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다스리기

침묵의 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金 敬 峯 2008. 12. 27. 10:39

침묵의 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침묵의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가운데서-

 

한 스승에게 귀의하고 안 후에도 다른 스승을 존경할수 있습니까?

"스승은 오직 하나이다.스승은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연약함이 있는 한 강한 힘의 도움이 필요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스승이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깨달은 다음에는 그렇게 말할수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스승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런데저는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그 도움을느끼지 못합니다.

"복종하라.그러면 발견할것이다."

 

저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스승은 그대안에 있다."

 

어떤사람이 스승으로서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그의 주변에 정화의 기운이 감돌고,그대가 존경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그는 스승으로서 자격있는 사람이다."

 

만약 스승이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각자 자신의 진화 정도에 따라 자기 길을 갈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수 있고 어떻게 키워나가야 됩니까?

 

"그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그대의 참자아가 아닌 것들을

그대라고 생각하는 오해만 버리면 된다.

그러면 순수한 깨달음만이 남으며,그것이 바로 그대의 참자아 이다.

 

어떻게 해야 습을 버리고 자유를 얻겠습니까?

 

"자유는 우리의 본성이다.우리가 곧 자유이다.

우리가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구속으로 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단지 구속되어 있다는 착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유에 대한 생각이나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사라지고 자유로움 자체가 된다.그러나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는 동안에는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벽종사 카페에서 옮김

 

나는 누구입니까? / 라마나 마하리쉬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Sri Ramana Maharshi) : 1879. 12. 30 ~ 1950. 4. 14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남인도의 성산 아루나찰라에 살았던 이 시대의 스승이다. 1879년 12월 남인도의 타루출리에서 태어난 그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아버지의 사망 이후 삼촌집에서 중학교 과정을 수학하게 된다. 17세 되던 해 평범한 소년으로부터 성인으로 변모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내적 체험은 그에 따르는 외적 변화도 수반하게 된다. 1896년 집을 떠난 후 1950년 4월 14일 영면하게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밝혀주었다. 마음이 외부의 대상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자신의 빛나는 형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마음이 그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규명해 들어가면 마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마음의 실체를 규명해 나아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직접적인 길이다. 마음이란 단지 생각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의 모든 생각들 중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그 뿌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나'라는 관념인 것이다. 이 '나[小我, 個我]'라는 한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를 내면으로 방향을 돌려 찾아 보라. 그러면 이 부끄러운 '나'라는 놈은 사라지고 (진정한 나를 찾는) 지혜의 구도행(求道行)이 시작된다. 이렇게 '나'라는 관념이 사라진 그 곳에 이제 하나의 '참 나'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존재인 '진정한 나'이다. *나는 누구입니까? 일곱 가지 기질로 이루어진 이 거친 몸은 내가 아닙니다. 소리를 듣고, 감촉을 느끼고, 색을 보고, 맛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 다섯 가지 지식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 등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내가 아닙니다.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내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만 지니고 있을 뿐, 아무런 대상도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무지 또한 내가 아닙니다. 이것이 다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한 것들을 모두 ‘이것도 아니다’라고 부정한 뒤에 단 하나 남는, ‘나는 존재한다’(I am) 하는 자각(Awareness)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로 간주하는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인 관행은 우리가 이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로 간주하는 것을 버릴 때 진짜만이 남을 것이며 우리는 진짜가 될 것이다." -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


The Essence / Deva Premal /Gayatri Mantra

cafe.daum.net/11asm 에서 옮김 

 
라마나 마하리쉬의  강의  고통에 대하여......


[문]  당신께서는 이 세상의 고통의 원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개인으로서나 아니면 집단적으로, 그것을 변화시키는데 도움
         을 줄수 있습니까?

[답] 진정한 자기(진아眞我)를 깨달으십시오, 그것이 필요한 전부입니다.



[문]  많은 한계들로 둘러싸인 이 삶 속에서, 제가 과연 진아의 지복(至福)을 깨달을 수 있을까
         요?

[답]  그 진아의 지복은 항상 그대와 함께 하며, 만약 그대가 열심히 추구하면 그대 스스로 그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대가 불행의 원인은 그대 바깥의 삶에 있지 않고, 에고로서의 그
         대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미리 제한을 가해 놓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헛된 애를 쓰고 있습
         니다.   모든 불행은 에고 때문이며, 모든 괴로움은 에고와 함께 찾아옵니다.
         사실은 그대의 안에 있는 불행의 원인을 ,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두어봤자 무슨 소
         용 있겠습니까? 
         그대 바깥의 것들로부터 그대가 무슨 행복을 얻겠습니까?  
         설사 얻는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에고를 부인하고 그것을 무시하여 에고를 고사시켜 버리면, 그대는 자유로워
         지겠지요. 그러나 만약 그대가 에고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대에게 온갖 제한을 가하고
         그대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대 자신인 진아가 되는 것만이 , 항상 그대의 것인 그 지복을 깨닫는 유일한 방
         법입니다.



[문]  만약 참으로 얽매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면, 실제로 기쁨과 슬픔들을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기쁨과 슬픔은, 우리가 자신의 참된 성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에만 실재하는 듯이 보이
         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문]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은 행복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불행을 위해서입니까?

[답]  창조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위로 온갖 것들을 건립하는 것은, 사물을 자신의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이
         익에 맞도록 해석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여자는 그냥 한 사람의 여자인데, 어떤 마음은 그를 ‘어머니’라 하고, 어떤 마음은 ‘누이’라
         하며,  또 다른 마음은 그를 ‘아주머니’라 하는 식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사랑하고 뱀을 싫
         어 하지만, 길가의 잡초나 돌맹이에는 무관심합니다.
         이러한 가치 판단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창조계는 한 그루의 보리수와 같습니다. 새들은 날아와서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가지 밑
         에 둥지를 틀기도 하며, 사람들은 그 그늘에서 시원함은 즐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
         지에 목을 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무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 자신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칩니다. 신이 이
         사람에게는 평안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슬픔을 줄 정도로 편파적이겠습니까?
         창조계 안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지만, 인간이 좋은 것, 건강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계속 우는 소리만 합니다.

         이는 마치 굶주린 사람이 맛난 음식 옆에 앉아서도 손을 뻗쳐 배고픔을 해소하지는 않고
         ‘이게 누구 잘못인가, 신의 잘못인가 사람의 잘못인가?’ 하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  만약 신이 모든 것이라면, 왜 개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개인이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될 행위들은 신이 유발한 것 아닙니까?

[답]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신이 유발한 것이며, 개인은 그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그 사람이 즐거워할 때에는 아니고 그가 고통받을 때에만 적용됩니다.
        만약 그러한 확신을 항상 지니고 있을 수 있다면, 고통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  고통은 언제 사라집니까?

[답]  개인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들이 모두 신의 것이라면, 왜 그대는 즐거움과 고통만 그대의
         것이라고 느낍니까?  
         좋고 나쁜 행위를 하는 자가, 또한 즐거움도 느끼고 고통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내버려두고 그대 자신에게 고통을 부가하지 마십시오.



[문]  당신께서는 어떻게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도처에서 고통을 봅니다.

[답]  각자의 내면에서 심정으로서 빛을 발하는 자신의 실체는, 그 자체 순전한 지복의 바다입
         니다.
         그러므로, 마치 하늘의 푸름이 하늘에 실재하지 않듯이, 불행이란 것도 실재 속에 존재하
         지 않으며 단지(개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무지의 어두운 망상으로는 접근한 수 없는 진리의 태양인 우리 자신의 실체는, 그 자체 행
         복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으므로, 불행이란 것은 개인성이라는 그릇된 관념이 야기하는 하
         나의 환상일 뿐입니다.
         진실로 그같은 비실제적 환상 외에는 그 누구도 불행 같은 것은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

         만약 우리가 , 그 자체 지복인 우리 자신의 진아를 면밀히 탐구한다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불행이란 젼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결코 우리자신인 적이 없는 육체를 ‘나’라고 여기는 관념 때문입니
         다. 고통은 모두 망상에서 기인합니다.



[문]  저는 마음과 몸으로 다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 이후로 저는 행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를 배었을 때부터 고통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왜 그렇게 고통을 받습니까?
         저는 금생에 죄를 짓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고통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입니까?

[답]  그대는 마음과 몸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까?
         질문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마음과 몸을 넘어서 있는 그 누구 아닙니까?
         그대는 몸이 그 생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원인이 전생에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전생의 원인은 그 앞 전생이 될 것이고, 그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하여 씨앗과 싹의 경우처럼 그러한 인과 관계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생의 처음 원인은 무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무지가 지금도 존재하며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무지가 진리에 의해 제거되어야 합니다.

         ‘왜 괴로운 것인가? 지금 괴로워하는 것이 과연 누구인가?’ 
         만약 그대가 그렇게 물어 들어가면, 그대는 그 ‘나’가 마음이나 육체와는 별개라는 것, 그리
         고 진아가 단 하나의 영원한 존재이며, 그것이 곧 영원한 지복 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
         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문]  저는 끝없이 일어나는 걱정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가 행복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데도, 저는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답]  잠들었을 때에도 그런 걱정들이 그대를 괴롭힙니까?



[문]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답]  아무 걱정 없이 잠들었던 그 사람과 지금의 그대는 같은 사람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문]  물론 저는 같은 사람입니다.

[답]  그렇다면 분명히 그 걱정들은 그대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의 잘못입니다.



[문]  저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할 때, 그것은 하나
         의 물리적 현실이며 , 그러한 현실로서 그것이 그에게는 매우 실재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꿈이라 하면서 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아야 합니까?

[답]  진리 혹은 실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대가 말하는 고통은, 그것이 그 중의 극히 작은 일부
         일 뿐인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하나의 꿈입니다.

         꿈속에서도 그대는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봅니다.
         그대는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며,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도 음식
         을 배풉니다.
         그 꿈이 계속되는 한, 그 모든 배고픔의 고통은, 지금 그대가 이 세상 속에 널려있다고 생각
         하는 고통만큼이나 현실적입니다.

         꿈 속의 그 고통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그대가 깨어났을 때입니
         다.

         그대는 배불리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 속에서는,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는 지치고 배가 고파서 실
         컷 먹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대가 배가 부른 상태이고 침대
         에서 나오지도 않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 속에서 느끼는 고통이 마치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
         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느끼는 배고픔은 꿈 속의 음식으로서 해결해야 합니다.
         꿈 속에서 다른 사람이 몹시 배고파하는 것을 보면 그 꿈 속에서 음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대는 꿈의 상태와 생시의 상태를 절대로 뒤섞지 못합니다.
         그래가 진리의 상태에 도달하여 이 환(幻)에서 깨어나는 날까지는,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을 덜어주는 사회적 봉사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대는, 말했듯이 에고 없이, 즉 ‘내가 행위자다’ 하는 생각없이 해야 합
         니다.

         또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쭐해져서,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고 있다. 그는 도움을 필요
         로 한다. 나는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나는 우월하고 그는 열등하다’ 라고 생각해서
         는 안됩니다.
         그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진아, 지복, 진리)을 섬기는 방편으로서 그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한 모든 봉사는 진아인 그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도울 뿐입니다. 



             * 침묵의 성자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1879년 남인도 타밀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6세에 죽음을 체험한 후,  참 자아는 육체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깨우치고, 식음을 전폐하고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의 내면에 빛에 이끌려 모여든 제자들에게, 이십대에 지나지 않은 젊은 스승은 '침묵'
           이라는 방법를 통해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명성을 높아지고 수많은 방문객이 아쉬람을 찾아듦에 따라, 침묵의 파장에 동화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질문자의 수준에 맞추어 대답하므로서 가르침을 폈으며, 그것
           을 제자들이 정리한 몇 권의 책을 통해 서방세계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고, 1950년 열반에
           들었다.

            카페 : 자운 다원(글쓴이:자운) 에서 옮김

 

[라마나마하리쉬] 나는 누구인가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책이다. '자아 탐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진아(眞我)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며 내용이다.

행복이 진아의 본질이요, 무욕은 '진아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고, 지혜는 '진아를 벗어나지 않음'이다. 해탈이란,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진아는 신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있어서 모든 길은 진아로 통한다. 중요한 것은 진아 밖에 없다.

체계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육체, 그 육체를 조종하는 마음, 영적인 정신, 관찰자로서의 나, 주변 사람에게 반향(反響)된 모습으로서의 나, 상대적 역할로 규정지어 지는 나, 무의식으로서의 나, 상상 속의 나 등 '나'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속성이나 모습으로 설명된다. 그 각각의 나는 서로 떼어낼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는 종합적인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긴 하지만, 한 측면만을 분리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이질적인 구성 요소들의 비총체적인 개념적 합이기도 하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하는 진아(眞我)라는 것은 개아(個我, 개체적 자아)와 대비되는, '이 우주 삼라만상에 내재하는 유일한 실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정한 근원'이다.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범신론적 신의 개념과도 흡사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요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는 우리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상은 그의 고유 사상이라기보다는 인도 철학의 한 특징이다.

육체는 허상이고 정신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그 정신적인 부분에서 비본질적인 그림자들을 제거하고 남는 부분이 진아이다. 이 초월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힘을 써야 하며, 그것만이 의미있는 것이고, 그래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보며 '자아 탐구'를 해야 하고, 진아가 아닌 부분을 발견하고 제거해나감으로써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진아는 유일한 실체이며 실재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진리이다. 나의 육체, 생활, 그릇된 인식 등이 진아를 가리고 있으며, 우리가 이를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진아는 본래부터 존재한다. 깨달음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진아는 시작도 없고 따라서 끝도 없다. 시간과 공간도 무의미하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새롭게 얻을 수는 없다.'(p.91) 진아는 이미 깨달아 있다.

'자아 탐구'는 명상과는 다르다. 명상은 대상이 있는 것이고, 자아 탐구는 주관만 있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다. 행위나 노력이 아니고, '존재의 과정'이며 '무위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생각을 억압하여 무아의 상태에 도달하는 요가와도 구분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다른 질문을 떠올리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등으로 계속해서 본질속으로 근원속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아에 도달하면, 에고가 제거되고 순수한 본질, 유일한 실재만 남는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호흡 조절이나 자세 등도 초기 수행에 도움을 줄 수는 있겠으나,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고 있다. 철저히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쉽고 단순하다.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쉽고 단순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진리라는 것은 하나로 설명될 수는 없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가까우며(진아처럼), 끼워다 맞추어서 하나의 설이나 론으로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포함하는 것이 진리이므로 그대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상계, 몸 등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다소 걸린다. 인도 철학의 특징적인 면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눈에 띈다. 나는 나의 몸을 부정할 수 없다. 분리될 수 없는 요소가 있기도 하고, 신과 같은 존재인 나(=진아)도 중요하지만 고통을 느끼는 하찮은 몸뚱아리도 내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나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를 상상하기 어렵고 몸의 구속을 받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하는 '개아'의 개념에 가까운 비본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수행 방법은, 인도 철학에서 말하는 진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라마나 마하리쉬가 이야기하는 '진아'에 이르는 것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여러가지 그림자들로 가리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1. 자아탐구 - 이론

라마나 마하리쉬는 육체와 마음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는 개체적 자아가 실재한다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 영적으로 진화된 몇몇 제자들은 쉽게 그와 같이 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뿌리 깊이 베어 있는 습관을 일순간에 버리기가 어려웠다. 라마나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감지하고, 깨달음에 쉽게 이를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스스로 자아탐구라고 부르는 방법을 권하였다. 이 방법은 그의 실천적인 가르침의 주춧돌을 이루는 것이며, 이하 세장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우선 방법 자체를 설명하기 전에 마음의 본질에 대한 라마나의 견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마음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에 자아탐구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라마나에 따르면 육체와 마음의 모든 의식적 행위의 이면에는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은연중의 가정이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등의 생각 속에는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나>가 가정되어 있다. 라마나는 이를 아함 브리티Aham Vriti<나라는 생각>라고 하였다.

그는 개체성에 대한 관념을 바로 이 <나라는 생각>이 여러가지 형태로 드러난 것일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개체성을 마음과 같은 것으로 보고 마음을 <나라는 생각>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 의하면 개체성의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마음과 <나라는 생각>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깨달은 다음에는 생각하는 자도 행위자도 없으며 개체성에 대한 인식도 없다고 강조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는 또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강조하였으며 <나라는 생각>은 실체가 없는 그릇된 가정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나라는 생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나라는 생각>이 그 생각의 주인처럼 나타나서 <내가 생각한다> <내가 믿는다> <내가 원한다> <내가 행위하고 있다>라는 식이 되지만 사실은 동일시할 대상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생각>은 없다. <나라는 생각>이 마치 실제적인 것처럼 계속 나타나는 이유는 끊임없이 동일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동일시의 밑바닥에는 육체의 소유자 또는 육체와 동일체로서의 <나>가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모든 그릇된 동일시의 근본적인 뿌리이며 이 동일시를 해소하는 것이 자아탐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나라는 생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지성, 기억 등의 정신적 속성도 역시 마음이다. 또한 개체적 영혼이라는 것도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의 본성, 즉 마음을 일으키는 본체를 알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치에 따라 순서를 매겨볼 때 <나라는 생각>이 가장 중요하며 개체성(개인)에 대한 생각도 다른 모든 생각의 뿌리 내지는 줄기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은 <어떤 개인>의 생각으로서 일어나며 에고와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에고가 생각과 행위를 전개시킨다. 2인칭이나 3인칭은 1인칭 없이는 나타나지 않으며 1인칭이 나타난 다음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같이 나타났다가 같이 사라진다. 그러면 <나>의 궁극정인 원인을 추적해 보자.
어디로부터 이 <나>가 일어나는가? 그것을 내면에서 찾아보면 그것은 사라진다. 이는 현명한 추적 방법이다. 마음이 스스로의 본성을 계속 규명해 들어가면 결국 마음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마음이란 생각의 집합에 불과하며, <나라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뿌리이기 때문에 마음은 결국 <나라는 생각>일 뿐이다.
<나라는 생각>의 탄생이 곧 한 개인의 탄생이며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 그 개인의 죽음이다. 또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육체와의 그릇된 동일시가 시작된다. <나라는 생각>을 없애라.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고통이 있으며 그것이 없을때 고통도 없다.

<나라는 생각>에 집중하려고 하면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서 저를 방해합니다.

그것들이 누구의 생각인지 살펴보라.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 생각들은 <나라는 생각>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나라는 생각>에 몰두하면 사라져 버린다.

자아탐구를 하는 것도 역시 에고인데, 어떻게 자아탐구를 통하여 에고의 비실제성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현상적인 에고의 존재는 초월된다.

마음의 속성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진아를 직접 깨닫기 위해서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야만 합니까?

<나라는 생각>은 마음의 다른 속성들과는 달라서 마음의 속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상호간에 본질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마음의 다른 속성들과는 달리 <나라는 생각>은 마음의 모든 속성들과 본질적으로, 그리고 똑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속성들은 <나라는 생각>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나라는 생각>은 다른 속성들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나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다른 속성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는 것은 단순히 에고의 여러 형태 중 한가지 형태만의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 그 자체를 찾는 것이다.

진아는 결코 에고에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생각>의 형태를 가진 에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능적인 면에서 본다는 에고는 유일한 한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에고는 순수한 의식인 진아와 스스로의 지각능력이 없는 수동적인 육체 사이에서 매듭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그대가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대는 에고의 본질적인 의식의 측면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진아의 순수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진아는 마음을 초월해 있다고 하면서 깨달음은 마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컨데 <마음이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마음만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죽은 마음>을 통해서 아트만(진아)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죽은 마음>이란 생각이 없는 마음이요, 내부로 향해진 마음이다. 그때 마음은 마음의 근원을 보며 그 근원(진아)이 된다. 이는 주관이 객관을 지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음의 본성은 바로 각성, 또는 의식이다. 에고가 마음을 지배할 때는 마음이 생각하고 헤아리고 느끼는 작용을 하지만 에고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우주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포함하며, 순수하게 각성상태만을 유지할 뿐이다.
진아의 지고한 의식 안에서 마음이 사리지게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힘과 더불어 나타났던 여러가지 힘들이 완전히 사라지며, 그것들이 자신의 의식속에 나타났던 비실재적인 환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생각과 망각의 작용을 하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 바로 탄생과 죽음의 순환인 윤회이며, 생각과 망각의 작용이 사라진 상태의 진실한 <나>에는 탄생과 죽음의 원인이 되는 <진아에 대한 망각>이 없다.

어떻게 에고를 없앨 수 있습니까?

우선 에고를 찾아보라. 그리고 나서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를 물어보라. 그 질문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에고이다. 그런 질문은 에고를 키우는 길이지 결코 에고를 없애는 길이 아니다. 그러나 에고를 찾아보면 그대는 에고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이 에고를 없애는 길이다.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마치 불에서 불꽃이 일어나듯 절대적인 진아로부터 불꽃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에고라 한다.
무지한 사람에게 나타난 에고는 나타나는 순간, 자신을 어떤 대상과 동일시 한다. 에고가 대상과 연관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그 연관이 바로 무지이며 그 연관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이다. 대상과 연관지으려는 에고의 습성이 사리지면 에고는 순수한 채로 남으며 근원으로 녹아 들어간다.
육체와의 그릇된 동일시가 바로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며 우선 이 생각이 사라져야 한다. 순수한 <나>는 두 가지 마음 상태, 또는 두 가지 생각들 사이의 틈에서 체험된다. 에고는 끊임없이 계속 어떤 대상과 연관을 맺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에고가 모든 대상 또는 생각과 단절되었을때만 그것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형태가 없는 유령같은 에고는 형태와 연관을 맺음으로써 존재하고, 형태와 연관을 맺음으로써 지속되며, 연관맺은 형태들로 인하여 점점 커진다. 또 한 형태와의 연관이 끊어지면 다른 형태와 다시 연관을 맺는데, 찾으려고 하면 도망가 버린다.
에고, 즉 1인칭이 <육체가 나>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한 2인칭, 3인칭도 존재하지만, 1인칭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1인칭이 사라지면, 2인칭, 3인칭도 따라서 사라지고, 밝게 빛나는 진아가 드러난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이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의 실 위에 다른 생각들이 꿰어져 있다. 따라서 관심을 내부로 돌려 <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하게 되면 모든 생각 (<나라는 생각>을 포함한)이 사라지고 진아가 자연히 드러난다.

 

2. 자아탐구 - 실천

라마나 마하리쉬는 자아탐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내면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능한 한 그 느낌을 유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다른 생각에 의해서 주의가 분산되면 그렇다고 아는 순간 다시 <나>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이 나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궁극적인 목표는 육체와 마음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실행의 초기단계에서는 <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의 생각 또는 지각의 형태를 띤 정신적인 행위가 되지만 점점 더 그 실행이 깊어짐에 따라 그것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나>라는 느낌이 되고, 이 느낌과 다른 생각들 또는 대상들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그것은 사라진다. 이때 개체성(개인)이 잠시 정지된 상태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체험이 처음에는 건헐적으로 나타나다가 실행을 되풀이함으로써 점점 자주 나타나고 오래 유지되게 된다.
자아탐구가 이 정도 수준에 이르면 더 이상 개인적인 노력이 불가능한 각성상태가 나타난다.
느력을 계속하던 <나>가 일시적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나라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깨달음 아니지만 수행의 최고단계이다.
이와 같은 상태를 계속 체험하게 되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던 바사나(정신적인 경향성)들은 점점 약해지고 사라지며, 그것들의 힘이 어느정도까지 약해지면 진아의 힘이 남아 있는 찌꺼기들을 완전히 씻어내 버림으로써 <나라는 생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최후의, 그리고 불변의 깨달음의 상태이다.
<나라는 생각>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이 수행방법은 억압적으로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보다 우수한 방법이다. 이는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억압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다.
수행의 초기단계에서는 여러가지 생각들로부터 자기에게로 주의를 돌리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일단 <나>라는 느낌에 대한 주시가 확립되기만 하면 더 이상의 노력은 오히러 방해가 된다.그때부터 행위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존재의 과정이며, 노력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무위의 과정이다.
궁극에 가서 진아를 발견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통해서이다.
자아탐구를 명상과 같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만 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깨어있는 동안 내내, 무슨 일을 하는 동안이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라마나는 각자가 하는 일과 자아탐구 수행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없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약간만 해보면 어떤 상황하에서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초보자들의 경우에는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결코 오랫동안 앉아만 있는 방식은 권유하지 않았으며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속적인 생활을 버리고 자아탐구에만 몰두하는 생활을 하고자 하였을때,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저 자신, 즉 <나라는 생각>에 몰두하노라면 다른 생각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갑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는데, 그러면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겁니까?

사람들은 흔히 그런 실수들을 한다. 그대가 진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을 자기고 추구해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어떤 다른 것이 그대를 사로잡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던 그 <나>가 아니다. 이미 변화된 나이다.

그 <어떤 다른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아, 즉 <나>의 본체이다. 그것은 에고가 아니며 지고의 실체, 그 자체이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 수행을 해야 합니까?

마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를 통해서만이 사라진다. 장작불을 지피던 막대기가 장작불이 다 타버릴 때쯤에는 스스로도 거의 다 타버리듯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도 모든 다른 생각들을 사라지게 한 다음 스스로도 사라져 버린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계속 이으려 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물어라.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놓치지 않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물으면 <나에게>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마음은 마음의 근원(진아)으로 돌려지게 되고 일어났던 생각은 가라앉을 것이다.
이를 계속 반복하면, 근원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머무르려는 마음의 힘이 증가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쌓여온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습성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자신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강렬해짐에 따라,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과연 마음의 모든 습성들이 사라지고 진아로서만 남을 수가 있을까>라는 의심조차도 하지 말고 더욱 끈질기게 자신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습성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그 순간 이질문을 함으로써 그 생각을 없애야 한다.
비본질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바로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 진아를 떠나지 않음이 지혜이다.
따라서 이 둘(무욕과 지혜)은 같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바다 밑에 있는 진주를 캐오듯이 무욕의 자세로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은 진아라는 진주를 얻을 수 있다.
진아에 이를 때까지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잊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구속되어 있는 아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면 그것이 곧 자유이다.
마음을 진아에만 계속 고정시키는 것이 자아탐구이며, 스스로를 실재-의식-지복, 즉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아는 것이 명상이다.

일에 종사하다 보면 명상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명상할 시간을 따로 낸다는 것은 아주 초보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영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깊은 지복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손은 세상에 물들어 있으나 그의 내면은 홀로 존재한다.

<나>를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데에 익숙해졌고 눈으로 보는 대상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는 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는가?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나라는 생각>으로 나타나서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눈을 통해 스스로를 투사하여 주위의 사물들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깨어 있는 상태만을 기준으로 해서 그 상태와는 다른 뭔가를 보고자 기대한다. 또한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만을 확실하다고 인정한다. 인간은 결코 보는 자, 보이는 대상, 보는 과정이 모두 단 하나의 의식, 즉 진아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아가 반드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환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탐구가 필요하다.
진실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지금 <그대>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을 앞에 두고 보아야 하는가?
거울이 없이도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

생각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다 보면 <나>에 대한 지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다. <나>에 대한 지각은 형태, 즉 육체와 연관되어 있다. 순수한 진아는 아무것도 연관되어서는 안된다. 진아는 연관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실체이며 그 진아의 빛 속에서 육체와 에고가 반짝인다. 모든 생각을 가라앉히면 순수한 의식이 남는다.
잠에서 막 깨어난 뒤, 아직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직전의 순간에 순수한 <나>가 있다. 자지도 말고 어떤 생각에 끌려가지도 말고 그 순간에 머무르라. 그 순간을 확고하게 포착할 수 있다면 외부세계가 보여도 상관이 없다. 보는 자는 현상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남는다.

저는 <나>가 일어나는 근원에 대해 탐구하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텅빈 상태만이 존재합니다. 은은한 빛이 충만하고 저는 그것이 육체가 아닌 상태의 저 자신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육체나 다른 형상들을 인식하지도, 보지도 않습니다. 그 체험은 거의 30분 정도 지속되며 제게 기쁨을 줍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경험이 몇시간, 며칠, 또는 몇달 동안 지속되도록 계속 수행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까?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그와 같은 상태를 <마노라야Manolaya, 즉 <일시적으로 생각이 가라앉은 상태>라고 한다.
마노라야는 일시적으로 생각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집중을 의미한다. 이 집중상태가 끝나면 바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전처럼 밀려든다.
이와같이 일시적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가 설사 1천년 동안 계속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탄생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불려지는 상태, 즉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로 이끌지는 못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런 체험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 즐거움을 아는자가 누구인지 내면에서 탐구해야 한다.
이런 탐구를 하지 않으면 그는 오랫동안의 황홀경이나 깊은 수면상태에 빠질 것이다. 수행을 해 나가는 도중 이 단계에서 적절한 인도가 없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자유속에 속아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오직 소수만이 가까스로 무사히 목표에 도달하였다.
구도자들 중에서도 일시적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이 상태와 영원한 생각이 끊어진 상태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노라야에서는 생각의 물결들이 일시적으로 잠잠해지는데, 설사 그 기간이 1년 동안 지속된다 하더라도 일시적으로 가라앉은 생각들은 마노라야가 끝나자마자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구도자는 자신의 영적 진화과정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생각이 가라앉는 이러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상태를 체험하면 즉시 의식을 회복해서 이 고요함을 경험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내면에서 탐구해야 한다. 다른 생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깊은 수면상태, 혹은 자기최면상태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 상태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표시가 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자유와 깊은 수면상태의 어느길로나 갈 수 있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쉽고, 직접적이며, 가장 빠른 지름길은 자아탐구의 방법이다. 자아탐구를 통하여 생각들은 점점 깊어지고, 근원에 이르게 되며 그 근원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 그때 그대는 내면으로부터의 반응을 느끼게 될 것이며 모든 생각들이 일시에, 그리고 영원히 사리짐으로써 그대가 그곳에서 휴식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마음을 내면으로 돌린다면 여전히 마음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고 있다. 마음을 통해서만 마음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은 아미 잘 알려져 있고 인정된 사실이다. 마음은 외부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을 낳지만 내면으로 향하면 스스로 진아가 된다.

탐구의 과정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가 얼마만큼 깨달음에 접근했는지의 척도이지만, 깨달음 자체는 진보가 없이 항상 마찬가지다. 진아는 항상 깨달음 속에 머물러 있다.

아침저녁으로 잠깐 동안만 자아탐구를 해도 충분합니까? 아니면 글을 쓰거나 걸으면서도 계속해야 합니까?

그대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글쓰는 것인가? 걷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인가? 변화될 수 없는 유일한 실체는 그대의 존재이다. 그 순수한 존재의 상태를 깨달을 때까지 그대는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일단 그대가 그 안에 안주하게 되면 더이상의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한, 즉 그대가 <나는 걷고 있다> 또는 <나는 글을 쓰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한, 누가 그것을 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라.

 

3. 복종

무조건적인 복종이란 무엇입니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면 <질문하는 자>가 사라질 것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나>라는 근본적인 생각에 몰입함으로써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그 중의 하나이고, <더 큰 힘>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전체적이고 완전한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나 신에 대해서조차도 욕망을 갖지 않아야 합니까?

완전한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그대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어야 한다. 그대는 신이 주는 것이면 무엇에나 만족해야 하는데, 이 말은 곧 그대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하면 완전한 복종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나>의 근원을 찾아 그 근원 속으로 몰입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고 신만이 전능하기 때문에 내자신을 그에게 완전히 던질 수밖에 없다>라고 느끼는 길이다.
이 두 번째 길을 가다 보면 오직 신만이 실재하며 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이 점차로 강해진다.
결국, 이 두가지 길은 같은 목표에 이르게 한다.
완전한 복종은 지혜, 또른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에고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각자에게 가장 쉽게 보이고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모든 길은 결국 에고가 진아속으로 사라져 버린 똑같은 상태에 이르게 한다.

복종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만약 그대가 완전히 복종했다면 그대는 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하며 그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고 불평해서는 안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 상황도 있다. 때로는 괴로움이 인간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저희들은 세속적인 생활인들입니다. 저희들에게는 처자식들이 있고 친구가 있으며 친척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고, 또 저희들 각자의 개인적인 부분을 남겨놓지 않은 채 완전히 신의 뜻에만 맡겨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대는 아직 그대가 말한 것처럼 복종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신을 신뢰해야 한다. 신에게 복종하라. 그리고 신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그의 의지에 따라서 살아가라. 그가 가뻐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한다면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로 하여금 그대에게 복종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대는 복종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은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있고,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그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라. 그러면 그대의 짐은 모두 그의 것이 된다.
그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걱정도 없다. 그대의 모든 걱정은 이제 그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종이며 헌신Bhakti이다.
아니면 그러한 질물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탐구해 보라.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가 진아로서 남아라. 진지한 구도자에게는 이 두 길 중의 하나가 열려 있다.

복종만으로 진아에 이를 수 있습니까?

복종만으로 충분하다. 복종이란 자기 존재의 근원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포가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근원이 그대의 밖에 있는 어떤 신이라는 망상에 빠지지 말라. 그대의 근원은 그대 내면에 있다.
그 근원을 향하여 스스로를 포기하라. 이 말은 곧 그 근원을 찾아서 그 안에 몰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말 제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실제로는 신의 행위입니까?

인간이 스스로를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점이 문제이다. 그것은 착각이다. 모든 행위는 <더 큰 힘>이 하고 있으며 인간은 도구에 지나지 않다.
만약 인간이 이와같은 태도를 받아드린다면 그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는 고통을 자초한다.
예컨데 어떤 사원의 탑은 밑부분이 사람의 입상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입상의 자세와 표정은 마치 그 사람이 탑전체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탑은 땅위에 세워져 있으며 땅 밑에는 탑을 받치는 기초가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입상은 탑의 일부분인데도 불구하고 탑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듯한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다.
우습지 않은가? 자기 자신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신을 사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사랑의 길을 따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내가 사랑의 길을 따르지 말라고 한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말하는 사랑에는 이원성이 있다.
즉 사랑하는 그대와 사랑받는 신이 나누어져 있다. 인간은 결코 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진아에 대한 사랑을 가지는 것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이다.

저는 신의 형상을 숭배하는 데에 믿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그것은 도움이 된다. 한가지에 대해서 명상하면 마음을 집중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그렇게 되면 마음은 다른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서 명상하고 있는 형상으로만 가득차고 다시 그 형상과 하나가 되어 매우 순수해진다. 그때 그 형상을 숭배하는 자가 누군인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 즉 진아다. 이렇게 해서 결국 진아에 이르게 된다.
가장 좋은 숭배는 생각없는 생각으로 형상없는 실체를 숭배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숭배에 익숙하지 못할때는 형상을 숭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형태없는 실체에 대한 숭배는 에고의 형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에고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숭배는 모두 형상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조차도 환상이라면 이 모든 환상을 만드는 이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가 <나>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나>로서 머물러 있다. 이는 깨달음의 이율배반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모슨도 일으키지 않는다. 헌신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나는 신에게 접근하며, 신 안에 흡수되기를 기원한다.
나는 믿음을 가지고 복종하며 그에게 집중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원래의 <나>가 있던 자리에 그 <나>는 사라지고 완전한 복종에 의한 신의 자취만이 남는다.
이것이 바로 가장 높은 차원의 헌신이요, 복종이며, 무집착이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일부만을 포기하기는 쉽지만 자기자신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만약 자기자신을 포기하면 일시에 모든 것이 포기될 것이다.
소유의 씨앗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본질적인 것은 뿌리가 뽑히고 싹이 잘려진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하게 냉정해져야 하며,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숨이 막혀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발버둥칠 때와 같은 맹렬함이 있어야 한다.


 내용출처: 라마나 마하리쉬, 『나는 누구인가』

 출처:엠파스 블로그>실존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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