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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를 쓰기 위한 25가지 점검

金 敬 峯 2011. 1. 8. 00:18

 

좋은 시를 쓰기 위한 25가지 점검

1) 내 시에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2)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통일성)으로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3) 절실한 내용을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4) 관념 대신 인식을, 습관 대신 체험을 !

5) 정서에 비해 의식이 너무 앞서지 않았는가?

6) 산문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

7)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진실을 의젓하게 이끌어가고 있는가?

8) 주제의식이 선명해야 비로소 거기에 걸맞는 표현상의 기교나 독자성이 나타남

9)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그리고 은유법이 곧 좋은 시

10)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

11)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형성된다

12) 일상적인 관념어의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13) 소재에 대한 승화(의미 확대)는 잘 되었는가?

14) 포장된 상념, 자기 정서에 빠지지 않았는가?

15)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16)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구조로 승화시켰는가?

17) 구체성을 띠되 깊이 있게 (소재의 깊이 있는 이해)

18) 역동적인 자세(알맞은 속도감, 역동적 이미지 처리)

19) 무리한 비약이 있거나 난해하지 않은가?

20)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21) 마음의 부피가 엷어 부질없는 포즈를 취하지는 않는가 ?

22) 지나치게 서술하여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23) 한자를 남용하지 않았는가 ?

24) 필요 없는 반복이 거듭되지 않았는가?

25) 인식력과 표현력의 조화를 맞추었는가?

 

 

 

시 창작을 위한 일곱가지 방법

 

1. 장식 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 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면 시를 쓰는 어느 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2.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 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예)'따뜻함' / 강은교

 

웅덩이 건너편 모개가

 

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

 

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3.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아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념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4.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 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 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5.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 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6.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시의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 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 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7.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되지 않을까?

 

 

대상에 대한 표현

 

김영천

 

대상에 대한 표현 1

 

 

대상의 표현이라는 주제에 대해 조태일님은

 

1.표현은 정확하게

2.표현은 구체적으로

3.표현은 쉽고 순수하게

4.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 다른 설명이 없어도 여기까지 공부하신 여러분께서는 그냥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시문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좀더 깊이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한 항목씩 설명해보겠습니다.

 

1.표현은 정확하게

 

먼저 고려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문장가 김부식과 정지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알기 쉽게 풀어놓은 시와 한자음을 달아놓습니다.

 

하루는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가 좋아서 이 구절을 내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이 거절했습니다, 그 후 김부식이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시인 즉,

 

"절에서는 불경소리 그치고 琳宮梵語罷(림궁범어파)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하루는 김부식이 봄이 되어 그 봄을 맞는 시를 지었습니다.

 

 

 

 

"버들빛 천 줄기 푸르고 柳色千絲綠(류색천사록)

 

복숭아꽃 만 점 붉구나."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참 멋있는 시이지요? 그런데 느닺없이 정지상의 귀신이 나와서 김부식의 뺨을 때리면서 "버들의 천 줄기 누가 세어 보았으며, 복숭아꽃 만 점을 누가 헤아려보았느냐" 하면서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 柳色絲絲綠(류색사사록)

 

점점이 복숭아꽃 붉다."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두 시가 다 내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글자씩만 바꾸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만큼 시를 쓰는 글자에 중요성입니다. 시어를 쓸 때는 그만큼 표현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그냥 생각나는 말로 써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어를 고를 때부터 지극 정성을 드리라는 말이겠지요.

 

좀 설명이 길지만 이 두 표현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정지상이 김부식의 따귀를 때리며 고쳐 쓴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점점이 복숭아꽃 붉다"는 구절은 내용 면에서 김부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시는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표현이 아니며,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언어표현 도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에 두 시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지맘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김부식이 표현한 '천 줄기'와 '만 점'은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왜냐 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그 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시인의 태도가 안일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푸르른 버드나무와 붉은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리뭉실 '천 줄기'와 '만 점'이라는 언어를 선택했지만 이 언어들에는 필연성, 즉 꼭 그 언어이어야만 하는 유일성이 없다.

즉 시인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적당하게 이 언어들을 씀으로써 시어의 생명인 정서적 울림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이 쓴 '줄줄이'와 '점점이'는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버드나무와 복숭아꽃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한번 상상해 보라. '천 줄기'라는 언어보다 '줄줄이'라는 의태어가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할 것이다.

 

또한 '줄줄이' '점점이'라는 의태어가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까지 함께 곁들여져 버드나무의 무성한 푸르름과 복숭아꽃의 붉은 빛이 더욱 깊고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비교해 볼 때, 정지상이 선택한 언어들이 대상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살려내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시어들이 빚어 낸 정확한 표현 때문인 것이다."

 

여러분께서 조태일의 말 그대로 생동감이 무성한 푸르름이나 붉은 꽃의 색깔이 더욱 깊고 황홀한 것까지 느껴지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또 꼭 그의 의견에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어의 선택이 정확해야한다는 그의 의견만은 너무도 확실한 이야기이어서 길어도 옮겨보았습니다.

 

오늘은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했네요. 새 털 같이 많은 날이니 천천히 하시기로 하고 좋은 시들을 또 여러분을 위해서 몇 편 올립니다.

 

우선 서정주님의 <자화상>을 올리는데요. 좀 어려운 시인 것 같아도 시를 다루는 문학평론가라면 다 한 번씩은 다루었다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이며 서정주가 23세 때 쓴 시인 것을 알면서 읽기 바랍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이 시를 읽어보면 시어가 아닌 일상적 언어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심하여 시어로 사용하였기에 그 정확한 표현은 감동과 함께 시를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빼고 다른 언어로 대치하면 바로 시의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독창적 언어체계입니다. (팔할, 죄인, 천치, 혓바닥, 수캐 등은 이렇게

 

시 밖에서 볼 때는 일상에서나 흔히 쓰는 언어임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시 김현승님의 <플라타나스>를 올립니다.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시기 위해서 시의 부분을 싣지 않고 전문을 실으니 강의가 그 때문에 좀 길어지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은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을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 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참고로 위의 시에 나타나는 플라타나스의 모습은 그냥 단순한 나무의 차원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었음을 인식하시고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와는 상관 없지만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이제무님의 <무덤>입니다.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 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넌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 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 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시인은 죽음과 슬픔 등 여러가지 어두운 무덤에서 어두운 시의 씨앗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봉분, 밤에 떠오르는 보름달, 산을 오르는 꼬부랑 길 등 곡선의 부드러움. 포용, 원만함, 겸허한 마음 등을 깨닫고 직선의 마을 길과 대비시키며 그의 시를 완성시켜 나갑니다.

 

 

대상에 대한 표현 2

 

2.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시들을 보면 시가 막연하고 모호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는 시로서 이미 실패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시어들이 구체적 표현을 하지 못하고 아주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어떤 대상이든 그것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명제로 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하거나 암시해야 합니다. 시는 더구나 주관성이 강하기때문에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면 누구의 감동도 끌어낼 수 없다. 자기 혼자만이 아는 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정주는 (저는 서정주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땄습니다. 그래서 인용할 때 서정주님을 많이 합니다.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한 언어조직으로 짜내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실감한 대로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상상시킬까?'하는 것이다. 상상을 시키지 않고서는 우리가 실감한 어떤 시의 감동도 독자에게 전할 길이 없다. 시인이 가령 어떤 의젓한 남자를 보고 감동했다고 하자. 그 의젓함으로 '기가 막히게 세계 제일로 씩씩하고 늠름하고, 엄숙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어쩌고 추상적으로 설명해 봤자, 독자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상상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구약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의젓하고 씩씩한 남자의 코를 표현하길, '다마스커스로 향한 레바논의 수루(戍樓)와 같이....'라고 쓴다면 '아, 그래 적의 땅 다마스커스를 향해서 용감히 우뚝 솟아 있는 레바논의 수로 같이 용감한 느낌을 주는 오똑 솟은 코로구나' 하고 그 느낌을 주니, 어떤 모양임을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늘 독자에게 작자의 실감을 상상시킬 수 있는-' 어떻게 생겼는가?'하는 궁금증에 대답하는 구체적인 영상의 조직을 보족하는 것들로만 쓰여져야 한다. 추상이란 원래가 어디에서나 구상을 보족하기 위해서 쓰여져 온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 임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추상관념을 주로 해서 시라고 써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끔 보지만, 이 것은 나무 없는 그늘을 말하려는 어리석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말 그대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천사를 그리려다 짐승을 그린다'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겠지요. 시를 쓸 때도 추상어나 일반어보다는 구상어와 특수어를 써서 구체적인 표현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곽재구님의 <참 맑은 물살>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해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 연분홍 사랑 좀 봐.

 

 

어때요? 우리가 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단어들로만 구성되었지요? 이 시를 두고 조태일님은 "위에 인용된 시의 언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상어들이 대부분이다. 물살, 발가락, 고사리순, 머리카락, 허벅지, 산, 눈물들은 이미 경험에 의해서 친밀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머리로 생각하기 앞서 우리들의 가슴으로, 몸으로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정호승님의 <봄 밤>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부활절날 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사람의 발 보다

 

개미의 발을 씻긴다

 

 

연탄재가 버려진

 

달빛 아래

 

저 골목길

 

 

개미가 걸어간 길이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답다.

 

시를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려면 묘사를 잘 해야합니다. 즉 시적 대상을 그림을 그리듯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세밀한 부분들을 잘 그려냄으로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여기서 개미는 열심히 일이나 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근로자들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달동네 풍경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이어서 이성복님의 <또 비가 오면>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물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어떤 사람들은 무덤 속의 어머니를 뜻한다고 하나, 저는 대지(大地)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의견이 맞던지 어머니의 무덤이나 땅으로 어머니를 대치해놓고 보면 참 구체적인 언어로 그림을 그리듯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비 오는 숲 속을 생각해보십시오.하나 하나 그 장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집이 생각나는 최하림님의 <집으로 가는 길.2>을 읽어 보세요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밤이 과거와 현재로 부유스럽게 흘러간다

 

뒤꼍의 우물도 물이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다음날 걸어갈 길들을 생각한다.

 

 

 

대상에 대한 표현 3

 

 

3.표현은 쉽고 순수하게

 

저도 학창 시절엔 시를 쓰면서 좀 어렵고 난해한 시가 좋은 것인 줄 알고 이상의 시나 읽고, 그렇게 난해한 시를 써서 대학신문에 발표도 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무척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를 읽으면 그 시에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감동은 커녕 시가 무슨 뜻인지도 알기 어려워서야 독자들이 시를 멀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여러분들도 이 강의를 받기 전까진 시는 시인들 이나 쓰는 어려운 것으로 알았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하, 나도 쓰겠다하는 것이구요. 물론 개인 차가 있습니다만, 제가 책임 지고 여러분 모두 시를 쓰실 수 있도록 할테니 강의만 빠지지 말고 들으시구요. 자꾸 복습도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독자들에게서 시가 멀어지는 것도 이처럼 현대시가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는 좋은 시들은 다 그 즉석에서 감동을 느끼게 하는 쉬운 글들이지, 어렵고 난해한 시들이 아닙니다.

 

조태일님의 글을 잠시 인용합니다.

 

" 표현이란, 본질적으로 주관의 객관화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을 때는 생각이나 느낌, 깨달음, 발견 등 모든 것이 주관적인 것이지만 이 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철저히 객관화 되는 것이다. 이 객관화를 통해서 주관적인 세계는 사적인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고 타인과 공유하게 된다.

 

이처럼 표현 그 자체가 자신만이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것을 타인과 함께 나눠 갖고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기에 표현이 쉬워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시는 어떠한 문학 장르보다도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에 대한 표현이므로 그것을 온전하게 객관화시키기 위해서는 독자가 알기 쉬운 표현을 찾아내야 한다."

 

이어서 조태일님도 지적한 바가 있지만, 우리 시인들이 실제로 시를 쓸 때는 쉽게 쓰는 것이 어려운 표현을 그대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지금 강의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분들은 학자들이어서 강의가 학문적으로 좀 어렵지요. 저는 이 것을 풀어서 알기 쉽게 하려니 교안 작성부터 무척 어렵네요. 여기에서 정진규님의 <몸시24. 고향에 가서.를 한 번 읽어볼까요.

 

 

바알간 초록시금치 밑둥

 

아침 산책 나온

 

바알간 오리발 맨발

 

 

 

채마밭을 지나

 

 

 

바알간 볼의 소년이

 

새운동화를 신고

 

邑內

 

학교로 간다

 

 

 

도시락이 따뜻하다

 

 

 

아직은

 

미워할 수 없는 게

 

더 많다

 

아직은

 

마알간 속살로

 

기다리고 있는 게 더 많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입니까? 정말 쉽고 순수한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시이면서도 너무 많은 감동을 품고 있지요.

 

 

시를 아름답게 보일려고, 너스레를 떨거나 무슨 기교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아주 쉽고 투명한 언어들을 사용하였지요.

 

고대 중국의 유명한 시인 백낙천은 일단 시를 쓰면 자기 집에 부리던 하인들이나, 이웃의 농부들을 불러 보여주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그 시를 고쳤다 합니다.

 

청록파 시인 중 한 분이신 조지훈님은 그의 글 "소재와 표현"이란 글에서 말하기 좋은 표현을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눈, 억지로 꿰맨 자국이 없는 글 솜씨, 순수하면서도 거침없는 문장으로 돌아가는 일이라 했으며, 개성적인 솜씨로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할 때는 온건하고 진실해야 한다고 했다 합니다.

 

*참고로 백낙천에 대한 자료와 시 한 편을 여기 올리니 필요하신 분은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백거이(白居易:772~846)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자 낙천(樂天). 호 취음 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평범한 관료의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며,어린시절 빈곤과 전란에 시달렸다. 젊어서 벼슬에 나아간 뒤 직언과 간쟁(諫諍)을 하여 미움을 사 좌천되기도 했으며, 현실비판적인 시를 많이 썼으나 후기에는 한적과 은일을 주로 읊었으며 사상적으로 도교와 불교에 심취했었다.

 

 

차라리 술을 마셔라.(不如來飮酒)

 

 

막입홍진거(붉은 먼지 혼탁한 속세에 들어가)

 

영인심력로(마음과 정력을 헛되게 말라.)

 

상쟁양와각(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싸운들)

 

소득일우모(얻은 것은 한가락 소털뿐이리)

 

차멸진중화(잠시 노여움의 불길도 끄고)

 

휴마소리도(웃음 뒤에 칼도 갈지 말고)

 

불여래음주(차라리 와서 함께 술이나 마시며)

 

온와취도도(조용히 누워 도연히 취하세)

 

 

여기서 정희성님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한번 읽지요. 이 시도 유명한 시여서 혹시 전부터 시에 관심 있었던 분들은 아마 읽어 본 시일 것입니다.

 

 

흐르는 것이야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여러분들은 시인이 좋은 시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꾸민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시에서 그대로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시인의 진실성이 여러분의 마음과 맞닿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를 써야합니다. 미사여구나 난해한 단어를 피해야 합니다. 진실성이 없는 글은 혹은 겉으로 멋이 있는 것 같아도 이내 쉽게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이준관님의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이라는 시를 하나 더 읽고 강의를 마치지요.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새떼들도 밟지 않은 저녁 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의 村落들은,

 

마지막 햇볕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가려 뜯어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그득하다.

 

지붕 위에 초승달 뜨고,

 

오늘 저녁, 딸 없는 집에서는

 

저 초승달을 데려다가 딸로 삼아도 좋으리라.

 

게를 잡으로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게새끼가 되어 돌아오고,

 

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처녀들이 몰래 들어가 숨은 꽃봉오리는

 

오늘 저녁,

 

푸른 저녁 불빛들에게 시집가도 좋으리라.

 

 

참 좋지요? 이 시가 어떻게 쓰였는지 들어보시고,

 

여러분들도 시골에 가시면 그 풍경을 연상하시며 시를 한 번씩 써보십시오.

 

 

"지난 6월초 건강하던 빙장 어른이 갑자기 작고하셨다.

 

그 빙장어른의 49제가 마침 여름방학과 겹치는 때여서

 

아예 식구들을 데리고 시골로 갔다.

 

죽음처럼 슬픈 게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일 뿐, 죽음과 무관하게 세상은 마냥 밝게

 

빛났다. 산 자의 몫인 生은 여전히 아름답고 활기에

 

넘쳤다.

 

아이들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는 아랑곳없이 들녘으로

 

개구리, 여치, 잠자리를 잡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의 녹

 

색으로 빛나는 生 어디에도 깊이 음각된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죽음이 우리의 生과 무관하기만 한 것일까?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生이 더 가치있고 소중하고 아름

 

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여름 저녁놀은 정말 아름다웠다.

 

산 자에게만 허락되는 이 축복받은 시간들, 살아 있음의

 

이 황홀함, 그런 정서적인 울림이 컸기에 여름 저녁은

 

실제보다 더 곱고 아름다웠으리라

 

 

둑길의 저녁놀, 암소의 느릿한 울음, 조용히 저녁의 열기 속에 휩싸여 있는 여름의 村落, 낮은 목책들, 지붕 위에 뜬 초승달, 그리고 개펄에 싸라기별이나 드나들 만한 게구멍을 파고 사는 게새끼들을 잡아가지고 오는 아이들의 긴 그림자........이런 밑그림들이 이 시를 구성하고 있다."

 

너무 길어서 여기서 줄입니다. 자기 주위의 사물을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진실하게 표현하면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입니다. 시의 표현은 멋진 기교로 꾸미고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내미지상(內美之象)을 뿜어내는 언어들이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조태일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공자가 『시경 』을 평하여 "시 300수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한 것은 시의 표현들이 거짓되거나 꾸밈이 없는 순수성과 진실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진실성과 순수성은 이만큼 시에 생명력을 주는 큰 역할을 합니다.

 

 

4.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오늘은 좀 어려운 이론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여러가지 문예비평이론 중 에서 "낯설게하기"이론을 윤석산 교수님의 글을 옮깁니다. 문예비평이론은 너무 어려워서 외울 필요는 없구요. 그냥 한 번 읽어보시기만 하시고 필요하신 분은 잘 기록해두시기 바랍니다.

 

[낯설게 만들기와 이미지 및 은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초기에 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차츰 시선을 산문 쪽으로 옮기면서 문학의 일반적 특성에 관심을 둔다. 슈클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에서 시의 모든 요소와 기법은 시인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독자의 습관적 수용에 충격을 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서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 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보 전달을 위주로 하는 산문에서 은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 반면에 시에서는 미적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낯설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서 <산문적 은유(prosodic metaphor)>와 <시적 은유(poetic metaphor)>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의 운율도 실상 무미건조한 생활 언어의 억양을 일그러뜨려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는 수단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t)'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는 견해를 편다.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은 우리가 모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해준다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또는 낯선 정신 세계를 단번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의 경제적 전략임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낯익음', '친숙성'은 '자동화(automatization)'로 이어져 탈언어화(脫言語化) 다시 말해 기호화(記號化)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며,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 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슈클로프스키는 이 기법이 실험적인 작가들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원칙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과 평화} 에서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무대장치를 '페인트칠한 마분지 조각들'로 묘사하고, {부활}의 미사 장면에서 성병(聖餠)을 '조그만 빵 조각'이라고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 지적한다. 그리고, ≪홀스토머≫(Xolstomer, 말이 화자인 일인칭 화법으로 씌어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에서 말의 주인과 그 친구들의 변덕과 위선을 말(馬)의 시각에서 보고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위선성을 새롭게 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톨스토이는 낯설게 된 사물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서, '사물을 낯설게 만든 것은 사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사물을 끊어 정말로 필요한 것-어떤 도덕적 가치-을 훨씬 더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돌을 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낯설게 된 사물을 배경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비판을 한 것은 슈클로프스키는 사물의 새로운 지각만 강조하고 그를 통해 표현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제거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야콥슨도 회화를 예로 들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편다. 그는 그림 같은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나, 삼차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인위적 방법을 채택하며, 그 그림의 박진성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관습적 방식이 계속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문과 같은 '표의문자'로 바뀌어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이그려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강하게 지각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poetic quality)에 대한 정의는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 만들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시가 <자동화>를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가 있다면, 슈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기호>와 <지시체> 간의 관계로 설명하여,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 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며 부정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어느 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설은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희곡에서 '소외(疏外)의 기법'을 사용한다. '소외의 기법'은 종래 연극의 경우 관객을 작품 속으로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작품이 진행되는 도중에 이것이 연극임을 강조하여 몰입과 동화를 막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따져보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법을 말한다