉은 색은 태양을 상징하고 잡귀를 쫓는 색깔로 인식되어 벽사의 의미로 널리 쓰인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문짝에 뿌러서 액운을 제거한다'든지, 붉은 모래(朱砂), 붉은 부적, 붉은 종이 등은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벽사로 사용하였다. 여자 아이들이 봉선화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도, 왕의 정복인 곤룡포를 붉은 비단으로 지은 것도 바로 이 붉은 색이 역시 벽사와 길상을 표상한다. 남쪽으로 온난한 곳이며 만물이 무성해서 양생기(陽生氣)가 왕성한 곳이다.

색채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여러 시대에 걸쳐 통용된다. 즉, 물로서의 파랑은 불로서의 빨강에 대비되고, 차가움으로서의 파랑은 뜨거움으로서의 빨강에 대비되어 왔다. 또한 빨강과 파랑은 벽사의 색으로 악귀를 쫓거나 예방하는 의식에 주로 사용했다. 동쪽의 색인 파랑과 만물이 무성하는 남방의 색인 빨강은 양색(陽色)으로서, 음기(陰氣)인 악귀를 쫓는 색으로 인식해 왔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색을 벽사의 색이라고 한다. 아이가 출생하면 문전에 솔잎의 푸른 가지와 붉은 고추를 꽂고, 금침의 잇색으로 남색과 홍색을 쓰며, 사주보는 청색과 홍색 비단으로 한다. 또 서낭당을 지나 갈 때에는 돌이 푸른나무 가지와 붉은 천을 꽂아 길하기를 바란다. 파랑과 빨강은 벽사의 색이기 때문이다.

황색은 오행 중에는 토(土)에 해당되고, 방위로는 중앙이고 서울을 상징한는 색깔이며, 풍요를 나타낸다. 중국에서 노랑은 부귀와 권위를 상징한다.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를 기념하는 색이 바로 황색이기 때문이다. 황색은 제왕을 상징하는 색이므로, 제왕의 복색과 황궁의 지붕 기와도 황금색이었다. 노랑은 꾫에의 조명, 직관, 사물들을 포용하는 힘을 상징한다.
흰색은 사신도의 백호에 해당되며, 오행 중에는 금(金)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가을, 방위로는 서쪽이다. 신화적으로 흰색은 출산과 서기(瑞氣)를 상징한다. 그래서 흰색은 상서로운 징조를 표상하고 있다. 또한 신화에서 하늘과 관계 있는 흰 기운과 흰 새, 흰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받은 왕이라고 믿는 , 우리 민족의 신화적 의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상 산에 대한 색채관도 흰색이 지배적이다. 백산(白山)은 우리 나라 각지에 있고, 성산(聖山)으로 숭배된다. 그 큰 것을 태백산(太白山), 그 작은 것을 소백산(小白山), 또는 백산이라고 하였다. 단군이 개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한 것은, 희고 깨끗하고 밝다는 태양숭배사상에서 연원한다. 흰색은 어떤 색으로도 물을 들일 수 있으나, 어떤 색으로도 물들이지 않는 자존(自尊)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마음을 나타낸다. 실로 우리 민족은 이 흰색에서 지고(至高)의 미를 발견하였다. 흰색은 고적(孤寂)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흰색은 단순한 고적의 이미지가 아니라 고결(高潔)한 아름다움이 내면에 서려 있는 고적이다. 존대(尊大)의 고적이며, 절개의 고적이다. 선비는 고결하고 청렴 결백한 흰 학에 비유되고 지체높은 선비가 입던 도포도 학창의(鶴璮衣)라 하였다.

검은색은 사신도의 현무에 해당되며 오행 중에는 물(水)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겨울, 방위로는 북쪽이다. 검은 빛은 밤, 공포, 불행, 파멸,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검은 상장이나 조기는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으면 지하에 묻혀, 빛이 없는 영원한 암흑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검정은 어둠(밤)의 표시이며, 그것은 빛과 대조된다. 그런가 하면 법관의 법복이 검은 색인 것은 정직과 명예의 표상이다. 검은색의 신격은 곰, 거북, 거미 등이 있다.

오방색의 민속의미체계

색채

방위

계절

오행

동물

오방신(五方神)

오정(五情)

오상(五常)

오미(五味)

신명(神名)

청색

동쪽

수(水)

청룡

청제장군

기쁨

인(仁)

신맛

아명(阿明)

백색

서쪽

가을

금(金)

백호

백제장군

분노

의(義)

매운맛

거승(巨乘)

빨강색

남쪽

여름

화(火)

주작

적제장군

즐거움

예(禮)

쓴맛

축융(祝融)

검정색

북쪽

겨울

목(木)

현무

흑제장군

슬픔

지(智)

짠맛

우강(愚康)

황색

중앙

 

토(土)

 

황제장군

욕심

신(信)

단맛

 

Ⅲ. 자연의 색, 천연염료

앞에서 이야기한 오방색의 의미와 상징성을 토대로 전통적 색감(色感)이 형성되었다. 이 색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천연 염료를 빼놓을 수 없다. 천연 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은 자연을 입는 것이다. 전통 염색에 사용되는 식물 염료는 공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병의 치료약도 된다. 또한 전통 생활 색은 색상 자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염색 천의 특징적인 재질감을 십분 살려준다. 그리고 자연 염료는 섬유를 더욱 질기게 하며 좀벌레나 악취 등 환경 재해에 대한 보호막 구실까지도 해준다. 전통 염색 소재가 대부분 한양 의약제인 점을 상기할 때 피부 건강이나 인체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쪽물을 들인 삼베 속곳은 피부병 치료의 처방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이다. 황벽 황련은 방충성이 있고, 쪽은 살균성이 있으면, 잇꽃 치자는 위장병 치료 및 피부병 치료제가 된다. 또, 염료 식물의 색은 주성분이 혼합물인 경우가 많아 깊은 맛의 색이 우러나오며 자연스럽게 보인다..

천연 염료로 물들인 빛깔은 결코 튀는 법이 없이 다른 색과 잘 어울린다. 화학 염료로 물들인 옷은 빛]깔이 좀 곱다 싶으면 서로 잘난 체하고 다른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튄다. 그러나 자연의 빛깔은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어 결코 촐랑거리지 않고, 또 자신의 빛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서로 잘 어울린다.

화학 염료는 햇볕을 받아 퇴색하기 시작하면 마치 퇴기(退妓)처럼 추해지게 마련인데 자연 염료의 빛깔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단아하고 깊어져 정결한 어머니 같은 느낌을 준다. 화학 염료로 치장된 도시오 옷은 복잡하고 현란스러워 눈을 따갑게 하지만 자연 염료의 빛깔은 부드럽고 유순하고 간결하여 아무리 바라보아도 눈이 피로하지 않다. 마치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보리밭이나, 너무 찬란하여 일순 현란하게 보이는 석양이나 가을 단풍처럼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기분을 상쾌하게 할 뿐 결코 싫은 느낌이나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바로 천연 염료로 염색한 옷을 해 입는다는 건 단순히 옷을 입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와 입는 것이다.

쪽빛만 하더라도 그렇다. 높고 깊은 가을 하늘의 빛깔인 듯,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넘치는 법도 없는 깊고 깊은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빛깔 같은 쪽빛은 영원한 청춘의 빛깔이요, 쪽물이 지나간 옷감에 올올이 생기가 감돈다.

<그림 > 여아(女兒)돌복 - 여자 아이의 돌복은 분홍 풍차바지에 노란색 또는 무지기 속치마를 입고 다홍치마에, 연두 혹은 노랑 색동 저고리를 입는다. 그 위에 당의를 입기도 한다. 머리에는 굴레나 조바위를 씌우고 발에는 오목누비 버선에 비단신을 신긴다. 당의 고름에도 길상도안을 수 놓은 주머니에 은으로 만든 장식 노리개를 매단다. 모두가 부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다.

<그림 > 오낭(五囊) - 오낭에 넣은 것은 지방마다 약간씩 다르나 목화씨(9개), 밤(3개), 은행(3개) 대추(3개), 팥을 넣어 자손번창의 의미를 부여한다. 숫자 3을 천 지 인, 5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방위를 의미한다.

: 천진기(국립중앙박물관, 민속학)         발췌 : http://www.kculture.co.kr

출처 : 세라의 도전.  |  글쓴이 : 세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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