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침묵의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가운데서-
한 스승에게 귀의하고 안 후에도 다른 스승을 존경할수 있습니까? "스승은 오직 하나이다.스승은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연약함이 있는 한 강한 힘의 도움이 필요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스승이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깨달은 다음에는 그렇게 말할수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스승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런데저는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그 도움을느끼지 못합니다. "복종하라.그러면 발견할것이다."
저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스승은 그대안에 있다."
어떤사람이 스승으로서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그의 주변에 정화의 기운이 감돌고,그대가 존경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그는 스승으로서 자격있는 사람이다."
만약 스승이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각자 자신의 진화 정도에 따라 자기 길을 갈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수 있고 어떻게 키워나가야 됩니까?
"그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그대의 참자아가 아닌 것들을 그대라고 생각하는 오해만 버리면 된다. 그러면 순수한 깨달음만이 남으며,그것이 바로 그대의 참자아 이다.
어떻게 해야 습을 버리고 자유를 얻겠습니까?
"자유는 우리의 본성이다.우리가 곧 자유이다. 우리가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구속으로 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단지 구속되어 있다는 착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유에 대한 생각이나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사라지고 자유로움 자체가 된다.그러나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는 동안에는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벽종사 카페에서 옮김
나는 누구입니까? / 라마나 마하리쉬
카페 : 자운 다원(글쓴이:자운)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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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마하리쉬] 나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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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책이다. '자아 탐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진아(眞我)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며 내용이다. 행복이 진아의 본질이요, 무욕은 '진아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고, 지혜는 '진아를 벗어나지 않음'이다. 해탈이란,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진아는 신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있어서 모든 길은 진아로 통한다. 중요한 것은 진아 밖에 없다. 체계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육체, 그 육체를 조종하는 마음, 영적인 정신, 관찰자로서의 나, 주변 사람에게 반향(反響)된 모습으로서의 나, 상대적 역할로 규정지어 지는 나, 무의식으로서의 나, 상상 속의 나 등 '나'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속성이나 모습으로 설명된다. 그 각각의 나는 서로 떼어낼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는 종합적인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긴 하지만, 한 측면만을 분리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이질적인 구성 요소들의 비총체적인 개념적 합이기도 하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하는 진아(眞我)라는 것은 개아(個我, 개체적 자아)와 대비되는, '이 우주 삼라만상에 내재하는 유일한 실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정한 근원'이다.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범신론적 신의 개념과도 흡사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요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는 우리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상은 그의 고유 사상이라기보다는 인도 철학의 한 특징이다. 육체는 허상이고 정신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그 정신적인 부분에서 비본질적인 그림자들을 제거하고 남는 부분이 진아이다. 이 초월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힘을 써야 하며, 그것만이 의미있는 것이고, 그래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보며 '자아 탐구'를 해야 하고, 진아가 아닌 부분을 발견하고 제거해나감으로써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진아는 유일한 실체이며 실재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진리이다. 나의 육체, 생활, 그릇된 인식 등이 진아를 가리고 있으며, 우리가 이를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진아는 본래부터 존재한다. 깨달음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진아는 시작도 없고 따라서 끝도 없다. 시간과 공간도 무의미하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새롭게 얻을 수는 없다.'(p.91) 진아는 이미 깨달아 있다. '자아 탐구'는 명상과는 다르다. 명상은 대상이 있는 것이고, 자아 탐구는 주관만 있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다. 행위나 노력이 아니고, '존재의 과정'이며 '무위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생각을 억압하여 무아의 상태에 도달하는 요가와도 구분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다른 질문을 떠올리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등으로 계속해서 본질속으로 근원속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아에 도달하면, 에고가 제거되고 순수한 본질, 유일한 실재만 남는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호흡 조절이나 자세 등도 초기 수행에 도움을 줄 수는 있겠으나,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고 있다. 철저히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쉽고 단순하다.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쉽고 단순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진리라는 것은 하나로 설명될 수는 없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가까우며(진아처럼), 끼워다 맞추어서 하나의 설이나 론으로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포함하는 것이 진리이므로 그대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상계, 몸 등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다소 걸린다. 인도 철학의 특징적인 면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눈에 띈다. 나는 나의 몸을 부정할 수 없다. 분리될 수 없는 요소가 있기도 하고, 신과 같은 존재인 나(=진아)도 중요하지만 고통을 느끼는 하찮은 몸뚱아리도 내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나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를 상상하기 어렵고 몸의 구속을 받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하는 '개아'의 개념에 가까운 비본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수행 방법은, 인도 철학에서 말하는 진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라마나 마하리쉬가 이야기하는 '진아'에 이르는 것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여러가지 그림자들로 가리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1. 자아탐구 - 이론 라마나 마하리쉬는 육체와 마음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는 개체적 자아가 실재한다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 영적으로 진화된 몇몇 제자들은 쉽게 그와 같이 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뿌리 깊이 베어 있는 습관을 일순간에 버리기가 어려웠다. 라마나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감지하고, 깨달음에 쉽게 이를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스스로 자아탐구라고 부르는 방법을 권하였다. 이 방법은 그의 실천적인 가르침의 주춧돌을 이루는 것이며, 이하 세장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우선 방법 자체를 설명하기 전에 마음의 본질에 대한 라마나의 견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마음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에 자아탐구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라마나에 따르면 육체와 마음의 모든 의식적 행위의 이면에는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은연중의 가정이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등의 생각 속에는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나>가 가정되어 있다. 라마나는 이를 아함 브리티Aham Vriti<나라는 생각>라고 하였다. 그는 개체성에 대한 관념을 바로 이 <나라는 생각>이 여러가지 형태로 드러난 것일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개체성을 마음과 같은 것으로 보고 마음을 <나라는 생각>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 의하면 개체성의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마음과 <나라는 생각>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깨달은 다음에는 생각하는 자도 행위자도 없으며 개체성에 대한 인식도 없다고 강조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는 또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강조하였으며 <나라는 생각>은 실체가 없는 그릇된 가정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나라는 생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나라는 생각>이 그 생각의 주인처럼 나타나서 <내가 생각한다> <내가 믿는다> <내가 원한다> <내가 행위하고 있다>라는 식이 되지만 사실은 동일시할 대상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생각>은 없다. <나라는 생각>이 마치 실제적인 것처럼 계속 나타나는 이유는 끊임없이 동일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동일시의 밑바닥에는 육체의 소유자 또는 육체와 동일체로서의 <나>가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모든 그릇된 동일시의 근본적인 뿌리이며 이 동일시를 해소하는 것이 자아탐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나라는 생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지성, 기억 등의 정신적 속성도 역시 마음이다. 또한 개체적 영혼이라는 것도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의 본성, 즉 마음을 일으키는 본체를 알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치에 따라 순서를 매겨볼 때 <나라는 생각>이 가장 중요하며 개체성(개인)에 대한 생각도 다른 모든 생각의 뿌리 내지는 줄기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은 <어떤 개인>의 생각으로서 일어나며 에고와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라는 생각>에 집중하려고 하면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서 저를 방해합니다. 그것들이 누구의 생각인지 살펴보라.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 생각들은 <나라는 생각>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나라는 생각>에 몰두하면 사라져 버린다. 자아탐구를 하는 것도 역시 에고인데, 어떻게 자아탐구를 통하여 에고의 비실제성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현상적인 에고의 존재는 초월된다. 마음의 속성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진아를 직접 깨닫기 위해서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야만 합니까? <나라는 생각>은 마음의 다른 속성들과는 달라서 마음의 속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상호간에 본질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마음의 다른 속성들과는 달리 <나라는 생각>은 마음의 모든 속성들과 본질적으로, 그리고 똑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속성들은 <나라는 생각>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라는 생각>은 다른 속성들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나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다른 속성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는 것은 단순히 에고의 여러 형태 중 한가지 형태만의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 그 자체를 찾는 것이다. 진아는 결코 에고에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생각>의 형태를 가진 에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능적인 면에서 본다는 에고는 유일한 한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에고는 순수한 의식인 진아와 스스로의 지각능력이 없는 수동적인 육체 사이에서 매듭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그대가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대는 에고의 본질적인 의식의 측면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진아의 순수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진아는 마음을 초월해 있다고 하면서 깨달음은 마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컨데 <마음이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마음만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죽은 마음>을 통해서 아트만(진아)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죽은 마음>이란 생각이 없는 마음이요, 내부로 향해진 마음이다. 그때 마음은 마음의 근원을 보며 그 근원(진아)이 된다. 이는 주관이 객관을 지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음의 본성은 바로 각성, 또는 의식이다. 에고가 마음을 지배할 때는 마음이 생각하고 헤아리고 느끼는 작용을 하지만 에고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우주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포함하며, 순수하게 각성상태만을 유지할 뿐이다. 어떻게 에고를 없앨 수 있습니까? 우선 에고를 찾아보라. 그리고 나서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를 물어보라. 그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에고이다. 그런 질문은 에고를 키우는 길이지 결코 에고를 없애는 길이 아니다. 그러나 에고를 찾아보면 그대는 에고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이 에고를 없애는 길이다.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마치 불에서 불꽃이 일어나듯 절대적인 진아로부터 불꽃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에고라 한다.
2. 자아탐구 - 실천 라마나 마하리쉬는 자아탐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내면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능한 한 그 느낌을 유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다른 생각에 의해서 주의가 분산되면 그렇다고 아는 순간 다시 <나>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였다. 말씀하신 대로 저 자신, 즉 <나라는 생각>에 몰두하노라면 다른 생각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갑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는데, 그러면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겁니까? 사람들은 흔히 그런 실수들을 한다. 그대가 진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을 자기고 추구해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어떤 다른 것이 그대를 사로잡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던 그 <나>가 아니다. 이미 변화된 나이다. 그 <어떤 다른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아, 즉 <나>의 본체이다. 그것은 에고가 아니며 지고의 실체, 그 자체이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 수행을 해야 합니까? 마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를 통해서만이 사라진다. 장작불을 지피던 막대기가 장작불이 다 타버릴 때쯤에는 스스로도 거의 다 타버리듯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도 모든 다른 생각들을 사라지게 한 다음 스스로도 사라져 버린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계속 이으려 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물어라.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일에 종사하다 보면 명상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명상할 시간을 따로 낸다는 것은 아주 초보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영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깊은 지복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손은 세상에 물들어 있으나 그의 내면은 홀로 존재한다. <나>를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데에 익숙해졌고 눈으로 보는 대상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는 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는가? 생각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다 보면 <나>에 대한 지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다. <나>에 대한 지각은 형태, 즉 육체와 연관되어 있다. 순수한 진아는 아무것도 연관되어서는 안된다. 진아는 연관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실체이며 그 진아의 빛 속에서 육체와 에고가 반짝인다. 모든 생각을 가라앉히면 순수한 의식이 남는다. 저는 <나>가 일어나는 근원에 대해 탐구하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텅빈 상태만이 존재합니다. 은은한 빛이 충만하고 저는 그것이 육체가 아닌 상태의 저 자신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육체나 다른 형상들을 인식하지도, 보지도 않습니다. 그 체험은 거의 30분 정도 지속되며 제게 기쁨을 줍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경험이 몇시간, 며칠, 또는 몇달 동안 지속되도록 계속 수행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까?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그와 같은 상태를 <마노라야Manolaya, 즉 <일시적으로 생각이 가라앉은 상태>라고 한다. 마음을 내면으로 돌린다면 여전히 마음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고 있다. 마음을 통해서만 마음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은 아미 잘 알려져 있고 인정된 사실이다. 마음은 외부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을 낳지만 내면으로 향하면 스스로 진아가 된다. 탐구의 과정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가 얼마만큼 깨달음에 접근했는지의 척도이지만, 깨달음 자체는 진보가 없이 항상 마찬가지다. 진아는 항상 깨달음 속에 머물러 있다. 아침저녁으로 잠깐 동안만 자아탐구를 해도 충분합니까? 아니면 글을 쓰거나 걸으면서도 계속해야 합니까? 그대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글쓰는 것인가? 걷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인가? 변화될 수 없는 유일한 실체는 그대의 존재이다. 그 순수한 존재의 상태를 깨달을 때까지 그대는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일단 그대가 그 안에 안주하게 되면 더이상의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한, 즉 그대가 <나는 걷고 있다> 또는 <나는 글을 쓰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한, 누가 그것을 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라.
3. 복종 무조건적인 복종이란 무엇입니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면 <질문하는 자>가 사라질 것이다. 전체적이고 완전한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나 신에 대해서조차도 욕망을 갖지 않아야 합니까? 완전한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그대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어야 한다. 그대는 신이 주는 것이면 무엇에나 만족해야 하는데, 이 말은 곧 그대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복종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나>의 근원을 찾아 그 근원 속으로 몰입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고 신만이 전능하기 때문에 내자신을 그에게 완전히 던질 수밖에 없다>라고 느끼는 길이다. 에고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각자에게 가장 쉽게 보이고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모든 길은 결국 에고가 진아속으로 사라져 버린 똑같은 상태에 이르게 한다. 복종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만약 그대가 완전히 복종했다면 그대는 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하며 그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 상황도 있다. 때로는 괴로움이 인간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저희들은 세속적인 생활인들입니다. 저희들에게는 처자식들이 있고 친구가 있으며 친척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고, 또 저희들 각자의 개인적인 부분을 남겨놓지 않은 채 완전히 신의 뜻에만 맡겨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대는 아직 그대가 말한 것처럼 복종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신을 신뢰해야 한다. 신에게 복종하라. 그리고 신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그의 의지에 따라서 살아가라. 그가 가뻐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한다면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로 하여금 그대에게 복종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대는 복종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복종만으로 진아에 이를 수 있습니까? 복종만으로 충분하다. 복종이란 자기 존재의 근원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포가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근원이 그대의 밖에 있는 어떤 신이라는 망상에 빠지지 말라. 그대의 근원은 그대 내면에 있다. 정말 제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실제로는 신의 행위입니까? 인간이 스스로를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점이 문제이다. 그것은 착각이다. 모든 행위는 <더 큰 힘>이 하고 있으며 인간은 도구에 지나지 않다. 신을 사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사랑의 길을 따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가 사랑의 길을 따르지 말라고 한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말하는 사랑에는 이원성이 있다. 저는 신의 형상을 숭배하는 데에 믿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그것은 도움이 된다. 한가지에 대해서 명상하면 마음을 집중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그렇게 되면 마음은 다른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서 명상하고 있는 형상으로만 가득차고 다시 그 형상과 하나가 되어 매우 순수해진다. 그때 그 형상을 숭배하는 자가 누군인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 즉 진아다. 이렇게 해서 결국 진아에 이르게 된다. <나>조차도 환상이라면 이 모든 환상을 만드는 이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가 <나>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나>로서 머물러 있다. 이는 깨달음의 이율배반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모슨도 일으키지 않는다. 헌신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나는 신에게 접근하며, 신 안에 흡수되기를 기원한다.
출처:엠파스 블로그>실존심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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