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을

[스크랩] 아내의 브래지어 외 / 박영희

金 敬 峯 2010. 11. 1. 16:14

 

 

 

 

 

아내브래지어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 2001. 창비

 

 

 

 

 

셋방살이 다섯 식구 / 박영희 

 

 

                  사람이 잠들면

                  코에서 찬바람이 나는 것인디

                  아이 글씨

                  자는 줄 알았던 마누라 코에

                  살짜그니 손을 대본께

                  더운 바람이 나더란 말이시

                  가운데에는

                  자식놈 셋이 잠들어 있제

                  통통배 엔진처럼 가슴은 요동을 치제

                  암만 더듬어도

                  마누라가 있는 곳은 섬이더란 말이시

                  마누라는 그 섬에서

                  애타게 통통배를 기다리는디

                  그것이 워디 쉬운 일이여야제.

 

 

   

꽃밭에서 / 박영희


봉선화 분꽃 피어 있는 꽃밭에서
스무살 시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꽃밭 가득
온통 꽃들뿐이었습니다
꽃대도 이파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을 생각하니
피어 있는 꽃들 어느덧 나이를 닮아갑니다
진분홍 봉선화는 나비를 부르고
코스모스는 잠자리를 부릅니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구름인 듯 바람인 듯
쓸쓸하게 흘러가는 마흔,
마흔을 생각하니 옛사랑의 그림자가
꿀벌들처럼 잉잉거리며 꽃밭 주변을 맴돕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쉰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예순이 되어버린 나는
꽃보다는 씨앗에 눈이 먼저 가는 겁니다
꽃 지는 건 두렵지 않으나
씨앗들 썩을까봐 장마가 염려되는 겁니다

오늘은
꽃밭에서 한 생애를 다 살아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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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즐거운 세탁』은, 4부로 구성,

총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전 시집에 견주어 열 번

숨을 고른 듯한 깊은 응시와 절절한 사랑의 시학이 돋보인다.

“초기의 시집 곳곳에서 보이던 어긋난 세상에 대한 격한

목소리는 이제 안타까움과 애잔한 눈길과 넉넉하게 껴안는

품안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고 박남준 시인은 발문을

통해 말한다.

 

   2001년 『팽이는 서고 싶다』(창비 刊)이후 6년여 만에

내는 이번 시집에서 재미있는 것은 박영희 시인의 살림이

손빨래에서 세탁기빨래로 바뀌었다는 것.
인구에 회자되었던 시, 「아내의 브래지어」를 기억하는 분

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단박 알아챌 것이다.

아내의 브래지어를 손으로 빨며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에 눈시울 붉혔던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는 「즐거운 세탁」을 통해 속옷들이

“나란히 손잡고”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도는 세탁기

를 들여다보며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다고 노래하고 있다.


   두 편의 빨래시의 공통점은 헹굼시 꼭 피죤을 넣는다는 것.

그렇게 식구들에게 “향기를 전하고 싶은” 가장의 마음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은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 (고물상을 지나다), “‘사랑’이라는 말 한 번도

입 밖으로 흘린 적 없건만// 옮겨가는 자리마다 꽃 피어나신다”

(「어머니」), “종아리를 걷으라 한다

// …// 차알싹!/ 차알싹!// 수평선이 핏빛이다”(「일몰」), 「청운

 스님」일상을 통해 저절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절창들과 막장

의 탄광촌으로 북쪽으로 일본으로 만주벌판 중국으로 왜곡되고

버림받은 현대사의 질곡을 찾아 뛰어다니며 마디마디 뼈에 새겨

시편들은 우리 삶의 생명력과 행복에 대한 근원에 닿아 있다.

 

 

 □  책속에서

 

 

마지막 헹굼에 피죤을 넣다 말고
물끄러미 안을 훔쳐본다
그저께 벗어두고
어저께 벗어둔
속옷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피노키오 런닝구는
손바닥만한 분홍색 팬티와 한 조 되어
나란히 손잡고 빙글빙글 돌고
체크무늬 사각팬티는
초록색 수건과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회전목마를 탄다
지난가을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들의 춤이 저러했던가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기도 하다

 

-  즐거운 세탁  전문

 

 

□  추천글

 

우리가 낯선 길을 가며 때로 잘라낸 듯한 풍경 속에 있거나

처음 가 본 도시의 정거장 마당에 서서 어디서 본 듯한,

혹은 전에 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곳이 마치 생의 한 가운데인 것처럼 투명하게

느껴때가 있다. 박영희의 시편들이 그렇다.

그것이 별로 내놓을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든

역사의 현장이든, 우리가 이미 지나친, 또는 아직 겪어

보지 않은 세상일지라도 그의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것들이 갖는 정서의 재생과 성찰을 통하여 동류적

그리움을 갖게 하는 환기력을 지닌다.


우산을 쓴 그대에게/뛰어들기엔/내 옷이 너무 많이

젖어 있습니다. 그는 젖은 사람이다.

그의 이 ‘젖은 자’ 의식은 그가 담당하고 있는 현실

세계대한 불편함이자 겸양이다.

그러나 그 겸양 속에는 눈물이 들어 있다.

 

/ 이상국 (시인)

 

 

박영희는 오늘도 밑바닥을 긴다. 저인망 어선이 밑바닥을

훑듯 세상의 바닥이란 바닥은 다 훑고 다니며 높고 번쩍거리

는 것만을 좇는 세상을 향해 “봐라, 이런 삶도 있지 않은가!

이런 처절한 아름다움도 있지 않은가!”하고 항변한다.

박영희! 대구교도소 소년수 사동의 어두침침한 독방에서

그와 나는 만났다. 저 밑바닥 인생,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

이면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족보를 캐러 국경을 넘나들다가 예까지 왔단다.

그런 그가 때때로 누런 갱지에 가슴 찡한 글들을 연필로

또박또박 써서 보내오곤 했다.

지금 이렇게 편한 의자에 앉아 읽는 시와 행여나 간수에게

들킬세라 숨죽이며 몰래 읽어보는 시가 어찌 같을 수 있으랴

마는 그래도 그의 시는 여전히 힘이 있다.

 

/ 황대권 (생태운동가) 

  

 

□  시인의 말

 

세상에는 한 인생을 망쳐놓은 꽃도 있었음을 진즉에 경험한

터라 네 번째 시집을 선보이는 봄이 은근히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명색이 시인인데, 손바닥 싹싹 비벼가며 살 수 있겠나!  
지상의 마지막 과제가 버거워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갑자기 생명과 평화 사이에 이가 빠져 있었다.

애써 그것이 ‘평등’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21세기의 꽃 兩極花는 그렇게 되살아났고, 얼씨구

좋다며 춤을 추어댔다는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래서 또 부끄럽다,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만주 여행 중인 박영희 시인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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