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을

[스크랩] 금강하구사람 / 無言으로 오는 봄(박재삼)

金 敬 峯 2010. 4. 8. 21:09

無言으로 오는 봄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 시집 『허무에 갇혀』, 한 미디어, 1993

 

 

 

뭐라고? 말짱 거짓말이다. 봄 같은 호들갑이 없다. 저처럼 말 많은 것이 그것도 모자라 사람 두근거리게 하고 딴전을 피우지. 어차피 한나절도 못 가서 들키고 말 것을. 처음부터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울 때부터 낌새를 보이더라니. 이토록 엉큼하게 일을 꾸밀 줄 알았지. 꽁꽁 얼어붙은 담장에 개나리 툭 터트리는 건 누구의 말이냐. 산수유 노루귀 개불알꽃은 어디서 말없이 사다 묶은 것이더냐.


아무래도 나는 참을 수 없다. 말을 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봄이 내게 들어왔다는 '이 엄청난 비밀을 내내 감출 수는 없다. 어차피 나는 참을성이 부족해서 시도 품지 못하고 말도 오래 안고 끙끙거리지 못한다. 슬그머니 가슴을 열어 보이는 것이 호들갑이라 하면 그냥 웃는 거지 뭐. 사람을 들뜨게 하고 아프게 한 봄 탓이라 여기자. 이것까지 회피하지는 않을 테지. 나는 이렇게 시를 거꾸로 읽기도 하는데 그 정도는 들어주겠지.

출처 : 금강하구사람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메모 :

'시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다보면 한 둘 쯤 / 김시천  (0) 2010.09.13
배차계 정씨 / 김영수   (0) 2010.05.26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0) 2010.03.26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0) 2010.02.03
안도현 시 모음  (0) 201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