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조각

모딜리아니 Amadeo modigliani

金 敬 峯 2012. 4. 10. 23:06


모딜리아니 Ama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 (Modigliani, 2004)











Andy Garcia




Elsa Zylberstein







































붓 하나 없이 계절마다

신비의 수채화를 그려내는 자연의 손길

고요하게 그러나 순수하게
그 빛깔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그 향기만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나무와 풀, 꽃은 오늘 어떤 기도를 할까.
살아가는 동안 바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무는 흔들리는 잎새들에게 일러 주겠지요.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할 때는
꽃이 필 때가 아니라 질 때라는 것을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빛깔보다는 그 향기 때문일 거라고
깊은 숲 속에서 흐르는
한 모금의 샘물을 마시는 기쁨을 맛보려면
뿌리까지 길어오는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고...

끝없는 욕망의 늪으로
불어오는 한줄기 봄바람의 여운이
가슴까지 스치며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바람 속에서도 꿈을 키워온 나무처럼
날마다 쌓아가는 삶의 탑에
차곡차곡 인내의 공을 들여야겠다고


나무와 풀, 꽃처럼
나는 오늘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햇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 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필경 이 작품도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게 아닌지...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 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라 . . .벨...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 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 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 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위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젊은 농부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 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 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로제 뒤티율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딜리아니는 곧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3차원적 입체 효과를 내는 명암법(chiaroscuro)을 제한하거나 거의 쓰지 않고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통하여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알렉상드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이미 약해져 있던 건강은 가난과 과로, 술과 약물 남용 때문에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4~16년의 2년 동안 영국 시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와 함께 살면서 복잡한 연애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술상 폴 기욤이 그를 도와주었고, 특히 폴란드 시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몇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사주거나 남에게 팔도록 도와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전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확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윤곽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통하여 인물을 조각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는 파리 미술계와 문단의 유명인사인 친구들을 주로 그렸지만 모델이나 하인, 또는 이웃에 사는 소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렸다. 1917년 그는 커다란 여성 누드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와 둥그스름하고 관능적인 형태의 이 누드화들은 그의 걸작에 속한다. 그해 12월 베르트 베유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경찰은 이 누드화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그림을 치우게 했다. 그의 마지막 연애사건은 같은 해인 1917년에 시작되었다. 이번 상대는 젊은 화가인 잔 에뷔테른

이었는데, 그는 잔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로 가서 살았다. 그들 사이에 딸 잔이 태어난 것은 1918년 11월이었다. 이무렵 그의 그림도 활짝 꽃피었다. 그의 윤곽선은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색채는 더욱 섬세해졌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의 평온한 생활과 날씨도 쇠약해진 화가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온 뒤 1920년 1월에 앓아누웠고, 10일 뒤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다. 임신중이던 잔 에뷔테른도 이튿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리의 전위 예술계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딜리아니는 살롱 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7년 베르트 베유의 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그의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죽은 뒤인 1922년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시인 앙드레 살몽이 쓴 논문을 통하여, 모딜리아니는 마침내 명성을 얻었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에 이른다. 드로잉의 수는 확정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 앙리 로랑스, 파블로 피카소, 샤임 수틴,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자크 립시츠 등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자주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 예를 들면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잔 에뷔테른 등은 여러 번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화상은 죽기 직전인 1919년에 그린 단 1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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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Amadeo Modigliani, 1884-1920)의 "모자를 쓴 여인의 초상"(Portrait of Woman in Hat)
1917, Oil on Canvas, 55 x 38cm, Private Collection
후에 "Jeanne Hebuterne in Hat"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림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이 여인은 19세의 미술학도로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와 동거하여 딸아이를 낳고 두째를
가졌을때 모딜리아니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하자 절망한 나머지 바로 다음날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한다.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모델로 25점의 작품을 남겼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평생 가난과 술과 아편, 그리고 병(결핵)에 시달리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쓰러진 불우한 화가였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콕토가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시인으로 데뷔한 해)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1909년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에 힘입어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기도 하고, 세잔느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수틴·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는다.
이 무렵부터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918년에는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Berthe Weill)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연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아편 등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니스로 간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던 중, 이듬해 1월 2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몽파르나스 시대의 친구인 시인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은 《모딜리아니의 정열적 생애》에서, 모딜리아니를 가리켜 “한 사람의 외톨이”, 또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나이”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젊은 날의 모딜리아니가 잘 생긴 얼굴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음주와 기행의 숱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전설 속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가장 치열한 예술과의 투쟁을 벌인 고독한 내면적 존재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똑같은 유태인이며 몽마르트 시대 이래의 예술적 동지였던 막스 자콥 또한 말년의 모딜리아니에게서는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렇지만 모딜리아니는 인간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에 대해 뜨겁고 깊은 애정을 한없이 기울인 드문 화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줄곧 초상화를 그렸고,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하루에 1백 장도 넘게 데생을 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재능이 데생과 조각과 유화의 세 부문에 걸쳐 빼어난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화가로서의 천재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초상화 부문에서이다.
<서 있는 나부> <팔을 들어올리고 누워 있는 나부> <앉아 있는 나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나부> 등 일련의 나부 그림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남불 니스에서 요양할 때 여러 점의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지만, 그의 회화 작업 과정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물화는 거의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과 혼과 손으로 재구성한 초상화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놓기도 하고,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쉼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간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장 콕토)

1906년 파리에 왔을 때,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예술 동지였던 시인과 화가들, 키슬링·막스 자콥·수틴·앙드레 살몽·호안 그리즈·피카소·블라맹크·블레즈 상드라르 …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러한 초상화들 가운데 <장 콕토의 초상>(1917)이 있다. 이 초상화 속에서의 시인은 프록코트를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가슴에 하얀 행커치프를 슬쩍 꼽고 있는 약간 뽐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확실히 콕토라는 시인에게는 이러한 멋부리기의 아니꼬운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에서 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시인의 나비 넥타이와 행커치프가 아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의 손이다.
왠지 연약하게 느껴지지만, 모든 신경과 감각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길다란 손’의 모습. 이른바 보들레르가 데생에 대해 정의하면서 ‘위대한 의지’ 와 ‘섬세성’(<1845년의 살롱>)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막스 자콥이 데생을 가리켜 하나의 ‘형태의 의지’ 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의지’와 ‘섬세성’이, 모딜리아니가 묘사하고 있는 콕토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손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에 관하여 <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에세이를 썼다.
거기에서 콕토는 조셉 바라 거리에 있는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모딜리아니가 “유채로 나의 초상을 그려 주었던 시기에 우리들은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됐다.”(<몽파르나스의 모딜리아니>)고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화가를 위해서 3시간이 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화가는 시인의 특징적 인상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려 나갔던 것이다.
콕토는 모딜리아니의 데생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모딜리아니의 데생은 최고의 엘레강스이다.
그는 우리들 모두의 귀족이다. 마치 유령의 선(線)처럼 보이는 핏기 없는 그의 선은 결코 서투름에 빠진 적이 없다.
그의 선은 샴 고양이의 부드러움으로 서투름에서 벗어난다.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 놓기도 하고, 불균형을 강조하기도 하고, 눈을 도려 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늘여 놓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눈과 혼과 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라 로통드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쉼 없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초상이 있는 것이기에)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감지하고, 사랑하고, 또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인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병과 빈곤과 알콜중독으로 신음하면서도 몽파르나스에서 군림했던 정신적 귀족, 마지막 보헤미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의 에피소드들은 로맨틱한 전설을 만들어 내고, 애수에 젖게 하는 소설 같은 감동적 이야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허황한 전설을 꾸며 낸 호사스런 자들을 혐오하고 경멸했을 것이다. 콕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객을 찾아다니며 즉석에서 비슷비슷한 초상화를 그려서 파는 그런 화가가 아니고 “객석에 앉아서 손금을 보는 존엄한 집시”로서 주문에 의한 초상화 따위는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눈과 혼과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생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게 한다.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맸던 방랑기사들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 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의 색깔 중에서 유난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이 ‘파란 색의 신비’이다.
<파란 눈의 소녀> <파란 옷의 소녀> <파란 에이프런의 소녀> <파란 상의의 소년> 등,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왠지 청색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특히 <파란 상의의 소년>(1918)에 보이는 연약한 섬세성은 일종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 전에 그린 <자화상>(1919)의 눈과 입가에 떠도는 상냥함과도 상통한다.

모딜리아니는 1919년 4월 남프랑스 칸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한 친구인 음악가 마리오 바르보리를 그린 데생에서 넘쳐 흐르는 신생(新生)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죽음을 예감한 인간의 환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 자유와 무한의 색깔인 ‘파란색의 신비’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모딜리아니와 콕토는 다같이 끝없는 무한의 세계, 파란 색의 신비를 찾아 헤매다가 사라진 몽파르나스의 현대적 방랑기사들이라 할 수 있다


1884년 모딜리아니는 유태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으며,
소학교 시절 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불행히도 그는 어려서부터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가 많았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했던 모딜리아니는
미케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시작했다.
17살이 되던 해에는 폐병이 재발하여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로마와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예술적인 잠재력을 유발했다.


미술사에서 모딜리아니를 얘기할 때면
여러 가지 평들이 거론되곤 한다.
심지어는 미술계에 등장한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 되기도 했다.
고독과 우수에 가득 찬 파리 생활의 표정은 ‘오직 모딜리아니에 의해서만이 표현될수 있다' 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20세기의 빼어난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화가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는 사람이다.


그는 초상화나 나부화,
그리고 모두 인물이나 인체를 그렸다.하물며 조각품도 모두사람을 소재로 하였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아름다운 사랑얘기와 함께 방랑자적인 예술가 기질로 유명하며
파리를 풍미했던 강렬한 삶과 사랑의 화가로 회자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인 잔느 에뷔테른느가 이어서 자살했다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에뷔테른느는 임신 5개월인 채로 (8개월이라고도 함)
그가 죽은 다음날 5층 건물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모딜리아니만의 이 독특한 캐릭터들은
모딜리아니가 원래 조각가를 꿈꿔 왔고
아프리카 원시조각들의 형태들이 회화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다.

또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형태를 왜곡시켰지만 가면 같고 평면적인 양식을 통해서도
절묘하게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모딜리아니의 탁월한 예술성을 입증해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세부적 묘사가 없는 배경을 통해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이처럼 독특하게 변형된 형태의 인물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흔한 초상화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그만큼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기 때문인데,
그는 작품 속에서 모델들의 삶과 인생의 깊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였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Seated Nude, Ca. 1917
by Amadeo Modigliani







Nu Sur Coussin Bleu
by Amadeo Modigliani






Reclining Nude with Arms Open
by Amadeo Modigliani







Reclining Nude with Arms Above the Head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1913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에콜 드 파리의 전설과 모딜리아니

1884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남쪽의 작은 항구 도시 리보르노에서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유태인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유태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후일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결혼에는 이 문제가 극심한 반대의 사유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질투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하기까지 했던 모딜리아니는 그후 미켈리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중, 17살 되던 해에 다시 폐결핵이 생겨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카프리, 나폴리,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교양을 쌓았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의 나이로 처음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에게 프랑스 파리는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그만큼 당대의 파리는 세계 예술계의 일번지로서 모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일찌기 화가. 세잔이 세상의 모든 것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견해로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를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딜리아니의 모든 회화에 나타나는 단순하고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은 사실상 이때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8년 처음으로 <유태여인> 등 유화 여섯 점과 데생 한 점을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다. 다음해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와 조각 제작을 시도하여, 원시 흑인 조각과 브랑쿠시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허약한 체력과 병약한 폐는 조각에 전념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과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그 자신이 '에콜 드 파리(파리파)'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겨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프랑스는 다른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낙원만은 아니었다. 파리에는 그처럼 그곳만의 예술적 숨결을 느끼기 위해 몰려든 각국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일컫는 말이 '에콜 드 파리'다. 그곳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딜리아니는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초조함,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몸은 그를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자신의 삶과 건강을 소진하게 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신의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 고독으로 꽃피운 사람들

@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에콜 드 파리는 "파리파"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약한 주로, 외국인 화가들의 총칭이다. 제1차 대전 전후, 파리에는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샤갈, 네덜란드의 반 동겐, 독일의 에른스트, 스페인의 피카소,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파리파는 특별히 공통되는 주의나 양식이 없이 제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20세기의 어떤 이즘이나 유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모딜리아니, 샤갈, 수틴, 파스킨, 키슬링, 등이 모두 유태계 화가였기 때문에 애수를 띤 우울한 정서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 샤갈은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유태인의 속담과 신비적인 전설 등을 주로 그렸다.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파리파는 해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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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 그것도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인간이 등장한 것은 회화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화가가 대상인 사람을 특별히 신격화하거나 신성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 시점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것은 서양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많은 누드화를 남기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누드화 역시 초상화의 범주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초상화에 대한 양식을 논하고 있으므로, 이 자리에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회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우하고 부드러운 선과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때묻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색채, 세잔의 영향, 자신이 직접 겪으며 마주 대해 온 모델과의 관계 속에 꽃 피운 작품 양식이다.

말로는 이렇게 단순화시켜 그의 그림이 무슨 영향을 받아 어떻게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화풍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이외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자, 모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어쩐지 그의 초상화들은(누드화를 포함해서) 한결같이 난초 혹은 베고니아 화분을 닮은 걸까?(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빠져 있거나 아니면 한쪽 만 그려져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느끼게 된다.(누구는 이걸 술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이 거세된 채 표현된다.(아니 생활이 거세되었다기 보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생활이란 걸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거나 아니면 일부러 누락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고 해서 생의 무게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라는데 그 통증의 원인이 있지 않을 성 싶은데…. 그의 그림 속에 생의 공허와 외로움이 묻어나는 까닭 같은 것 말이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모델을 살만큼 돈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는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다. 예전에 장선우 감독의 영화 중에 <나쁜 영화>란 영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도 말많았던 그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이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욕지기가 나서 애먹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장선우 감독을 떠받드는 이라면 평론가들까지 싸잡아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미학적인 완성도 자체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나름의 원인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보고난 뒤의 내 느낌은 그의 영화(실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제작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는) 어디에도 렌즈를 통해 바라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욕지기를 느낀 것은 어떤 개구장이 악동의 탐욕스럽고 호기심어린 시선이 배우들과 길가의 행려, 노숙자들을 줄곧 몰아세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대상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천국에서도 당신의 사랑이 되어드릴께요.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으나 예술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畵商)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불과 36세의 나이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였다.(잔느 에뷔테른느는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와 결혼한다. 3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지 9개월만에 남편 모딜리아니가 죽자 그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반려자가 된다.)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관계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와 같았으며 그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진한 것이었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19세의 미술학도였던 잔느는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잔느는 생활의 반려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이듬해 잔느는 딸을 낳는다. 모디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의 저자이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디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음은 그의 죽음의 과정을 소설투로 옮겨 본 것이다.)

1920년 1월 겨울 어느날, 모디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을 완성시켰다.(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그이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자화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그는 얼음장 같이 찬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만삭의 잔느가 웅크리고 앉아 죽어가는 모딜리아니를 조용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모딜리아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잔느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

친구들이 달려와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께요" 라고 전설처럼 말했다는 잔느 에뷔테른느 역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신의 양친의 집 6층 창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의 아기는 단 한번도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못한 채 부모의 뒤를 따랐다.

모딜리아니의 형 임마누엘은 그를 "왕자처럼 묻어달라"고 전보를 보내왔다.



Self-Portrait

Oil on canvas, 33½ x 23½, (브라질의 Mrs. Yolanda Matarazzo 수집)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좀처럼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죽기 얼마전,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1919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 위의 화가는 가장 잘생긴 미남화가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왜소하다. 빠레트위의 색깔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가라앉은 색깔이다. 선척적으로 약했던 그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살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한채 굴종하며 겨우 술과 마약으로 미약한 반항이나마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면서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가던 비운의 모습이 그의 그림 속에 베어있다.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몽상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목과 코를 유난히 길고 굴곡지게 그리면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반사해냈다. 사실적이지 않음에도 모델의 분위기가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동자도 없는 얼굴이 어떻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살아움직임은 화가의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보는 관객의 생명이 그 안에서 숨쉬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텅빈 눈동자를 보며 관객은 그 안에 자신의 눈동자를 박아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생명력을 넣어주는지도 모른다. 언뜻보면 만화같은 그림인데도 얼굴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고 만다.같은 피부색깔을 여러톤으로 주면서 입체화시켰다. 그녀의 꼭 다문 작은 입술은 폐쇠적이면서 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불쑥 튀어나온 볼로 생겨난 그림자는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마음에 담게된 불만과 불평을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뒷배경으로 색칠해진 검은빛 톤도 그녀의 어둡고 외로운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Reclining Nude, 1917

모딜리아니는 여자의 모습을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이중 누드화는 초상화와는 매우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길게 그리고 선을 굴곡시키는 등 추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초상화와는 달리 누드화는 현실주의에 가깝다. 또한 작품 분위기가 매우 강렬하다. 일상생화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술과 마약에 도취되었던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작품에서 반영시키려는 권태로움과 슬픔은 유독 누드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누드화는 유독 친근하고 강렬유한 느낌을 선사한다. 초상화중 자신의 아내였던 잔느의 그림에서만이 볼 수 있었던 그 친근함과 강렬함이 누드화에는 생생하게 살아나있다.
티없이 아름다운 나체로 부끄러움없이 소파에 적나라하게 누워있는 이 여자는 육체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감정까지도 모두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른하게 누워있지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남겨져 있다.

Jeanne Hebuterne

모딜리아니는 세잔느나 달리처럼 자신의 아내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른 초상화에서처럼 기다린 코와 목이 특징적이다. 눈동자가 없음에도 관객은 그 눈동자를 읽을 수 있다. 검은 머리를 한 잔느가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슬픈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뒷배경이 슬픔을 노래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느의 그림은 몇작품을 빼놓고는 모두가 처량하다. 어쩌면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슬픈 운명을 보았을지 모른다.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슬픈 운명을 가져야했던 잔느. 모딜리아니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말았어야하지 않았을까. 나는 잔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그녀의 아픔이 내 것처럼 슬프게 느껴진다.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do Femminile di Front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ca. 1918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 de profile
by Amadeo Modigliani







Nu de femme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Studio di Nudo I
by Amadeo Modigliani







Caryatid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1910-11
by Amadeo Modigliani







Nu de fac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by Amadeo Modigliani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화가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Caryatid
by Amadeo Modigliani

7월 12일 이탈리아 오스카나지방의 리오르노에서 출생 : 1884년
리오르노 중학교 입학. 늑막염을 앓다 : 1895년
풍경화가 미케리에게 데생과 유화를 배움. 장질환으로 폐렴에 걸림 : 1898년
폐결핵에 걸림 (-.-;)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등지를 여행 : 1901년
여행중 접하게된 카마이노의 조각에서 감명을 받음
피렌체 미술학교에 입학, 조각가의 길을 걷는다 : 1902년
베네치아 미술학교 입학. 살롱 도똔느 창립 : 1903년
<Tete de Jeune Femme> : 1906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감명을 받다 : 1907년
<Le Joueur de Violoncelle> : 1909년
영국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스팅그스와 만남. 3년간 동거 : 1914년
<Portrait de Diego Rivera>
<Portrait de Pablo Picasso> : 1915년
<Jacques Lipchitz et Son Epouse> : 1916년
<Portrait de Max Jacob>
잔느 에뷔테른과만남. 첫개인전에서 나체화 5점이 풍기문란죄로 철거 : 1917년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자화상> 그림 : 1919년
1월 24일 자선병원에서 사망 : 1920년


이탈리아 고전미술과 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품위와 강한 자긍심을 지녔던

모디. 그는 20세기 초, 다양한 미술사조가 혼재하던 유럽의 미술계에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모색했다. 모디는 조각가 브랑쿠지, 키슬링, 수틴, 피카소, 르느와르와

교제하였으며, 멕시코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그의 연인 러시아 화가 말레브나 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에콜드 파리의 상징적 존재로 이탈리아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20세기 초 파리에서 고독한

영혼을 예술로 꽃 피웠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

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

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특히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개성을 빈틈없이 잡

아내면서도,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보편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아프리카의 원시조각에 영향을

받은 듯한 긴 목의 여인은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모디는 15세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그가 좋아했던 조각을 하지 못하고 주위 아는 사람을 모델로 주로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다.

혹자는 모디가 미술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라고 평하기도 하는데 특히 그의 지독히 외로워 보이는

큰 눈은 보기만해도 많은 여자들의 모성본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주류적 흐름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고독한 행로는 점점 더 그를 외롭게 만들어 술과 마약

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성격 또한 점점 괴팍해져만 갔다. 그런 그에게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주겠

다는 그만의 여자, 잔느 에뷔테른이 나타났고 그녀를 만난 1917년 이후 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

동안 ‘생명의 예술’을 창조한다.

유대계 명문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 다닌 뒤,
1906년 이후는 파리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고,
다음해, 조각자 카마이노의 작품에 감명을 받았고 1909년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제작을 시도하여, 니그로조각과 브랑수시식의 사실을 떠난
간결한 조형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장티푸스 폐렴등 안아파본 병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해서
1913년부턴 회화에만 전념을 하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늘 조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어쨋건 모딜리아니는 초기회화에서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7년 있었던 세잔의 회고전에서 본 세잔의
표현주의는 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주로 초상화만을
그렸고 보통 주위의 이웃이나 지인, 창녀들을 모델로 그렸다
1910년 <<첼로를 켜는 사람>>등 6점의 유화를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으며,
1913년 퐁마르나스로 옮겨 키슬링,수틴등과 사귀었다. 에콜 드 파리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중에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이 특색이다
1917년, 베르트 배유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풍경화도
몇 점 그렸으나, 파리로 온 후부터는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여,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있으며,
보티첼리나 베네치아파의 작풍과도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적
개성을 보여준다. 시인적 자질이 풍부한 다감한 미남자로 일화가 많으며,
만년에 잔느 에뷔테른과의 사이에 딸을 두었다.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사이프러스 나무와 집

"역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평을 듣는이탈리아

출신의 미남 화가-

열정과 사랑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비운의 화가,

Amadeo modigliani (1884 7 – 1920 1)

1884. 7. 12 이탈리아 리보르노~1920. 1. 24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말없는 공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딜리아니는 소매상을 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 1898년에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은 뒤 통상적인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2년 피렌체에 잠시 머문 뒤 베네치아로 가서 1906년 겨울까지 미술공부를 계속하다가 파리로 갔다. 그는 일찍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특히 시에나 유파의 그림)을 존경했고, 평생 동안 이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의 그림에 압도당했으며,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초기에 교제한 주요인물들은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의 시인과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1907년에 만난 폴 알렉상드르였다. 알렉상드르는 전위 미술가들의 친구로서, 모딜리아니에게 관심을 갖고 작품을 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앵데팡당 미술전에 5, 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그는 또한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의 충고에 따라 아프리카 조각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조각가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열심히 소묘를 했다. 또한 그는 회화적으로 모델링되어 있고 빛의 작용에 민감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을 가짜 인상주의

라 하여 싫어했다. 그는 드로잉에서 윤곽선으로 덩어리를 제한하거나 둘러싸려고 했다. 1912년 그는 가을 살롱 전에 돌로 만든 8점의 두상을 출품했는데, 그 길쭉하고 단순화한 형태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모딜리아니


천재화가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운명하자 잔느는 이틀 뒤 8개월된 아이를 임신한 채 아파트에서 투신해

자살하고 만다. 우리에게는 모디의 수 많은 여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만 회자되어오던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건 불과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그녀의 기묘한 눈빛과 신비한 매력은 모디의

대표적인 초상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목이 긴 여인. 그녀가 바로 모디

초상화의 대표적인 주인공, 잔느 에뷔테른이다.

잔느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화가를 꿈꾸며 미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옷과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 할 만큼 예술적인 재능이 충만한 소녀였다. 18세의 나이에 이미 32세 모디의 예술적 재능을 인지하고 존경했던 그녀는 14세 연상의 모디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적 동료와 연인이 되었다.

그녀에게 모디는 예술적 스승을 넘어서 삶 자체였고 그가 더 좋은 작품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강인한 희생정신과 성숙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잔느를 단지 모디의 수 많은 여인 중 한 사람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그치기에는 그녀의 그림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갖고 있던 그녀는 오빠의 권유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장소 몽파르나스로 옮겨와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초기에는 거친 붓 터치와 강한 색상을 사용해 주로 풍경화나 정물화 작업하는 야수파 적인 작업을 하다

모디를 만나면서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이 유사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인물화 위주의 작업으로 전환

한다. 2000년 10월 베니스에서 열렸던 몽파르나스 화가들의 그룹전시 <Modigliani and his circle>

에 처음으로 그녀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몇 점의 정물화 및 풍경화를 제외하고 대부분 생생한

성적묘사가 두드러진 셀프 누드화였다.


이는 작품 제작 당시의 예술계에서 금기시되었던 과감한 성적묘사로 부르주아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었

다. 혹자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예술계의 정형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과감하

표현한 그녀의 작품에 여성주의적 도해법을 적용시킨다. 당시 남성의 시각을 통해 표현된 여성누드

전형적인 표현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여성 스스로 자신의 누드를 거침없이 표현하였다는 데 당

혹함을 느꼈을 것이다. 모디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으로서만 알려져 있던 그녀는 사실은 넘치는

예술적 에너지와, 자신이 선택에 대해서 후회 없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던 것이

다. 모디를 통해 사랑에의 욕망을 채우고, 예술적 영감과 지적 자극을 얻고자 했던 그녀에게 모디의 죽

음은 결국 자신의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며 이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을 것이다.
희생적이고 수동적이며 순종적이라는 나약함 때문에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와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던 짧은 기간의 강렬한 기억과, 또 다른 자아로서의 모디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과, 영원한 그의 모델이고자 했던 욕망은 그녀의 자살을 더욱 아름답고 애잔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모디가 신체적 결함과 정신적 불안정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그녀의 강인함과 인내력,

희생정신은 지금의 모디를 존재하게 만든 몇 점의 여인초상화를 그리는데 기여한다. 공허한 눈빛에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욕망과 열정은 모딜리아니라는 천재화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Jeanne Hebuterne

* Jeanne Hebuterne

Amadeo modigliani 가 그린 '잔느'의 초상화들

Jeanne Hebuterne (1917-8)

1917년 7월 어느 날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7)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
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

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
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20세기 초엽 인상주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는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새로운 시각이 고정된 형태나 관념을 탈피해 다양한 형태(양식)로 시도되는 시기였다.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반영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파리의 몽마르뜨나 몽파르나스지역에 모여 활동하던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파리파) 사이에서도 로맨티스트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던 쟌느는 `얼굴이 길어 슬픈 여인'
이라는 그만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목이 길쭉한 인물 스타일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나 모딜리아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의 우끼요에서 영향을 받고,
세잔느와 입체주의가 가미된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림]Amedeo Modigliani ◈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1918)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그림은 2004년 소더비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 너의 영혼을 알게될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어..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의 인물작품에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매우 특이한데
오히려 푸른색만으로 표현한 눈의 표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영원으로의 응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Nazareth ◈ Love Hurts


        모딜리아니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재발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 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딜리아니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딜리아니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Nude with Hat (1907-8)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완성한 Nude with Hat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 ◈ Blonde Nude (1917)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삶 속에서 명멸해 갔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룻밤의 고독과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 소모품처럼 써버린
      많은 요정들이 그의 예술혼과 끈끈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대개의 그 여성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과장된 풍만함으로 여성성의 일부만을 강조해 표현되어 있다.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짓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림]Amedeo Modigliani ◈ Madame Pompador (1915)




      이그림은 실제 퐁파두르 부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베아트리체를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베아트리체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
      하며 타일렀으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Seated Nude (1917)





      Seated Nude는 잔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의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단아하고 깊은 우수에 찬 눈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조차 의지를 읽기보다는 세상을 관조하며
      마주앉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깊은 눈으로 인해

      * 그들의 이야기

      천재화가 모딜리아니와 그의 작품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와 그의 연인들,
      특히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잔느 에뷔테른과의 관계를 둘러싼 수 많은 에피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이로인해 픽션으로 밝혀진 일화들 조차도 수 년간 여러 이야기들로 미화

      된채 회자되면서 이제는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진 채 영화속 연인처럼 살다간 비운의 주인공

      으로 포장되어 다양한 텍스트들속에서 수 많은 인용구들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욕망은 그들의 이야기를 보다 더 애절하게 만들어 그들의 사랑을 이 시대 마지막 비극

      로맨스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지속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거짓 일화들

      속에도 실제로 그들의 삶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느껴질 만한 운명적인 일화들이 있다.

      15살의 나이에 이미 화가의 꿈을 지녔던 어린 잔느는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때론

      그들의 모델이 되어주며 미술학교를 다녔다. 수업후에 잔느는 카페 로통드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어느

      깔끔한 코듀로이와 붉은 스카프를 두른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잔느의 기억속에 그는 이미 ‘잔느 타입’의 어떤 사람이었던

      것이다. 1917년 어느 조각가에 의해 둘이 본격적으로 소개를 받기 전까지 잔느에게 있어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공원에서나, 카페에서나, 여러 번 마주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마치 우리가 항상 알고지낸것만 같아..우린 정말 닮았어…”

      1917년 봄, 조각가 Chana Orloff는 어느날 화가들의 모임에서 모딜리아니에게 잔느를 소개한다.

      잔느를 처음 본 순간 모딜리아니는 어떤 전율같은 것을 느꼈고, 그녀의 유난히 조숙한 모습과 반항기,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눈에 매료되었다고 한 지인에게 전했다.

      1916년 몽파르나스에서의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렬한 후원가였던 즈보로프스키는 그랑쇼미엘 8가에

      있는 빌딩 꼭대기에 모디와 잔느의 작업실을 내어준다. 1917년에서 2년간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작업

      에서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이때도 그의 여성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여인들을 모델로 삼아 작업실로 끌어들였으며, 여전히 친구들과 술자리를 즐겨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여성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잔느는 크게 흥분하거나 화를내지 않았다. 그에게 타모델들과 맺

      관계는 예술적 영감으로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해했고, 그것을 통해 그의 그림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기를 보다 더 바랬기 때문이었다.

      어릴때부터 폐결핵을 앓던 그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로 둘은 니스해변가로 요양

      가게된다.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시기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

      화들이 가장 많이 탄생한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것도 니스에서였으며,

      목이 긴 여인으로 유명한 몇 점의 초상화들을 제작해 잔느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곳

      도 니스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도 잠시, 아이가 태어나고 생활고에 쫓기던 모딜리아니는 또 다시 방탕

      한 삶에 빠졌고, 성격도 점점 괴팍해져갔다. 결국 2년이 채 못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했고, 이때 이

      미 그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었다. 돌이킬수 없는 건강 때문에 불안함과 분노 사이를 오갔던 그

      의 정신상태는 잔느에게도 불안함을 안겨준다.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고 재정적인 지원도 전무한 상태

      여서 별달리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다시피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취중에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경찰서에서 그를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겨우 몇 명의 도움으로 그가 입원해 있을 때 인근 여관에서 숙박하던 잔느는 베개밑에 면도칼을
      두고 잠들었다고 한다. 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 그녀 역시 조금씩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스스로 자살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병약했던 상태였다.
      병원에 실려간 모딜리아니는 입원 3일 후 사망한다. 사인은 결핵형 늑막염이었다.


      그리고 근 이틀이 지난 1920년 1월 26일 새벽, 잔느는 가족과 함께 머물던 아파트 5층에서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때 그녀는 8개월된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잔느의 가족들은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관계를 부정하고 원망하면서 둘의 시신이 함께
      묻히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수 많은 지인들의 요청으로 10년 뒤 결국 모딜리아니가 묻힌 페르라셰

      묘지에 잔느의 시신을 뉘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지독한 사랑과 욕망, 그림에 대한 열정은 수 많은 지인들에게 회자되고, 그들의 추억이 되어,
      여전히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화가와 여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져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