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Amadeo modigliani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로제 뒤티율 - 모딜리아니는 곧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3차원적 입체 효과를 내는 명암법(chiaroscuro)을 제한하거나 거의 쓰지 않고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통하여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알렉상드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이미 약해져 있던 건강은 가난과 과로, 술과 약물 남용 때문에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4~16년의 2년 동안 영국 시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와 함께 살면서 복잡한 연애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술상 폴 기욤이 그를 도와주었고, 특히 폴란드 시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몇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사주거나 남에게 팔도록 도와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전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확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윤곽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통하여 인물을 조각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는 파리 미술계와 문단의 유명인사인 친구들을 주로 그렸지만 모델이나 하인, 또는 이웃에 사는 소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렸다. 1917년 그는 커다란 여성 누드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와 둥그스름하고 관능적인 형태의 이 누드화들은 그의 걸작에 속한다. 그해 12월 베르트 베유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경찰은 이 누드화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그림을 치우게 했다. 그의 마지막 연애사건은 같은 해인 1917년에 시작되었다. 이번 상대는 젊은 화가인 잔 에뷔테른
이었는데, 그는 잔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로 가서 살았다. 그들 사이에 딸 잔이 태어난 것은 1918년 11월이었다. 이무렵 그의 그림도 활짝 꽃피었다. 그의 윤곽선은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색채는 더욱 섬세해졌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의 평온한 생활과 날씨도 쇠약해진 화가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온 뒤 1920년 1월에 앓아누웠고, 10일 뒤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다. 임신중이던 잔 에뷔테른도 이튿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리의 전위 예술계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딜리아니는 살롱 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7년 베르트 베유의 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그의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죽은 뒤인 1922년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시인 앙드레 살몽이 쓴 논문을 통하여, 모딜리아니는 마침내 명성을 얻었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에 이른다. 드로잉의 수는 확정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 앙리 로랑스, 파블로 피카소, 샤임 수틴,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자크 립시츠 등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자주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 예를 들면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잔 에뷔테른 등은 여러 번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화상은 죽기 직전인 1919년에 그린 단 1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에콜 드 파리의 전설과 모딜리아니 1884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남쪽의 작은 항구 도시 리보르노에서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유태인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유태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후일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결혼에는 이 문제가 극심한 반대의 사유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질투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하기까지 했던 모딜리아니는 그후 미켈리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중, 17살 되던 해에 다시 폐결핵이 생겨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카프리, 나폴리,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교양을 쌓았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의 나이로 처음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에게 프랑스 파리는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그만큼 당대의 파리는 세계 예술계의 일번지로서 모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일찌기 화가. 세잔이 세상의 모든 것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견해로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를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딜리아니의 모든 회화에 나타나는 단순하고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은 사실상 이때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8년 처음으로 <유태여인> 등 유화 여섯 점과 데생 한 점을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다. 다음해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와 조각 제작을 시도하여, 원시 흑인 조각과 브랑쿠시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허약한 체력과 병약한 폐는 조각에 전념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과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그 자신이 '에콜 드 파리(파리파)'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겨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프랑스는 다른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낙원만은 아니었다. 파리에는 그처럼 그곳만의 예술적 숨결을 느끼기 위해 몰려든 각국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일컫는 말이 '에콜 드 파리'다. 그곳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딜리아니는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초조함,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몸은 그를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자신의 삶과 건강을 소진하게 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신의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 고독으로 꽃피운 사람들
@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에콜 드 파리는 "파리파"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약한 주로, 외국인 화가들의 총칭이다. 제1차 대전 전후, 파리에는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샤갈, 네덜란드의 반 동겐, 독일의 에른스트, 스페인의 피카소,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파리파는 특별히 공통되는 주의나 양식이 없이 제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20세기의 어떤 이즘이나 유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모딜리아니, 샤갈, 수틴, 파스킨, 키슬링, 등이 모두 유태계 화가였기 때문에 애수를 띤 우울한 정서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 샤갈은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유태인의 속담과 신비적인 전설 등을 주로 그렸다.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파리파는 해체 되었다. -------------------------------------------------------------------------------------------------------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 그것도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인간이 등장한 것은 회화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화가가 대상인 사람을 특별히 신격화하거나 신성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 시점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것은 서양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많은 누드화를 남기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누드화 역시 초상화의 범주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초상화에 대한 양식을 논하고 있으므로, 이 자리에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회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우하고 부드러운 선과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때묻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색채, 세잔의 영향, 자신이 직접 겪으며 마주 대해 온 모델과의 관계 속에 꽃 피운 작품 양식이다. 말로는 이렇게 단순화시켜 그의 그림이 무슨 영향을 받아 어떻게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화풍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이외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자, 모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어쩐지 그의 초상화들은(누드화를 포함해서) 한결같이 난초 혹은 베고니아 화분을 닮은 걸까?(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빠져 있거나 아니면 한쪽 만 그려져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느끼게 된다.(누구는 이걸 술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이 거세된 채 표현된다.(아니 생활이 거세되었다기 보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생활이란 걸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거나 아니면 일부러 누락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고 해서 생의 무게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라는데 그 통증의 원인이 있지 않을 성 싶은데…. 그의 그림 속에 생의 공허와 외로움이 묻어나는 까닭 같은 것 말이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모델을 살만큼 돈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는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다. 예전에 장선우 감독의 영화 중에 <나쁜 영화>란 영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도 말많았던 그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이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욕지기가 나서 애먹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장선우 감독을 떠받드는 이라면 평론가들까지 싸잡아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미학적인 완성도 자체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나름의 원인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보고난 뒤의 내 느낌은 그의 영화(실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제작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는) 어디에도 렌즈를 통해 바라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욕지기를 느낀 것은 어떤 개구장이 악동의 탐욕스럽고 호기심어린 시선이 배우들과 길가의 행려, 노숙자들을 줄곧 몰아세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대상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천국에서도 당신의 사랑이 되어드릴께요.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으나 예술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畵商)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불과 36세의 나이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였다.(잔느 에뷔테른느는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와 결혼한다. 3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지 9개월만에 남편 모딜리아니가 죽자 그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반려자가 된다.)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관계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와 같았으며 그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진한 것이었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19세의 미술학도였던 잔느는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잔느는 생활의 반려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이듬해 잔느는 딸을 낳는다. 모디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의 저자이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디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음은 그의 죽음의 과정을 소설투로 옮겨 본 것이다.) 1920년 1월 겨울 어느날, 모디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을 완성시켰다.(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그이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자화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그는 얼음장 같이 찬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만삭의 잔느가 웅크리고 앉아 죽어가는 모딜리아니를 조용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모딜리아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잔느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 친구들이 달려와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께요" 라고 전설처럼 말했다는 잔느 에뷔테른느 역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신의 양친의 집 6층 창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의 아기는 단 한번도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못한 채 부모의 뒤를 따랐다. 모딜리아니의 형 임마누엘은 그를 "왕자처럼 묻어달라"고 전보를 보내왔다. Self-Portrait Oil on canvas, 33½ x 23½, (브라질의 Mrs. Yolanda Matarazzo 수집)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좀처럼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죽기 얼마전,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1919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 위의 화가는 가장 잘생긴 미남화가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왜소하다. 빠레트위의 색깔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가라앉은 색깔이다. 선척적으로 약했던 그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살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한채 굴종하며 겨우 술과 마약으로 미약한 반항이나마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면서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가던 비운의 모습이 그의 그림 속에 베어있다.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몽상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목과 코를 유난히 길고 굴곡지게 그리면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반사해냈다. 사실적이지 않음에도 모델의 분위기가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동자도 없는 얼굴이 어떻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살아움직임은 화가의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보는 관객의 생명이 그 안에서 숨쉬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텅빈 눈동자를 보며 관객은 그 안에 자신의 눈동자를 박아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생명력을 넣어주는지도 모른다. 언뜻보면 만화같은 그림인데도 얼굴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고 만다.같은 피부색깔을 여러톤으로 주면서 입체화시켰다. 그녀의 꼭 다문 작은 입술은 폐쇠적이면서 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불쑥 튀어나온 볼로 생겨난 그림자는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마음에 담게된 불만과 불평을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뒷배경으로 색칠해진 검은빛 톤도 그녀의 어둡고 외로운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모딜리아니는 여자의 모습을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이중 누드화는 초상화와는 매우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길게 그리고 선을 굴곡시키는 등 추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초상화와는 달리 누드화는 현실주의에 가깝다. 또한 작품 분위기가 매우 강렬하다. 일상생화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술과 마약에 도취되었던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작품에서 반영시키려는 권태로움과 슬픔은 유독 누드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누드화는 유독 친근하고 강렬유한 느낌을 선사한다. 초상화중 자신의 아내였던 잔느의 그림에서만이 볼 수 있었던 그 친근함과 강렬함이 누드화에는 생생하게 살아나있다.
Jeanne Hebuterne
모딜리아니는 세잔느나 달리처럼 자신의 아내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른 초상화에서처럼 기다린 코와 목이 특징적이다. 눈동자가 없음에도 관객은 그 눈동자를 읽을 수 있다. 검은 머리를 한 잔느가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슬픈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뒷배경이 슬픔을 노래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느의 그림은 몇작품을 빼놓고는 모두가 처량하다. 어쩌면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슬픈 운명을 보았을지 모른다.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슬픈 운명을 가져야했던 잔느. 모딜리아니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말았어야하지 않았을까. 나는 잔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그녀의 아픔이 내 것처럼 슬프게 느껴진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화가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이탈리아 고전미술과 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품위와 강한 자긍심을 지녔던 모디. 그는 20세기 초, 다양한 미술사조가 혼재하던 유럽의 미술계에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모색했다. 모디는 조각가 브랑쿠지, 키슬링, 수틴, 피카소, 르느와르와 교제하였으며, 멕시코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그의 연인 러시아 화가 말레브나 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에콜드 파리의 상징적 존재로 이탈리아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20세기 초 파리에서 고독한 영혼을 예술로 꽃 피웠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 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 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특히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개성을 빈틈없이 잡 아내면서도,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보편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아프리카의 원시조각에 영향을 받은 듯한 긴 목의 여인은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모디는 15세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그가 좋아했던 조각을 하지 못하고 주위 아는 사람을 모델로 주로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다. 혹자는 모디가 미술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라고 평하기도 하는데 특히 그의 지독히 외로워 보이는 큰 눈은 보기만해도 많은 여자들의 모성본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성격 또한 점점 괴팍해져만 갔다. 그런 그에게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주겠 다는 그만의 여자, 잔느 에뷔테른이 나타났고 그녀를 만난 1917년 이후 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 동안 ‘생명의 예술’을 창조한다.
"역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평을 듣는이탈리아
출신의 미남 화가- 열정과 사랑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비운의 화가,
Amadeo modigliani (1884년 7월 – 1920년 1월)
1884. 7. 12 이탈리아 리보르노~1920. 1. 24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말없는 공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딜리아니는 소매상을 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 1898년에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은 뒤 통상적인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2년 피렌체에 잠시 머문 뒤 베네치아로 가서 1906년 겨울까지 미술공부를 계속하다가 파리로 갔다. 그는 일찍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특히 시에나 유파의 그림)을 존경했고, 평생 동안 이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의 그림에 압도당했으며,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초기에 교제한 주요인물들은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의 시인과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1907년에 만난 폴 알렉상드르였다. 알렉상드르는 전위 미술가들의 친구로서, 모딜리아니에게 관심을 갖고 작품을 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앵데팡당 미술전에 5, 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그는 또한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의 충고에 따라 아프리카 조각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조각가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열심히 소묘를 했다. 또한 그는 회화적으로 모델링되어 있고 빛의 작용에 민감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을 가짜 인상주의
라 하여 싫어했다. 그는 드로잉에서 윤곽선으로 덩어리를 제한하거나 둘러싸려고 했다. 1912년 그는 가을 살롱 전에 돌로 만든 8점의 두상을 출품했는데, 그 길쭉하고 단순화한 형태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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