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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교회와 다른 두 줄기 흐름

金 敬 峯 2010. 1. 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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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신약교회와 다른 두 줄기 흐름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엡3:21)

1. 배도한 교회들이 가진 종교회의들

1)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콘스탄틴에 의해 소집,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

이 회의를 통해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였다. 마치 오늘날의 여호와 증인의 대부격인 존재이다. 저스틴(Justin)은 성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성자인 로고스는 단지 2급에 속하는 신적 존재라고 하였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한 본질 안에 세 표현이라고 했다. 오리겐(Origen)은 성부로부터 산출된 제2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독론은 일대 혼란을 빗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당시에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고 인성만을 주장하게 되었다(요일4:2와 비교). 이에 대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피조물로서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과 본질이 비슷할 뿐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는 지음 받은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지셨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다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이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신 분이고, 만일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그를 믿어서 구원 얻을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많은 논쟁 끝에 성부는 성자와 동일 본체라는 결론을 얻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2)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대제 티오도시우스에 의해 소집, 150명의 감독들이 참석)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하는 회의였으며 니케아 신경의 개정작업을 완료하였다. 삼위일체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성령의 신성을 재천명하였다. 아폴리나리안 주의를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안은 그리스도가 인간정신을 지니지 않았으며 대신에 로고스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혼과 몸으로만 구성된 존재로 보며 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파도기아의 교부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를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느냐?"고 반론하였다.

3)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티오도시우스 2세, 250명의 감독이 참석)

이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안 주의(경교라고 일컬어짐)가 이단으로 몰리며 펠라기우스가 정죄 받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었던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을 부인하고 기계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신인(新人)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고 신을 운반하는 로고스를 낳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수난 당한 것은 인성뿐이고 신성은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시릴(A. D. 376-444, Cyril)은 로고스가 육신이 된 의미를 마리아가 사람이신 하나님을 낳은 것이라고 하였다. 후에 네스토리안들은 중국에까지 옮겨왔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신라에 와서 활약했던 흔적이 최근 경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알미니우스나 웨슬리안 신학의 뿌리가 된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게 태어났으므로 그 자신이 구원에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은 인간이 죄 가운데 죽었으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고 그 구원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후대에 칼빈주의와 예정론에 뿌리를 이루게 된다.

4)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황제 마리안에 의해 소집, 500-600명의 감독들, 메트로폴리탄[감독장-도시교회, 큰 교회의 목사를 지칭]이 참석)

이 회의에서는 유티키안 주의가 배격 받았다. 유티키안 주의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케스(Eutyches)라고 하는 사람이 신인 양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었다. 유티케스는 성육신 때, 그리스도의 양성이 하나의 신인단성(Monophysitsism)으로 연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단성론이라고 하는데, 유티케스는 무소부재한 신의 속성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인성이 우리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 때 다음과 같은 것들이 교리로 공포되었다.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배한다는 성모숭배가 체택되었다. 아울러 마리아를 향한 기도가 제시되었다. 마리아는 기도자의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달해주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중보자로 소개되었다.

5) 553년 콘스탄티노플 2차 종교회의(황제 유스티니안에 의해 소집, 165명의 감독들 참석)

유티키안 주의를 배격하고 단성론에 반대하며 칼케돈 신조를 재확인하는 회의가 되었다. 그러나 칼케돈 신조에 반대하는 이집트의 곱트 교회(Coptic Church), 이집트 교회, 동방의 알미니아 교회, 마로나잇 교회, 수리아 교회 등이 독립해서 오늘날까지 존재하게 되었다.

6) 680년 콘스탄티노플 3차 종교회의(황제 콘스탄틴 페고네이터에 의하여 소집)

이단을 규탄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특히 이 때 다루어진 내용은 단의론(Monothelitism)에 관한 것이었다. 단의론이란 "그리스도가 인간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신의(神意)만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되었을 것이므로 오직 하나의 의지, 신적 의지만 있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로마 감독(교황) 오노리우스는 폐위, 파문당하였다. 그때는 교황무오설이 강조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 주장에 동조한 아라비아의 데오도르, 콘스탄티노플 감독 세르기우스(Sergius), 알렉산드리아의 씨루스 등은 모두 이단으로 규탄되었고 양의론이 채택되었다.

7) 787년 니케아 2차 종교회의(왕후 아이렌이 소집)

성상숭배(출20:3,4)와 성자 숭배가 시작(노골적인 이교화, 눅16:14-31)되었다.

8) 869년 동방교회회의(바실리우스 마레도 황제가 소집)

희랍파(동방교회, 폰티우스)와 로마파(로마카톨릭, 니콜라스1세)의 대결장이 되었다. 서로간의 파문 논쟁이 일어났으며 교황 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때 로마 교황청이 세력이 우세하였으며 이 후로부터 모든 종교회의는 황제가 아닌 로마 교황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차이점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파문과 저주로서 갈라서게 되었다.

구분

동방교회

서방교회

정치적 배경

비잔틴 제국

신성로마제국

종족분포

슬라브족(현, 그리이스,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라틴족(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중앙 남 아메리카, 멕시코)

교황권 주장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그 서열상 로마 대주교 다음에 있었다.

로마 대 주교는 모든 교회의 최고권을 주장하였다.

신학논쟁 발전

칼케돈 회의 이후 정체되었다.

끊임없는 논쟁의 전개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삼위일체 논쟁

성령은 성부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였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였다.

성상숭배 논쟁

120년 간의 성상사용에 관한 논쟁을 전개한 후 조각한 상에 대한 사용을 금지하였다.

동방교회와의 논쟁 끝에 조각한 상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허용하였다.

언어와 문화

그리스어(희랍어)

라틴어

성직자 독신

하급 성직자의 결혼이 허용되었다.

모든 성직자는 독신생활을 하였다.

외부세력

회교도들의 압력과 동방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이 감행되었다.

서방 이민족들이 기독교화 하여 서구교회에 흡수되었다.

1054년 상호파문 결정

미카엘 케롤라리우스는 교황 레오 9세에게 파문당한 후 교황을 저주하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케롤라리우스를 파문하였다.

침례방법(현)

침수

적수

만찬 거행(현)

평신도에게 빵과 포도주를

평신도에게는 빵만, 사제들이 포도주를

교황 교리(현)

교황무오설 부인

교황 무오설 강력 주장

3. 바울시안스(Paulcians)

1)기원

A.D. 640년 경 실루아노(혹은 실바, Silvanus)라 부르는 콘스탄틴 때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콘스탄틴은 사라센인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 나온 아르메니아 사람으로부터 성경의 한 사본을 얻게 되었다. 그 성경 사본을 통해 급격한 변화를 받고 동방교회에 대해 성상숭배를 하고 미신적인 신앙행위를 한다하여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실루아노는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틴 보고나투스(668-685)가 보낸 시므온이란 관리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이 시므온이 실루아노 콘스탄틴이 죽은 후에 그의 신앙과 삶에 감동이 되어 3년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티투스라고 개명하고 관직을 버리며 카브사로 도망하여 열심히 복음전도에 힘썼다. 그러자 유스티안 황제는 시므온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을 이단자로 몰아 불에 태워 죽였다. 이리하여 콘스탄틴과 그에 의해 개종한 시므온을 시작으로 하여 게네시오스, 요셉, 사가랴, 바네스, 셈바트, 세르기우스와 같은 이들이 연이은 박해를 죽음으로 항거하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들은 성상숭배가 우상숭배라는 확신 속에서 계속하여 기존 로마 카톨릭 교회들과 싸우며 순교당한 사람들이었다.

842-867년 사이에 데오도라 황제의 칙령으로 인한 열렬한 박해 때문에 10만명이 넘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죽게 되었다. 이 죽은 원인은 성상, 돌십자가, 나무 등의 허탄한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이 주원인이었다. 순교한 이들, 소아시아 지방 북단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통칭하여 바울파라고 부른다.

비잔틴 제국의 높은 지위에 있던 카르비아가 무죄한 성도들을 죽이는 황제들의 만행에 울분을 느끼고 5000명의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무력항쟁을 하며 제국 내의 성상들을 파괴하다가 로마군에 의해 90%가 살육 당하고 나머지는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발칸반도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잠식하고 말았다.

11세기 십자군 전쟁때 시리아에서, 18세기 필립포플리스 근처에서 바울파를 발견하였다.

2)주장

a.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미명하에 창안된 모든 인간적 산물을 모조리 배격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권위 있는 규범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제도를 가장 거세게 반대한 반로마 카톨릭 세력이었다.

b. 성례전에서 '상징론'이나 이와 유사한 모든 주장을 거절하였다.

c. 로마 카톨릭의 성직 계급을 거부하고 비판하였다. 모든 신자의 영적 개성과 능력을 평등하게 인정하였다.

d.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 침례만을 주장하였다. 회개, 주의 만찬과 침례만을 인정하였다.

e. 마리아의 영구적 동정녀 교리, 무원죄의 탄생교리를 반대하였다.

f. 연옥교리를 반대하였다.

g. 성자들의 중보기도에 관한 교리를 거부했다.

h. 성화, 성상, 십자가, 고상, 향품 등 모든 우상숭배 요소를 배격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바울파의 신앙은 조금도 이단적 요소가 없음에도 로마 카톨릭이라는 세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무차별로 죽임을 당하여야만 했다.

3)영향

오늘날의 기록자들은 저들을 마니교와 같은 이단이었고, 성자는 성부의 진정한 아들이 아니었다는 양자론자였으며, 구약을 거부하고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 존중했던 말시온과 같은 이단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주장은 로마 카톨릭의 주장인데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것은 오류일 뿐이다. E. Gibbon은 [로마제국의 흥망사]에서 바울파에 관하여 동로마제국을 뒤흔들고 서로마제국을 계몽시켰던 자들이라고 적고 있다.

출처 : 임마누엘 카페  |  글쓴이 : 루디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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